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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7 18:45
저 노예 대금 지불하기 위한 돈 마련하려고 인도 면직공업 수공업 파괴하고 면화 공급하려고 흑인 노예로 농장 구성하고 놀라운 제국주의 시대죠
22/06/17 18:46
1. 자고로 힘있는 쪽이면 죄다 크게 다를게 없죠. 아시아에선 일본이 그랬고, 전근대적인 비문명국이 저 흑인노예질보다 뭐 사람 더 관대하게 대한것도 아니고..그러나 똑같은놈들이 힘이있어서 그랬고 힘이 없어서 안 그랬건간에 그 안 그랬다는 결과만으로도 뭐 차이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전근대적인 비문명국 기준으로도 조선은 당시 막장이었죠 뭐. '명예로운 죽음' 밈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케이스가 별로 없습니다. 조선이나 고종이나..
22/06/17 19:19
사실 이슬람 쪽은 흑인 노예보다는 백인 노예를 더 선호했습니다. 중세 초기에는 노르드 인들이 납치한 사람들을, 중세 말에는 베르베르인들이 악착같이 유럽인들을 괴롭혔죠. 이 시대에 납치 되어 이슬람에 팔려나간 유럽인을 백만은 넘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군인, 중노동을 맡을 노예들을 제외하곤 거세를 했던 것도 사실인데 무슬림은 거세를 하지 말라고 쓰여져 있어서 콥트교도들이 거세 시술을 맡았다고 합니다
22/06/17 19:08
3번은 뭐 국가 재정 안좋아지면 둔전을 한다든지 뭐한다든지 하는 사례가 꽤 있으니 그러려니 합니다만
저렇게 급료를 안줘서 막장화된 군대를 진압하기 위해서 외국 군대를 끌고 들어온 게 당시 정부의 막장성을 증명하는거죠. 임오군란에서 청군의 진압을 요청한 시점부터 조선은 뭔 수를 써도 망했을겁니다.
22/06/17 19:55
개인적으로는 광해군때부터라고 봅니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단종폐위부터 겠지만, 광해군만 잘했어도 조선이 많이 달랐을거같아요. 세자시절 광해군이야 인정이지만, 즉위 이후부터는 진짜 이런 폐급이 또 없습니다.
22/06/17 19:13
1번의 경우에는 뒷사정과 재미 있는 이야기가 있죠.
뒷사정 : 본디 스페인은 원주민들을 노예처럼 가혹하게 굴렸는데 이에 대해 도미니코회의 수도사 바르톨로메 라스 카사스는 "인디오들에게도 이성이 있으며 설득과 교육으로 교화 하여야 한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바야돌리드 논쟁). 이후 교황청에서도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인디오들에 대한 노예노역은 금지 되었고 그 대신으로 사하라 이남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게 되었죠. 라스 카사스도 처음에는 "인디오들 말고 흑인을 노예로 써라"라고 말했지만 이내 흑인들이 학대받는 것을 보고 노예 철폐론으로 선회했다고 합니다. 재미 있는 얘기 : 카고 컬트의 옛날 버전인데 당시를 겪었던 흑인들에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내려옵니다. "바다 너머에서 불쑥 솟아나온(지구는 둥그니까 멀리서 보면 수평선 너머에서 배가 솟아 올라오는 것처럼 보임) 괴물의 입에서 나타난 자들은 사람들에게 신기한 물건을 주고 사람들을 데려갔다. 괴물의 입속으로 사람들이 들어가고 그들 역시 그곳에 들어가자 괴물은 바다 너머로 사라진다. 끌려간 사람들은 괴물에 의해 지옥으로 끌려간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22/06/17 19:50
민비 고종은 진짜... 이미 기울어진 국운을 살리기엔 늦었던것도 맞지만, 했던 짓 하나하나가 끔찍하기 짝이 없습니다.
대원군도 결과적으로 실정을 많이 저질렀지만 그래도 전 기울어진 나라를 살리려는 마음은 있었다고 봅니다. 근데 민비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민씨일가의 사리사욕만을 위해 권력을 사용했어요.
22/06/17 19:55
그나마 인권 개념이 좀 올라서, 사람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기던 시절은 좀 지난 이후로군요.
더 고대로 가면 완전 혼파망... 그냥 하층민의 목숨은 지배계층의 소유물이던 시절이 생각보다 최근이에요.
22/06/17 20:30
고대까지 안가도 저는 청나라 만주족들의 극악무도함과 잔인함, 아즈텍의 인신공양과 식인행위를 보면 21세기에 태어난게 진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요.
22/06/17 21:49
저당시 아프리카 원주민을 실어나르는 배는 그냥 화물선이었어요. 사람을 나르는 화물선.
인권...은 글쎄요. 상당수가 항해를 못 버티고 죽었다고 하더군요. 검색해보시면 아시겠지만 딱 누울자리만 주고 어떨 때는 서로 포개놓고 아메리카까지 실어날랐죠. 시체와 인분속에서 버틴 사람의 후예가 아메리카 대륙의 흑인들이죠.
22/06/17 21:55
당연히 노예무역은 흑인들을 인간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죠. 마치 양계장에서 닭을 키울때 닭 한마리 간신히 들어갈 공간에다가 넣어놓고 그 안에서 밥먹고 똥싸는 것만 하게 했다가 도축하듯이 말입니다. 그 정도 취급을 당한겁니다.
제가 말했던 그 이전 시대는, 인종이나 민족, 국가 등을 넘어서 그냥 같은 공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끼리도 서로 죽이는게 아무렇지도 않았던 시대를 말하는거죠. 예를들어 바이킹, 몽골족, 아즈텍, 전국시대 일본... 등등을 보면 그런 '타자화'가 없이도 그냥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마음대로 하는게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였다는 얘기입니다.
