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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2/28 12:28:27
Name 후추통
Subject [일반] 하느님의 나라 ⑤ 계유사변
백련교도의 난과 동남 해구(해적)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 전국적인 반청 농민 봉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잠시 숨고르기에 불과했습니다.

여전히 민간에는 백련교의 분파들이 민중 사이에 스며들어 있었고, 거기에 백련교 뿐만 아니라 팔괘교와 이괘교, 홍양교, 감괘교 등 백련교 외에도 다른 종교 교단이 민간에 퍼져 있었습니다. 건륭제 아래로 퍼져버린 관료들으 부패상은 이미 중앙 조정이나 황제가 어찌 손을 써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거기다  건륭제 총애를 받던 화신을 숙청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지만 그 몰수한 재산은 국고가 아닌 가경재의 개인금고인 내탕고로 갈 정도로 가경제 자신도 남을 탓할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옹정제는 지방관료들에 대한 감시와 보고를 통해 관료들의 모든 것을 파악해 그들을 강력하게 제어했지만, 건륭제 말기에 이러한 관료 감시제도가 붕괴하면서 관료들의 부패상은 심해졌고, 그에 따라서 국고는 점차 비어갔습니다. 가경제는 당연히 증세로 빈 국고를 채워가려 했지만, 증세는 결국 반발을 불러오게 되죠. 그러나 증세로 인한 세금 역시도 백련교와 소수민족, 이슬람 반란을 진압하느라 지출한 재정을 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는데만하더라도 2억 냥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썼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죠.

이 와중에 화북 일대에는 팔괘교를 비롯한 종교들이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810년 경에는 팔괘이교, 진괘교, 영화교, 홍양교, 백역교 등의 사교집단들이 팔괘교로 통일되어 흡수되어 가는 형편이었습니다.

팔괘교는 강희년간에 산동성 단현에서 유좌신이라는 사람이 만든 종교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북의 팔괘교 지도자는 이문성과 임청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임청은 원래 절강성 소흥현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으로 이주합니다. 임청의 가문은 빈한해 약재상의 점원을 하다가 성병에 걸려 직장에서 쫓겨난 후, 거리에서 순찰을 도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아버지가 하던 서리직을 이어받지만, 부정이 적발되어 서리직에서 마저 쫓겨나죠. 이후 임청은 그의 매형과 함께 동업으로 다관을 하지만 도박과 계집질로 돈을 날려 매형에게 쫓겨납니다. 그리고 노역에 종사하면서 돈을 조금 모았지만 그 이후 그 돈으로 유흥을 즐기다가 역시 모두 탕진했고, 소주에 있는 셋째 매형을 가서 단양지현의 하급 관리로 일합니다. 그러나 재물을 탐하던 그의 성격은 여전해서 뇌물을 받았다가 발각되 도망쳤고, 조운선을 끄는 일을 했다가 북경에서 메추라기를 팔다가 전직 장군이었던 왕노야 라는 자를 알게 되는데, 왕노야는 임청에게 돈을 줘서 메추라기 공급소를 차리게 하지만 자본금을 모두 잃어버려 쫓겨나죠.

이문성은 하남성 골현 사람으로 역시 가세가 빈한했지만 토목일을 배웠고, 이후 산술이나 점성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1806년 (가경 11년 5월) 임청은 고향집인 대흥현 황촌 송가장에서 그 일대에 만연히 퍼진 홍양교에 가입합니다. 그러나 2년만에 홍양교는 발각되었고, 임청은 관에 끌려갔다가 곤장을 맞고 보정현으로 가 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임청이 황촌으로 돌아가보니 홍양교의 수령들은 이미 붙잡혀 가거나 도주한 상태라 종교가 거의 해체 수순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말로서 많은 사람에게서 돈을 뜯어냈던 전적이 있던 임청은 사람들을 잘 꾀어 빈 홍양교의 우두머리가 되고, 지도자가 도망가거나 관에 잡혔던 감괘교 집단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임청은 미래를 예언한다고 하면서 입교자들로부터 종복전이라고 하는 돈을 뜯어냈고, 그는 만일 일이 이루어지면 종복전은 10배가 되어 되돌아 오며 백전을 내는 이에게는 땅 100두락을 얻을 수 있다고 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입니다. 그는 항상 자신을 금성이 하강한 화신이라 말했죠. 직예 지역은 현재의 베이징 인근으로 유민이나 궁핍한 사람들, 영세상인, 수공업자, 하급관리 뿐만 아니라 궁중의 하급 환관까지 임청 아래로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임청은 빈한한 자들에게 양식을 배급하는 일을 하면서 이들을 자신의 사교단체 내로 흡수시켰습니다.