22/06/18 14:42
저 시절 선박 근무환경은 최악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열악했죠
선장, 부선장, 1등항해서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선원들은 평등하게 쥐가 갉아먹은 비스킷과 썩어가는 물을 마시며 제대로 된 휴식시간도 없이 일을 했죠 선원도 그런데 가축처럼 파는 흑인 노예들에게 잘해줄 수도 없을 뿐더러 잘해줄 이유도 없죠
22/06/17 21:16
세계에서 제일 노예해방이 빨랐던 국가는 의외로 프랑스더군요. 그것도 1315년에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칙령을 내렸고, 사서상에는 1571년에 노예가 해방된 사례가 있다고.
22/06/17 21:55
검색해서 위쪽에 있는 거 아무데나 들어가서 읽어봤더니 프랑스의 노예해방은 식민지 흑인들의 저항이 거세어서.... 라는 이유가 있네요.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56313
22/06/18 10:59
이 글 보고 더 당황스럽네요. 18년도 일인데 인조이재팬에서 일본 애들한테 탈탈 털렸던 게 2004년의 일이었는데 그로부터 14년 동안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대부분이 모르고 있었다는 게.
하기사 반일종족주의를 비판할 때도 그걸 비판하는 소스로 당당히 교과서에 쓰여져 있는 이미 유통기한 한참 지난 썰로 비판하는 것도 본 적 있긴 했지만요
22/06/18 11:09
한국에서 누가 저런 사실을 자랑삼아 떠벌리고 다닐 일도 없을 뿐더러, 그래봐야 인터넷 한쪽 구석에서 일어난 헤프닝에 불과하니까요. 저 글에 댓글을 달았던 '도연초'가 제 이전 닉네임인데, 거기 댓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도 2017년 쯤에야 당시 논쟁에 참가했던 혐한 일본인으로부터 무용담 비슷하게 들었으니.. 뭐 웃픈 일이죠.
22/06/17 21:35
예전에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었고, 올해 <문명의 붕괴>란 책을 읽었습니다. <총, 균, 쇠>로 유명한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후속작이죠. 그 책의 영향으로, 조선이 멸망한 원인은 인구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숲을 파괴하고 농지를 늘리고 인구를 늘렸고, 그로인해 식량에 문제가 생기고 그에따라 국가가 취약해지고 부정부패가 늘어난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인구가 늘고 삼림은 파괴되었다는 자료를 본 적이 있고요. <문명의 붕괴>에서는 일본도 마찬가지로 삼림파괴로 위기를 겪었는데, 그걸 극복한 얘기가 비중있게 실려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못한 거라 봅니다. 농업을 강조한 사상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고요.
임진왜란, 유럽의 부상, 세도정치 등 다른 원인과 함께, 인구증가 즉 맬서스의 <인구론> 관점 및 삼림파괴 즉 <문명의 붕괴> 관점으로 조선의 멸망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임오군란도 그런 관점에서 살펴볼 일이라 생각합니다. 식량문제이고 인구문제인게 오히려 근본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이 필요한 이유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역사해석들 일부 권력자의 무능에 둔다면, 일부 권력자만 잠시 잘 하면 나라가 잘 될 거란 생각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배층의 부정부패에 둔다면, 썩을 것들을 청소하면 나라가 잘 될 거란 생각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현재의 여러 문제점을 이성적으로 해결하여 밝은 미래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도덕감정 등 감성적으로 해결하는데 집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도덕적 관점으로도 역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지만, 또한 맬서스나 다이아몬드 교수의 이성적 관점도 추가로 필요한 거라 생각합니다.
22/06/17 23:15
일본이 삼림파괴를 극복한 것은 인구가 늘어나지 않아서인 것이 결정적이지 않나 싶네요. 일본은 18세기 이후로 인구증가가 정체되었다고 하니까요. 일본은 유아살해 풍습이 있어서 인구증가를 억제할수 있엇다고 하던데 한국은 그럴수 없었죠. 만약 일본도 인구 증가를 억제할수 없엇다면 막부의 공식적 명령이든 뭐든 소용 없었을겁니다. 인구가 늘어나면 결국 숲을 파괴할수밖에 없으니까요. 조선도 숲을 보호하려했지만 계속 인구가 늘어나고 있어서 불가능했죠
22/06/17 23:47
조선에 인구가 왜 늘었겠어요? 먹을게 있으니까 늘었겠죠. 먹을게 없으면 굶어죽어서 인구조절이 됐겠죠. 먹을게 왜 있었겠어요? 숲을 불태워버리고 농지로 만들었으니까 늘었겠죠. 숲을 어떻게 불태울 수 있었겠어요? 그점이 포인트죠. 어떻게 화전을 일굴 수 있었는지 말이죠. 그게 대체 누구 숲이며, 무슨 권리로 화전을 일궜는지 말이죠. 조선은 민본주의에 농업을 중시한 나라라 생각해요. 중대한 차이점이 있는 거죠. 일반적인 도덕관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숲은 소수가 독점을 하는게 오히려 보존될 가능성이 큰 것 같아요. 그걸 귀족이 독점하든, 아니면 중앙정부가 독점하든지요. 안 그러면 공유지의 비극이 일어나니까요. 사람들이 들어가서 숲에 불지르고 밭으로 만들어버리고 농사 짓고 이러게 되니까요. 그런데 조선은 삼림개방정책을 펼친 걸로 들었어요. 권세가가 독점하지 못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숲을 개방한 거죠.
<문명의 붕괴>에서 조금 가져와봤어요. 낙태와 유아 살해 얘기도 나오거든요.
22/06/17 23:48
일본의 산림 정책은 역설적이게도 평화와 번영으로 야기된 환경 및 인구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등장했다. 1467년부터 거의 150년 동안 일본은 황제가 힘을 잃어가던 초기에 나타난 유력한 가문들끼리의 대결로 몸살을 앓았으며 결국 황제가 무너지자 통제권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다수의 호족(일명 다이묘들에게 넘어갔고 그들은 계속 싸움을 벌였다. 이 전쟁은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후계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사적 승리로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이어 1615년 이에야스는 오사카에 근거를 두고 있던 도요토미 가문을 제압했고, 남은 도요토미 잔당들이 자살로 죽음을 택하면서 전쟁은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 ...
평화와 번영이 이어지자 일본의 인구와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전쟁이 끝난 후 한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요인들이 동시에 겹치면서 인구는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였다는 점, 같은 시기 유럽이 전염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상대적으로 여기에서 자유로웠다는 점(일본이 외국으로의 여행,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생산적인 두 가지 작물(감자와 고구마)의 도입, 늪지 개간, 홍수 조절 능력의 향상, 관개 시설에 따른 쌀을 비롯한 농작물 생산성의 증가 등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전체 인구가 물론 증가했지만 특히 도시에서의 인구 증가율이 높아 1720년경에 이르러 에도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가 되었다. 일본 전체를 통해 평화와 강력한 중앙 정부 덕분에 화폐와 도량형이 통일되고, 지역 간의 관세 장벽이 철폐되었으며, 도로가 건설되고 해안 지역의 해운업이 번성하면서 일본 내의 무역 거래가 활성화되었다. ...
22/06/17 23:48
삼림 파괴는 1600년대의 평화와 번영에서 비롯된 환경 및 인구 위기의 주요 요인이었다. 이 시기에 목재 소비 (거의 모두 국내에서 생산한 목재로 충당했다)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까지 일본에서 대부분의 건물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돌, 벽돌, 시멘트, 진흙, 타일이 아닌 나무로 지어졌다. 목재로 집을 지었던 것은 목재에 대한 일본인들의 미학적 선호, 그리고 일본 역사 초기부터 지속된 목재 획득의 용이성 때문이었다. 평화와 번영, 그리고 인구 증가가 지속되자 건축을 위한 목재소비는 성장하는 농촌 및 도시 인구의 필요에 맞추어 늘어나기 시작했다. 1570년대 초 히데요시, 그의 후계자인 쇼군 이에야스, 그리고 많은 다이묘들은 커다란 성과 사원을 지어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고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 그러나 건축만이 삼림 파괴를 유발한 원인은 아니었다. 목재는 난방과 요리를 하기 위해, 또 소금, 타일, 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산업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연료로서의 기능 역시 수행했던 것이다. 나무를 태워숯을 만듦으로써 철을 제련할 수 있는 뜨거운 불을 얻을 수 있었다. 또 인구가 늘어나자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으므로 숲을 베어내고 농작물을 생산하기 위한 농토를 만들어야 했다. 농부들은 자신의 밭을 '녹색비료(예컨대 나뭇잎, 나무껍질, 나뭇가지)'로 비옥하게 만들었고 소와 말들에게 숲에서 얻은 사료(덤불, 풀)를 먹였다. ... 산림 지역을 소유하고 있는 다이묘들은 쇼군에게 매년 목재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졌다.
건축 붐과 이에 따른 삼림 파괴는 1570년부터 1650년까지 최고조에 달했다. 그 이후에는 목재가 부족해지면서 그 소비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쇼군이나 다이묘의 직접적인 지시, 또는 농부 자체의 필요성에 따라 나무를 베었으나 1660년대부터는 사기업이 정부의 주문을 받아 목재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 1582년, 히데요시는 일본 전역에서 목재를 요구한 최초의 일본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영지에서 생산되는 목재만으로는 많은 건물을 짓는데 따른 목재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산림 지역의 통제권을 갖고 있었으며 매년 각 다이묘들에게 특정한 양의 목재를 공급하도록 명령했다. 쇼군과 다이묘들은 자신들을 위해 산림을 벌채한 것은 물론 마을이나 사유지를 장식하기 위해 온갖 귀중한 수종 독차지했다. ... 1710년에 이르면 경사가 너무 가팔라 접근할 수 없거나, 아니면 도쿠가와 시대의 기술로는 벌채가 너무 어렵고 채산이 맞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 개의 주요 섬들(규슈, 시코쿠, 혼슈)과 홋카이도 남부 지역의 접근 가능한 모든 산림 지역이 벌채되었다. 삼림 파괴로 목재, 땔감, 사료로 사용되던 나무가 부족해졌고 호화스런 건축물도 어쩔 수 없이 더 이상 지을 수 없게 되었다. ...
22/06/17 23:48
하지만 이런 분명한 현상 말고도 목재 부족 현상은 다른 방향에서 고통을 주기 시작했다. 목재와 연료를 둘러싼 마을 내 마을 간, 그리고 다이묘와 쇼군간의 분쟁이 증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 모두는 일본의 산림을 먼저차지하고자 경쟁을 벌였다. 이때 강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놓고 또다른 논쟁이 벌어졌다. 목재를 운반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낚시나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1장 몬태나의 경우에서 살펴보았던바와 같이 산불도 증가했는데, 이는 벌목지에 새로 심어진 나무들의 경우 이전의 오래된 나무들보다 더 불에 타기 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일단 경사면을 보호하고 있던 숲이 제거되고 나니 많은 비가 내리고,눈이 녹고, 지진이 자주 발생하면서 토양이 침식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나무가 사라지자 경사면에서 물이 흘러내려 저지대를 범람시켰고, 토양이 침식되면서 저지대의 관개 수로의 물 수위가 높아져 폭풍으로 인한 피해가 커졌으며, 숲에서 채취할 수 있었던 비료와 사료가 부족해졌다. 결국 이런 모든 요소는 인구가 증가하던 시기에 농작물의 양을 감소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을 줄곧 괴롭혔던 식량 부족 사태가 1600년대 후반부터 끊임없이 발생했다.