이문성 역시 종교적 환상을 내세워 자신이 능통한 점성술을 이용해 팔괘교의 교주가 됩니다. 하남 활현에 근거지를 마련한 이문성의 신이한 능력에 혹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수가 수만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임청처럼 교도들에게서 많은 돈을 거둬들여 부자가 되었는데, 임청처럼 인 마이 포켓 한게 아니라 따로 무기를 제조하고 군마를 사들여 반란을 준비하게 됩니다.

임청은 자신을 스승으로 모시는 우량신에 주목합니다. 우량신은 하남 활현 사람으로서, 원래 활현의 창고지기였는데 창고의 비단을 훔쳤다가 발각되어 보정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임청과 만났는데 임청은 자신의 말로 우량신을 현혹시켰고, 임청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우량신에게 갑니다. 그리고 우량신을 통해 하남의 진괘교 교주 풍극선과 팔괘교 교주 이문성과 만나게 됩니다.

1811년 임청과 풍극선, 이문성은 생사지교를 맺고 하남 활현에서 홍양교, 진괘교, 팔괘교를 통합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임청은 스스로 팔괘교의 창시자인 유좌신이 환생했다고 주장하면서 역경의 구절을 왜곡해 이문성을 하남성 일대의 팔괘교 총교주로 지지합니다. 그리고 총교주가 된 이문성은 임청을 십자귀일이라는 직위로 올리고, 임청과 이문성은 홍양교, 진괘교, 팔괘교를 통합해 활현 일대의 교단을 천리교라는 교단으로 통합하죠.

천리교로 교단을 통합하자, 그들은 반란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반란이 성공하고 천하를 장악하면 부하들에게 관작과 봉토를 내리겠다고 약속하고, 임청은 천황, 풍극선은 지황, 이문성은 인황으로 내정해 삼두정치의 정치 체계를 세우기로 하고 임청은 직예, 이문성은 하남, 풍고선은 산동을 탈취하기로 결의합니다.

1813년(가경 17년) 정월, 임청과 이문성과 그 부하들은 도구진에서 대회를 열고 1814년 9월 15일을 거사일로 삼아 난을 일으키기로 결의합니다. 또한 임청과 이문성은 교단 전체에 돈이나 양식을 지원하면 이후에 땅과 관직을 하사하겠다고 포고합니다. 그리고 각지역에 교단의 사람들을 보내 세력을 확장시킵니다. 그리고 백색 깃발을 들고 백포로 머리를 감싸고 허리를 묶어 적과 아군을 식별하기로 하고, 봉천개도(奉天開道)를 구호로, 득승(得勝)을 암호로 해 서로 교류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거사준비를 하던 1813년 11월 우극경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뒷받침하기 위해 삼교불응겁총관통서라는 책을 임청에게 바치고, 임청은 십팔자명도(十八子明道)라는 구절을 왜곡해 이문성이 인간세상의 왕이 되야 한다는 근거로 삼았고, 이문성은 이자성의 환생이라고 교단에 퍼뜨립니다. 그리고 신도들에게 자신은 유좌신의 환생이라 하며 유노야 라고 부르도록 명령합니다.

반란 준비 면에 있어서 이문성은 우량신에게 800여명을 주어 준산현에 몰래 군수품 생산을 하도록 하고, 본인은 환현의 사가장에서 조직을 꾸려나갑니다. 그리고 예정된 1814년(가경 18년) 9월 15일이 기다리던 와중, 9월 5일에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소문으로 퍼지던 반란계획이 관에 누설된 것이죠.

하남 활현의 지현인 강극첩은 이문성과 우량신의 반란 계획을 투서받고 바로 사람들을 보내 이문성과 우량신,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 일부를 체포합니다. 강극첩은 이들을 모진 고문을 가하며 반란의 수괴들을 자복하라고 말했지만, 이문성과 우량신은 강극첩의 말을 거부하며 오히려 자신들은 평범한 백성인데 강극첩이 부당하게 잡아 가둔다고 주장하죠. 격노한 강극첩은 이문성과 우량신을 수백대 때린 후 이문성의 경우는 정강이를 절단하고  성의 최고 관부로 보낼 준비를 합니다.

반란 계획이 누설되고 지도자 두명이 잡혀가자 이문성의 부하들인 황흥재와 황흥상 형제와 이문성의 부인 장씨는 이들을 구해내기로 하고 7일 새벽 풍극선, 우극경, 황흥재, 황흥상, 장부인, 이문성의 조카들이 3천의 군사를 데리고 활현 현성을 습격해 강극첩과 그 일가, 그리고 활현의 관리들을 죽였고, 활현 현성이 점령당하자 천리교가 장악한 각 지역에서 반란 봉기가 시작됩니다. 이문성은 자신을 대명순천이진주(大明順天李眞主)로 자칭하고 우량신을 군사로, 송원성에게 군직을 맡겨 반란군을 이끕니다.