1657년의 메이레키 대화재는 수도의 재건설을 위한 목재 수요를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구, 특히 대도시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던 때에 발생해 목재 및 다른 자원이 점점 희소해지고 있다는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그대로 진행되었더라면 아마도 이스터 섬의 경우처럼 재앙을 맞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이후 2세기에 걸쳐 일본은 점차 안정적인 인구 성장을 보이기 시작했고, 지속 가능한 정도의 자원소비를 시현했다. ... 또 하나의 변화는 거의 제로에 가까운 인구 성장률을 시현했다는 점이다. 1721년에서 1828년 사이의 인구 변화는 2,610만 명에서 2,720만명으로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과거 세기와 비교하면 18세기와 19세기의 일본인들은 결혼을 늦게 했고, 더 오랜 기간 아기를 돌보았으며 피임, 낙태, 유아 살해뿐만 아니라 수유 중 무월경의 방법을 통해 다음 아이를 낳는 간격을 더 넓혔다. 낮아진 출생률에서 개별적인 부부들이 식량과 기타 자원의 부족 현상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도쿠가와 시대에 쌀 가격이 떨어지면 출생률이 올라가고 반대로 가격이 올라가면 출생률이 낮아졌던 사실로 알 수 있다. 이때 생긴 또 하나의 변화가 목재 소비를 감소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바로 17세기 후반부터 나무 대신에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비율이 올라가기 시작했던 점이다. 목재가 많이 사용되어 무거웠던 집들은 이전에 비해 보다 가벼워졌고 연료 효율이 높은 쿠킹 스토브가 평(平)난로를 대체했다. 휴대하기 편리한 숯 난방기로 집 전체를 데우지 않아도 되었다. 또 겨울 동안 태양열 난방에 이용하는 집들도 증가했다. 상의하달 방식의 정책 중 많은 부분이 나무를 베고 심는 속도 사이의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 처음에는 주로 소극적인 방식(벌목을 자제하는 것)을 취하다가 나중에는 점점 적극적인 방식 (더 많은 나무를 심는 것)으로 전환했다. 지도층에서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는 첫 신호는 메이레키 화재가 발생한 후 9년이 지난 1666년 쇼군이 발표한 포고령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포고령은 벌채로 인한 침식의 위험성. 시냇물 퇴적층의 증가, 홍수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국민들에게 나무묘목을 심도록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은 산림 이용을 통제하고자 사회 모든 계층에 적용되는 전국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이에 따라 1700년 무렵에 삼림지를 관리하는 정교한 시스템이 마련되었다. 역사가인 콘래드 토트먼(Conrad Totman)의 말을 빌리면, 이 시스템은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 어떻게, 얼마나 많이 어떤 가격에 할 수 있는지를 세부적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의 산림 문제에 대한 도쿠가와 시대의 첫 번째 조치는 목재 생산량을 이전 수준으로 복귀시킬 수 없는 소극적인 조치였지만 최소한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함으로써 적극적인 조치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끔 상황이 더 악화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다. 또 점점 희소해지는 산림 자원에 대한 일본 내의 경쟁에 기본적인 규칙을 마련해 제시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소극적인 대응은 목재 공급 면에서 세 가지 단계, 즉 삼림지 관리, 목재 운송, 목재 소비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첫 번째 단계로, 일본 산림의 4분의 1을 직접 통치하고 있던 쇼군은 자신의 산림을 관리하도록 별도의 관료를 임명했으며, 250명의 다이묘들도 자신의 땅에 있던 산림을 관리하기 위해 역시 별도의 관리를 임명했다. 이 관리들은 산림이 재생할 수 있도록 벌채 지역을 폐쇄하고 정부 소유의 토지에서 목재를 베거나 동물에게 풀을 뜯길 수 있는 권리를 자세히 명시한 허가증을 농민에게 발급했다. 또 농지를 만들기 위해 숲을 태우는 관습을 금지시켰다. 쇼군이나 다이묘의 통제권이 미치지 못한 지역의 산림은 마을이 통제권을 행사했는데, 해당 마을의 수장은 모든 마을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동 재산으로 관리했으며, 산림에서 생산되는 재화를 채취할 때 적용되는 규칙을 만들었고, 다른 마을 사람이 함부로 들어와 이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했으며 이 모든 규칙을 시행하기 위해 무장 경비원을 배치했다. ... 이와 같은 모든 소극적인 조치는 쇼군이나 다이묘가 미리 정한 바에 따라 목재가 사용되도록 강제함으로써 일본의 산림 위기를 해결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산림 위기 상황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목재의 용도를 명확히 했던 쇼군과 다이묘 그들 자기 자신들이라고 볼 수 있다.
22/06/17 23:59
한편, <문명의 붕괴>에서는 조선의 경우는 소개가 안 되어 있는데요. 구글링에서 찾은 논문에는 이런 얘기가 있더군요.
https://www.dbpia.co.kr/pdf/pdfView.do?nodeId=NODE07129823&mark=0&useDate=&ipRange=N&accessgl=Y&language=ko_KR&hasTopBanner=true '농본 정책을 표방한 조선은 국초부터 농지개간을 통한 경작지의 확대에 힘을 기울였다. 개간될 토지는 이전에 산림천택으로 불리던 곳이었는데, 조선은 이곳에 대해 ‘산림천택 여민공지(山林川澤 與民共之)’로 불리는 조선의 산림 개방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의 인구는 15세기 초 570여 만이던 조선의 인구가 19세기 최 말기 에 1700만을 넘어섰다.' '19세기 말~20 세기 초의 한반도는 초원에 가까울 정도로 숲이 훼손되고 고갈되었다.' 불가항력으로 이렇게 된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조선도 삼림보존 및 인구조절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랬다면, 18~19세기에 어떤 뒷심을 발휘했을지 모를 일이겠고요.
22/06/18 00:30
물론 불가항력은 아니죠. 일본처럼 대규모로 유아살해를 했다면 인구 증가를 막을수 있었겠죠. 일본의 마비키로 살해되는 아이는 해마다 십만이넘었을거라고 하더군요. 아이를 해마다 십만명씩 죽이면 일본처럼 할수도 있었을겁니다. 저는 조선이 그런 선택을 하지않은 것이 별로 아쉽지 않군요. 그때문에 조선이 망했더고 하더라도요.
22/06/17 21:39
위안부도 마찬가지죠. 일본군 혹은 관에 의한 강제연행은 없었다는게 공식견해구요. 한국인에 의한 인신매매, 납치도 많았고 한국인에 의한 취업사기도 많았죠.
22/06/17 22:06
"강제징집은 없었다"는게 공식적인 입장이긴 하죠. 그리고 한국인 앞잡이들을 시켜서 위안부 여성들을 모아오게 한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게 징집이건 아니건 간에, 한번 들어가면 나갈 수도 없었고, 자유도 없고, 생사여탈권도 일본군이 가지고 있었다는게 문제인겁니다.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성적 노예"라고 명칭을 정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인거고요, 위안부를 강제징집 쪽에만 초점을 두고 본질을 호도하는 글들이 여기저기서 종종 보이는데, 이게 요점이 아니죠.
22/06/17 23:18
공식적인 입장만 따지면 한한령도 없지요. 공식적인 것으로만 따지면 서구 식민지 국가들의 잔혹행위도 없고요. 이런 것들 전부다 존재하지 않는가 보죠?
22/06/18 00:33
저도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일본군이나 관에 의한 [강제연행] 케이스는 네덜란드 여성을 대상으로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케이스를 빌려와서 조선에서도 동일한 방식의 강제연행이 있었다고 윤색된 것이라고 들었어요. 위안부 여성을 군대에 공급한 주체는 주로 한국인 사업가들이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사업가고, 사실상 포주들이었죠. 근데 제가 한창 위안부 관심있어서 이것저것 찾아보던 게 5~6년 전쯤이었는데, 지금은 또 뭔가 새로운 증언이나 발굴된 사실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5~6년 전 피셜로는 이랬어요.
[일본제국을 옹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제의 위안부 수요가 없었다면 그렇게 거대한 위안부 산업이 발생할 수가 없으니까요. 즉, 원청업체인 일제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하청업체인 조선인 위안부 사냥꾼들 또한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이 말은 본문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22/06/18 02:29
80-90년대를 살아보며 조금이나마 남았던 일제 잔재를 경험했었죠.
그 공식이라는 말이 얼마나 우스운 말인지도요. 일제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있던 곳이 아마 군대였을 겁니다. 지금 식으로 생각하면 절대 안됩니다. 당시 장부나 공식 문서는 전부 거짓입니다. 심지어 젊은 장교와 하사관들이 장부 내역으로 싸우기까지 하고, 장교가 솔직하게 기재하라고 지시해도 하사관들이 뒤에서 조작하는 게 일상이었고요. 그 하사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게 적으면 우리 부대가 마치 잘못되는 것처럼 인식된다며 저 사람은 몰라서 저러는 거라는 식이었죠.
22/06/18 09:21
이래서 썩은 정부는 기를 쓰고, 기록을 위조하는 겁니다.
30년쯤 지나면 2020년, 2021년 세계가 팬더믹으로 신음할때, 중국엔 초창기에 바로 잡고, 코로나 환자 0명 찍은 날이 수두룩했다. 일본도 초창기부터 코로나 환자수에 대해서 전세계를 거르스며 저공비행시키는거 보고, 저 나라는 역시 믿을수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22/06/18 18:00
요새 전쟁에서 민간인 죽으면 그렇게 난리를 치는데 님 댓글과 추천수는 매우 다르네요. 그때 일본 민간인하고 그 당시 그땅에 살던 조선 민간인들은 뭔 죄일까요?
군사시설 그리고 텐노 살던곳하고 타격하면 될문제를 소련이 오니깐 빨리 끝내려고 민간인들까지 죽게한게 잘한건가요? 반일 감정이야 있는거야 알겠지만 제가보기엔 매우 논쟁될만한 일 같은데 말이죠.
22/06/18 20:19
일본인 굶겨죽이는 동안 소련이 한반도를 다 차지했다면, 산밑의왕 님도 지금쯤 이런 댓글 다는대신 수령님 찬양글을 쓰고 있었겠죠. 운 나쁘면 어디 양강도 언저리에서 굶어죽고 있거나.
22/06/18 08:06
원전 대신 일본열도 불바다로 만드는 작전이 수행됐더라면
원전은 따위로 불릴 정도로 일본인들이 죽었을테고, 일본 전역이 회복불가였을지도 모릅니다 실리를 따진다면 원전 2방으로 끝난게 일본제국이 지은 죄 대비해서 싸게 먹힌거죠 그리고 최초로 원전 맞은 국가 이미지로 지금도 피해자들에게 사과는 커녕 우리도 피해자다 라며 피해자 코스프레 하고 있는게 아주 가증스럽죠
22/06/18 18:04
개인적으로 민간인들이 피해자는 맞다고 봅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안 죽었나요? 별개의 문제로 보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2차세계대전당시 일본 국가의 전체구성원을 전범이라고 보는것인가요?