반란이 소강되었던 상황에 일어난 이문성의 반란에 놀란 가경제는 직예총독으로 있던 온승혜를 흠차대신으로 해 직예의 군사를 이끌고 가 이문성 반군을 진압토록 하고, 산동 순무 동흥에게는 활현의 남동을 막아 남진하지 못하도록 하고, 하남순무 고기를 서남으로 가서 서진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또한 산서 대동진 총병인 장적을 산서성에, 서주진총병을 북상케 해 이문성 반군을 각지역에서 협공토록 하고, 양강총독으로 있던 백령을 서주에 진주케 해 혹여 있을 우회공격을 막도록 합니다.

백련교의 반란 당시 느린 대처로 인해 강남과 호북, 사천, 섬서 일대가 백련교 반란에 휘말려 10년동안 겨우겨우 진압했기 때문에, 하남의 이문성 반란은 대군을 파견해 이들을 포위하면서 단기간에 반란을 진압토록 한 것이죠. 이렇게 청 조정이 움직이는 사이 산동 서남부의 천리교단 역시 이 반란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청 조정의 분주한 반란 진압 대책을 주시하던 임청은 이문성의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일체 움직이질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15일의 반란 계획을 고수하면서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는 일거에 반란을 성공시킬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베이징 인근인 직예와 베이징의 천리교를 세력권으로 둔 임청은 그 아래에 하급 환관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 조복창이라는 하급 태감이 그들과 내통해, 가경제는 열하에서 피서중인데 이문성의 반란이 일어나면 피서를 취소하고 북경으로 되돌아 오니 백관이 황제를 맞이하는 17일은 황성인 자금성과 북경성이 텅텅 비니 이때를 노려 기습하라고 한 것이죠. 그러나 임청은 자신의 1차 계획은 가경제를 사냥터에서 습격해 납치하려고 했고, 이것이 실패하자 북경성 장악이 아닌 자금성 장악 계획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매우 허술해서 북경을 함락하면 황제가 산동으로 파천해도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 부하 중 하나가 그에게 무술을 익히라고 조언하자 "나는 신이 도와주니 검술은 도라 할 수 없다"며 그 제안마저 물리쳐버리죠. 그리고 만일 황제가 산동으로 간다면 산동의 천리교도들이 호응해 공격할 것이라고 말하죠. 그리고 2만명도, 2천명도 아닌 2백의 교도들을 평민으로 분장시켜 자금성으로 가려 하자, 부하가 인원수가 너무 적으니 하남의 지원군이 도착하면 자금성을 습격하자고 조언하자 임청은 1인1기로 유주(가경제)를 격파하는 것은 일도 아니고, 자금성에 들어가는 건 수십명이면 된다. 하남 병력이 도착하면 외성이 혼란에 빠지니 우리는 자금성만 장악해 지키면 된다고 하면서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이죠.

임청은 궁중태감으로 있던 유득재를 돈과 연회로 호감을 사 교단에 가입시키고 그의 동료나 부하인 왕복록, 고광복, 장태, 난진희, 양진충을 천리교에 가입시킵니다. 그리고 임충은 부하들을 이끌고 북경으로 가 이들을 만나 자금성 내의 길 안내를 하도록 요구합니다. 임청은 대흥현과 통현 및 직예 일대에서 140명을 차출해 평민으로 변장시키고 백포 2조각과 칼 1자루를 지급하고 14일 저녁에 서로 저녁을 나눠먹습니다. 임청은 부하들을 나눠 진상은 20명을 이끌고 동화문을, 진문괴는 50명을 이끌고 서화문을 공격하게 하고 무기를 몰래 숨겨서 북경성 내로 들어갑니다. 약조된 시각이 되자 진문괴는 태감 장태와 고광복의 인도를 받아 서화문을 통해 자금성으로 난입하고 진상, 공서는 유득재와 유금등의 인도를 받아 동화문으로 돌입합니다. 서화문으로 자금성에 난입한 병력은 서화문을 지키던 병사들의 화살을 빼앗아 무기로 삼고 융중문을 통해 황제와 후궁들이 거주하는 대내로 진입하려 하지만 궁궐 수비병들이 문을 걸어잠가버려 들어가지 못했고, 동화문쪽으로 돌입했던 인원들은 병사들이 속히 문을 닫아버려 애초에 계획했던 30명이 아닌 5~6명만이 들어왔다가 전투를 벌여 모두 체포됩니다.