일본전역을 왜 불바다로 만듭니까. 군사시설 및 필요하다 생각하는 지역을 타격하면 될일이고 군수공장도 마찬가지고요.
22/06/18 16:37
일본은 이미 패전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조건부 항복을 위해 군민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1년 가까이 시간을 질질 끌고 있었고 미국은 이미 전후세계에서의 소련 견제를 대비해야 했어요. 다행히 원폭 개발이 소련 참전 이전에 완료되어 빠르게 투하할 수 있었고 일본의 항복을 얻어낼 수 있었죠. 그 결과 38선을 일본이 아닌 한국에 그을 수 있었고 열도 전체와 반도 절반을 확보하여 소련 영향권을 북한 지역으로 한정지어 낸 겁니다. 한민족 입장에선 어처구니없고 억울한 결과이긴 하지만 미국 입장에선 가장 최선의 합리적 선택이었습니다.
원폭에 희생된 민간인이 안타깝다면 그 책임은 이미 자국민목숨조차 파리취급 하던 일본정부에 있죠.
22/06/18 18:08
2차세계대전과 냉전이 결과론적으로 한국한테는 잘된일이지만 그렇다고 민간인들한테 말그대로 원폭투하한사실은 잘한게 아니라는겁니다. 민간인 얼마가 죽었네 어쨌네 하는 뉴스보면서 그런생각들더군요.
결국엔 자기들 이익을 위해 민간인들 죽인걸로 귀결되지 않습니까?
22/06/18 20:24
인권을 유린당한 위안부 할머니들과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안타깝다면, 그 책임은 이미 자국민들의 운명을 외국에 팔아넘긴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 지배층들에게 있죠. 동의하시나요?
22/06/17 22:28
뭐 영국 프랑스만 해도 노예해방은 일찍 공표했으면서 무려 1860년대 남북전쟁에서 노예주를 옹호하는 남부를 지원했죠. 노예 대신 쓸 수 있는 식민지인들이나 쿨리들이 수두룩했으니 실제로도 말만 노예해방이었고
입이랑 행동이 다른 건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다 같습니다. 어딘가에는 우리랑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유토피아가 있다는 환상은 지양해야죠.
22/06/18 08:09
중동 다른 지역은 더 막장이긴 하죠 @_@...
카타르에서 일을 하니 돈도 꽤 받고, 밥도 잘 나오니까요 공사 환경은 중동 어딜가나 열악하니 돈이라도 많이 받아야 겠죠
22/06/18 09:23
동남아에서는 그런 급박한 공사추진을 하지도않고
동남아도 산재가 많긴해도 안죽을 노동자가 죽을 환경을 만들진않아요... 그런식으로 말하지마세요. 거기 노동자에서 사망자 비율 얼마나 끔찍한지 찾아보시고 말하세요. 전세계 언론이 대 참사로 기록한 사건인데..
22/06/18 09:55
이미 자게에 한번 지나간 얘기입니다.
https://pgr21.com/freedom/90729 남에게 찾아보라고 하기 전에 본인부터 찾아보시고 말하세요.
22/06/18 13:01
왜 이글을 당시에 못봤었는지 모르겠는데 분문과 댓글을 보다보니 많은 생각이 드는군요
특히 상계동 올림픽 이라는 다큐멘터리는 여러모로 인상이 깊네요 @_@
22/06/17 23:18
현재 우리가 중국을 비판하는 것중 상당부분은 과거에 우리나라가 했던 일들이다.. 라는 것도 있죠..
저작권 의식 없는 베끼기.. 이웃 국가의 기술을 훔쳐서 산업 발달 도모하기 등등.. 특히나 중뽕 가득한 그들의 역사 의식 또는 왜곡은 보면서 혀를 차면서도 '수밀이국'같은 단어들이 떠오르면서 이불킥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22/06/18 08:14
개도국 이하 국가가 개도국 이상으로 진입하려면 필수 코스였죠
유럽끼리는 인접하고 베끼는게 당연한 시대여서 그런 개념 없이 넘어갔고, 일본제국 멸망 후 625로 간신히 살아난 일본은 카메라맨들을 선진국에 보내서 모조리 사진 찍은 후 본국으로 보내서 베끼면서 성장해서 80-90년대 일본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했고, 한국은 일본의 발전을 벤치마킹하고 선진국 및 일본을 베끼고, 신토불이 같은 국뽕 정신을 통해 이만큼 발전했죠 다만, 일본이 너무 과도하게 모든걸 베끼니 특허 개념이 점점 물 위로 올라오고, 법이 되면서 사다리 걷어차기가 시행되었는데 한국이 사다리 걷어차기 직전에 개도국 이상으로 올라와서 실질적인 패널티 없이 물질적 선진국에 막차로 올라왔죠 그 후 중국, 태국, 베트남 등의 국가는 특허 등을 무시하고 발전만 우선해서 성장하거나, 특허 등의 제도를 무시 못해서 성장 동력에 제한이 걸렸죠 요즘 유행하는 ESG도 개도국 입장에선 사다리 걷어차기로 보일 껍니다
22/06/18 09:14
중동의 노예 정책에 대해 비판이 없는게 참 끔찍하죠
아라비아 나이트에서부터 흑인노예를 쓰레기처럼 묘사하고있고 이슬람 중흥이전부터 아프리카 노예산업을 발전시킨 흑인 노예무역의 창시자가 고대 중동제국들이고 가장 오랫동안 노예제를 유지하며 인간 착취로 자본 끌어 모은것도 중동국가들이었고 현재까지도 아프리카계 아랍인에 대해 가장 차별하는 나라들이 중독국가인것도 사실이죠 유대인들도 에티오피아계 유대인 차별로 논란있었지만 본국으로 모두 받아주고 매우 빠르게 평등하게 된것도 정 반대죠 가장 기분 나쁜게 이 중동국가들은 흑인은 노예로 쓰면서 거세시켜 번식을 못하게했지만 유럽의 백인 여성을 더 많이 납치해 성노예로 썼다는 점입니다. 쿠란과 샤리아는 성노예의 사용을 공식화하고 후대의 율법학자들도 이를 지지하고. 왕실하렘은 물론 일반가정도 가사와 성적봉사를 제공하는 노예 서넛정도는 두는게 일반적이었는대 백인 노예가 자녀를 낳으면 성노예로 이어지고 흑인 노에가 자녀를 낳으면 살인해버리는 그야말로 인류사 최악의 홀로코스트가 관습적으로 유지된게 중동의 성노예 문화처럼 느껴지고 현재 중동 왕정의 인종적 특징을 보면 확실이 이질적인것을 느낄수가 있죠
22/06/18 12:56
그걸 실제로 겪은 사람들은 거의 없는 100년도 더된 옛날에 발생한 사건이라 그런거죠
그리고 중동 노예 정책으로 시비를 걸고 싶어도 책임을 져야하는 당시의 아랍국가 대부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고, 지금 아랍국가 대부분은 20세기 이후에 탄생한 신흥 국가들이라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죠 무엇보다 지금 중동은 석유라는 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이라 수백년 전 역사로 석유를 가진 중동 국가에게 시비를 걸 나라는 세상에 없습니다
22/06/18 14:05
사실 중동의 노예제는 현재진행형 이라고 봐야하는 측면도 있죠.
악명높은 카팔라 제도라던지 빈약한 환경에서 빈약한 복지가 문제이긴 합니다. 하긴 수도시설이나 먹는걸 해주면 그사람들 연봉의 몇배는 그런데 써야하긴 합니다만 말이죠.
22/06/18 14:15
오스만제국이 나뉘어지면 전쟁, 인종범죄가 사라진게 되나요???
지금도 오만, 터키, 리비아, 이집트 처럼 과거 정부를 게승하는 흑인노예에 책임있는 국가들 여전히 건재하고 시리아, 요르단, 이란, 이라크, 사우디, 쿠웨이트, 카타르 이런 신생국가라고해서 과거 했던 역사 지우면 없던일이 되는건가요?? 애초에 이런 비판이 있는 이유가 중동에서 아직도 아프리카계, 동남아계를 무시하면서 인간 취급안하는 사건이 많았거든요 서방비판만능주의에 빠져서 중동에 대해 아무 비판이 없으니 카타르에서 수천명 죽여도 세상은 관심없죠. 아프리카계 지식인들은 다 기억하고있고 그들이 지도자가 되면 그 역사는 실제적인 외교 수단이 될겁니다 서방국가보다 더 오랫공안 노예제를 유지하고 악랄하게 했기 때문에 지정학적 문제 생길까봐 과거 리비아의 카타피도 흑인노예문제로 아프리카 정상들에게 공개 사과까지했는데 지구 저 멀리있는 동아시아에서 중동에 대해 그렇게까지 책임없다, 책임 물을 수 없다고 말 할 필요가 있나요?
22/06/18 14:25
그럼 무서운사람님은 중-근세 중동인들의 전쟁, 인종범죄를 어느나라, 누구에게 가서 물어볼 껀데요?
아프리카만 내부만 봐도 서구 열강들이 자로 그은 국경선 때문에 열강 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난리고, 아프리카는 인종, 민족, 부족도 너무 많은데다 한 곳에서 거주하는게 아니라 유목민처럼 이동도 잦아서 피해자가 어디서 온건지도 불분명하죠 중동 국가가 죄가 없다는게 아니라 중동 중세~근대 노예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특정하는거 부터가 일이라는 겁니다 (그나마 가해자는 오스만의 후손인 터키라고 특정할 수 있겠는데, 20세기 이전 유목민 이었던 중동 왕가 및 귀족들의 노예 및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이 얼마나 있을까요? 피해자에 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있긴할지 모르겠습니다) 님이 말씀하신 카다피의 예 처럼 가해자 포지션의 국가가 필요에 의해 피해자 였을 국가에게 사과하고, 아프리카 국가도 이득을 위해 사과를 받으면 몰라도 님 같은 제 3자가 중동에 가서 중세~근대 노예 제도를 아프리카 국가에게 사과해라고 얘기하면 중동 국가들은 그저 코웃움만 칠 껍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도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들 끼리도 한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태이므로 중동 국가에게 사과를 지속적으로 요청할지 의문이고, 오히려 중동 국가가 필요에 의해 자기를 도와 준다면 과거 따위 다 잊고 그저 땡큐 베리 머치 할 가능성이 더 높죠 그 동네는 우리처럼 이렇게 여유롭게 채팅하는 곳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매일 목숨을 거는 곳이니까요 멀리갈꺼 없이 한국-베트남의 관계만 봐도 좀 희한하죠 분명히 한국이 외화 벌려고 남의 땅에 가서 전쟁을 한 잘못한 일이지만 한국과 싸운 베트콩들은 현 베트남 정부와 갈등 끝에 학살되서 사라졌고, 베트남 정부도 이긴 전쟁 + 한국과의 이득 관계 및 베트콩과의 접점이 사라지면서 우리가 이겼는데 한국이 왜 사과를 하냐고 하고 있죠 역사 문제라는게 입장에 따라 그만큼 달라지는 문제고, 그래서 님의 중동 노예 얘기가 별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국제외교는 야생입니다 카다피가 마음에서 우러나서 아프리카 국가에게 사과했을 꺼라는 생각은 하시지 않겠죠 윗댓글 맨 마지막에도 '지정학적 문제가 생길까봐'라고 적어놓으셨으니까요 독일도 유럽 국가들에게는 허구한날 나치 때문에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는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죠 카다피도 리비아가 아프리카 국가들과 바로 옆에서 붙어있지 않았다면, 그들과의 외교 및 분쟁을 신경안써도 되는 입장이었다면 이스라엘처럼 뻔뻔하게 나갔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22/06/18 14:42
소련, 일본제국, 나치독일, 제국주의 영국이 이곳저곳 들 쑤시면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세계에서 여전히 지배적인 위치에 있어도 그들은 비판 받고 반성적인 역사적인 연구와 더불어, 그런 유사한 외교적인 모습도 비춰지지않으려고 유럽의 아프리카 투자도 제한되는게 지금 현실이죠 제가 말하고자하는건 그 국가들이 사과할거다 vs 사과하지않을거다 피해 지역 특정가능하다 vs 불가능하다 이게아니라 중동국가들도 적극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야한다는걸 말하는겁니다. 카타르처럼 아시아인 수천명죽고, 필리핀 가정부 아파트에서 떨어뜨려서 살인해야 언론 겨우 타는 현실 보고 안타까워서 개인적으로 느낀 점임니다