서화문의 상황은 좋지 않았는데 궁 내로 진입하려던 반군들이 문이 잠기자 담을 타넘으려고 하자, 모두들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궁궐 수비군을 이끌고 있던 황자 민녕, 후일의 도광제는 어찌할바를 몰라하다가 옆에 있던 태감 상영귀가 조총으로 마구 갈겨 사살하라고 조언하자 직접 총을 들고 난입하려던 반군을 사살하고, 백기를 들고 지휘하던 반군 역시 사살합니다. 그리고 북경성 내에 있던 성친왕 영리, 진국공 혁호과 관군 60명을 이끌고 도광제와 합류하죠. 궁문 앞에서 이오라는 자의 지휘를 받아 싸우던 반군은 배후를 습격한 관군과 싸웠는데, 이때 융중문의 편액에 화살이 박히게 됩니다.

칼로만 무장하고 있던 반군이 조총과 창, 대도, 화살로 중무장한 관군을 이기기란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자금성 내까지 나아갔던 반군은 서화문까지 후퇴했다가 내응자인 태감 고광복이 도움으로 황궁 성벽으로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명순천이라는 깃발을 들고 하남의 원군을 기다렸지만 원군은 도달하지 않았고, 성벽의 풀숲에 숨었다가 황궁 오문의 성루인 오봉루를 불지르고 혼란한 사이 도주하려다가 실패하고 모두 체포되죠.

궁중내 내응한 태감들 중 고광복은 자금성 성벽에서 사살당하고 양진충은 도주했다가 체포됐으며, 유득재, 유금, 왕복록, 장태, 난진희 등은 모두 체포되었다가 능지처참형을 당합니다. 거기다 난진희의 경우는 심문 받던 도중 궁중 내의 천리교 태감들을 모두 불어버려 또다시 피바람이 불죠.

자금성 습격을 계획한 임청은 자신의 집인 황촌에서 상황을 보다가 모든 사실을 알아낸 관군이 임청의 집에 들이닥쳐 임청을 잡아들입니다. 그리고 임청과 동시에 임청의 처자식과 친척, 그리고 그 집에서 일하던 사람, 그 이웃까지 몽땅 체포되고 이번 자금성 습격사건에 참여한 이들은 일족 뿐만 아니라 친구까지 모두 붙잡혀 총 4백명의 사람들이 체포됩니다. 청 조정은 73명을 능치처참형을 육시형에 55명, 6명을 참형 또는 교수형에 처했고, 연좌된 사람 들 중 49명을 신강으로 유배를 보내 노비로 만들었고, 88명을 복건, 광동, 사천 등지로 보내 노비로 만들었습니다.

9월 10일 승덕산장에서 북경으로 오던 가경제는 16일 자금성 습격사건을 보도받고 그 자리에서 죄기조(罪己詔)라는 조서를 반포합니다. 이 죄기조의 내용은 당장 실록에도 나와있죠.

“황제가 7월 18일에 열하(熱河)에 행차하였다가 9월 14일에 계주(?州)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5일에는 북경에 천리교(天理敎)란 도적의 변란이 있었는데, 이른바 천리교란 사술(邪術)을 부리는 무리의 칭호입니다. 모여서 도둑의 무리가 되어 하남(河南)의 대명(大名)과 황촌(黃村)에 흩어져서 노략질을 했는데, 그 무리가 70여 인이었습니다. 평민(平民)처럼 꾸미고 정양문(正陽門)을 통하여 금성(禁城)에 숨어 들어 몇 명의 사람을 상해하고는 양심문(養心門)으로 나가려다가 황차자(皇次子) 면령(綿寧)이 직접 조창(鳥?)을 들고 도둑 두 명을 쳐죽이자, 비로소 적이 물러갔습니다. 이에 북경에 있던 여러 신하와 대신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모두 쳐죽이고, 황촌 지방도 토벌하여 평정하였으며, 도둑의 괴수 임청(林淸)은 갈가리 찢어서 그 수급(首級)을 보내왔습니다. 황차자는 적을 먼저 막아낸 공으로 지친왕(智親王)으로 봉하고, 도둑을 죽이고 체포한 대신과 관병은 혹은 자급을 올려주기도 하고, 혹은 은과 비단을 상주기도 하였습니다. 황제가 하유하기를, ‘도둑의 분란이 갑자기 일어난 것은 실로 상도(常道)를 어지럽힌 것이다. 그러나 며칠 사이에 그 괴수가 죽음을 당하고 잔당들이 모두 평정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천지와 종사(宗社)의 신령이 묵우(默佑)한 덕택이다. 10월 초하룻날 정결하게 제사를 올려 사례하여야겠다. 의친왕(儀親王)을 보내어 천단(天壇)에 대제(代祭)하고, 성친왕(成親王)은 지단(地壇)에 대제하고, 경군왕(慶郡王)은 사직단(社稷壇)에 대제하도록 하라. 태묘(太廟)에는 짐이 몸소 예를 행하겠다…….’ 하였습니다.” - 순조실록 13년 11월 22일 기사