22/06/18 14:48
사실 제가 좀 반론을 적긴 했는데 사실 전 무서운사람님 처럼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
다만 현실이 좀 많이 개차반일 뿐이고 그걸 인지 시켜드릴려고 적은 것 뿐이죠 @_@... 코로나19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매번 발생했는데 아시아권에서만 머무르니까 서양에서 방심하다가 전세계로 퍼진 거고, 요즘 화제가 되는 원숭이 두창도 아프리카에서만 발생했으면 지역 풍토병 취급하며 한두번 뉴스에 나오고 끝났을텐데 희한하게 미국 유럽 호주 쪽에서 계속 퍼지니 WHO 및 서양 언론에서 확진자 수 대비해서 과도하게 언급하고 조심하고 있죠 그에비해 마다가스카르에서 매년 일어나는 살인적인 가뭄이나, 아프리카 내륙에서 전쟁하는 것 등 선진국에 영향이 없는 사건들은 사람들도 쳐다보지도 않고 언론도 한두번 언급만 하고 넘어가죠 그런 의미에서 중동국가는 석유라는 힘을 가지고 있고, 노예사건은 100년이 지난 일이다 보니 어지간해선 서로 묻고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드린 거죠 그래서 무서운사람님 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들은 화가 나시겠지만 공개적으로 중동 국가를 비난할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거죠 NGO 단체들 태반도 비영리인척 하지만 현실과 돈을 무시하지 못해서 위선적인 사건이 발생하는게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전 언젠가부터 이런 사건에 대해 너무 과몰입하는걸 지양하고 있습니다 제 정신건강에 안좋더라구요 @_@...
22/06/18 10:26
말리 제국, 송가이 제국, 악숨 왕국같은 고대 흑인들이 세운 국가들의 주업이 흑인 노예 매매였다고 하죠.
흑인 부족을 공격해서 노예로 삼고 다른 흑인부족들에게 팔아넘기는식으로요. 유럽쪽은 먼 아프리카에서 노예 사오느니 다른나라 공격해서 백인 노예 잡는게 더 싸게먹혔다고....
22/06/18 14:55
일본도 서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자국민을 서양에 노예로 팔았죠.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 말기라 서양인들이 가져온 조총 등 서양 물산을 적극 활용했는데 서양에 팔 만한 건 귀금속뿐이었고 귀금속 없는 다이묘는 결국 일본인을 노예로 팔아서 조총을 샀습니다.
노예무역은 한 상권 안에서라면 노예가 돌고 도니 인적자원이 유지되지만 서양과 아프리카처럼 한쪽만 노예를 파는 관계라면 결국 노예를 파는 쪽이 인적자원 유출로 고통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파는 쪽은 당장 노예를 팔아 버는 돈을 포기하면 자신들 간의 경쟁에서 밀리니 노예 판매가 중단되기도 어렵습니다. 일본도 전국시대 말기라 곧 통일되어 조총 수요가 급감해서 망정이지 전국시대가 금방 안 끝났으면 장기간 서양에 노예를 내다팔았을지도 모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쇄국과 기독교 금지도 노예무역 중단과 이를 통한 조총 수입 제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22/06/19 03:32
야밤에 다른거보다 이 글 생각나서 댓글 남기는건데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때부터 역사적 논쟁을 하다보면 항상 친일 논쟁을 하게 되죠. 그리고 한번씩 나오는 논리가 있죠. [그래서 일본에서 남긴 사료 말고 다른 근거가 있냐] 물론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라도 했을때나 임시정부같은 조직 내부의 이야기같은거야 상관없겠지만 기본적으로 식민지 조선에 관한 상당한 분량의 데이터는 일본 사료 없이 이야기할 수 없겠지요. 위에 청산리 대첩 이야기에서도 일본 사료와의 교차 검증을 통해 더욱 진실에 가까운 것을 추려낼 수 있을테니까요. 근데 극단적인 사이트에서 저런 소리하면 일단 친일 매국노 취급이 기본이죠. 일본 사료면 무조건 조작이 들어갔을꺼다라는 마인드가 기본인 반지성주의 또는 일종의 국수주의 부류들이 적지 않아서요. 결론은 좋든 싫든 근대사에서 일본 사료를 이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한국인 입장에선 가장 불편한 역사적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22/06/20 13:53
2번의 여자 노예이야기는 터키 드라마 위대한 세기 Muhteşem Yüzyıl 무흐테솀 유즈이을의 모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엄청 대작인데 중/동유럽/중동에서 나름 히트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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