그러나 이러한 죄기조는 단순히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라서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하남 활현의 이문성 반군은 북경으로 조운을 운송하는 운하로를 끊어 북경을 식량고갈시키려는 계획을 세웠고 운하 인근의 도구진을 점령해 이곳에 쌓여있던 식량을 탈취합니다.

흠차대신으로서 반군 토벌의 총대장이었던 온승혜는 대군을 집합시켰지만 나아가지 않고 형세만 관망하게 됩니다. 북경 습격 소식을 들었으니 그로서는 북경으로 가야할지 아니면 그대로 반군 진압을 해야할지 맥을 잡지 못한 것이죠. 온승혜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가경제는 격노해 온승혜의 직위를 해제하고 나언성으로 대신하게 하고 삼서제독 양우춘을 부장으로 삼아 반군을 진압하게 합니다. 양우춘은 직접 병력을 인솔해 10월 위휘로 나아가 선두에 서서 27일 도구진을 탈환했고, 11월에는 임청, 이문성과 함께 반란의 수괴 중 한명인 풍극선이 패하고 직예성 헌현에서 체포됩니다. 산동 역시 산동순무 유청이 산동의 천리교 본부인 정도현을 점령해 산동의 반군을 모두 토벌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문성이 이끄는 활현의 본군, 나언성과 양우춘은 환현 포위전에 나섭니다. 반군은 포위되기 직전, 이문성을 호위해 나가기로 합니다만, 정강이가 잘려 말을 탈수 없었던 이문성 때문에, 반군은 이문성을 마차에 태워 휘현산으로 숨어듭니다. 그러나 백련교도의 난에서 지형에 의지한 게릴라전에 뜨거운 맛을 봤던 청군은 양방에게 군사를 주어 이들을 추격하게 합니다. 결국 궁지에 몰린 이문성과 그 부하들은 싸우다가, 이문성의 경우는 분신자살해 생을 마치고 군사인 우량신은 이문성의 처 장부인에게 난민으로 가장해 도피시키려 하지만 장씨는 이를 거부하고 우량신과 함께 싸우다가 형세가 궁지에 몰리자 인근 민가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자결합니다. 이로서 천리교의 반란은 진압되었죠. 이 천리교 반란은 계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계유지변(癸酉之變), 금문이 습격당했다 해서 금문지변(禁門之變)이라고도 불립니다. 청

청 조정은 천리교의 원류인 백련교와 그 일파들을 모두 사교로 규정, 금지시켰지만 단검으로 무장한 수십명에게 금문이 뚫리고 궁중 환관들까지 천리교에 가세해 자금성을 공격했다는 수치로 인해 청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집니다. 과거 어느 왕조도 궁내의 환관이 반군과 연계해서 황제를 죽이거나 붙잡으려는 시도를 한적도 없고, 심지어 맥없이 외성문이 채 백명도 안되는 오합지졸들에게 뚫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거기다 마침 서구 열강이 밀수하는 아편으로 인해 재정불안과 함께 국내의 상황도 점차 좋아지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1813~1814년 경, 광동성 화현의 객가 자경농 집안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명은 화수, 커서 이름은 인곤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이후 중국 전역을 크게 들썩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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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28 15:30
수정 아이콘
하나님을 사칭해 속이는 사람도 그렇고 속는 사람도 그렇고 실제 진실이라 믿는 사람은 얼마 안됐을거 같습니다.
진실이라고 믿고싶었던 것이고 또 허황된 진실이라도 그걸 통해 뭔가 변화를 원했던거겠죠.
우리나라 동학의 경우도 종교가 바탕이지만 사실 농민전쟁 성격을 보여주는것처럼요.
그나저나 자금성을 습격하는건 참으로 담대한 계책이네요.
중국은 나라가 원체 크니까 지방에서 반란 일으키면 오래갈수 있을텐데 한번에 심장부를 공격하는 계책이라니..
세츠나
13/03/01 12:47
수정 아이콘
중국 역사에 이런 일도 있었다니; 그 숫자에 자금성이 뚫린다는건 상상도 못해봤네요. 녹정기가 더 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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