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에게. 2022년 6월 어느날.
내가 너에게 왜 이 시점에 글을 남기려 하는지 설명이 필요할 거 같다. 넌 이제 열살에 불과하니 이 글을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못할거다. 어쩌면 나는 네가 이 글을 십년후에 읽길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 때는 내가 환갑일테니 지금보다 기억력도 쇠퇴해있을거다. 무엇보다 지금 내가 느끼는 생각과 감정들을 10년후의 내가 기억으로나마 재생산해내기 불가능할지 모른다. 사실, 이 글도 살짝 술이 들어간 채로 쓰고 있으니 재생산과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10년 전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나. 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미국과 유럽 일부에 심각한 타격을 주긴 했지만 우린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90년대 이전의 경제성장 재현이라는 밑도끝도 없는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기업친화적 정책과 자원외교, 4대강사업을 추진하였다. 난 대통령이란 최소한 국가 기반의 인프라, 중상위층 이상과 이하에 대한 정책이 명확해야 된다고 생각한단다. 이명박 정부의 ‘공’이 그린뉴딜과 에너지강국이라는 인프라 측면에서 비교적 정확히 맥을 짚은 거라면, ‘과’는 중상위층 이하 노동자와 빈민계층에 대한 몰이해라고 본다. 뒤를 이은 박근혜 정부가 아무 비전이 없었던 걸 생각하면 그나마 나았던 걸까. 문재인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수도권 부동산 규제, 최저임금 인상으로 명확히 방향성을 세웠다. 그렇지만 이명박, 문재인 정부 모두 실행(execution) 면에서 빵점이었다는게 내 생각이다. 왜 경제정책의 방향성이 나쁘지 않아도 5년간 실행하는 단계에서 엉망이 되어버리는걸까. 아무리 경제에 관심이 많더라도 경영 전공인 나에겐 수수께끼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 했던게 아닌데 갑자기 옆으로 샜다.
만약에 당시 나에게 10년 후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잘 버티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믿었을거다. 하지만 우리나라 축구선수가 유럽에서 득점왕이 되거나, 우리나라 가수가 음악성은 비틀스에 못 미치나 그에 못지않은 인기를 세계적으로 누리거나, 전세계가 시청하는 드라마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져 국내 배우가 헐리웃 스타 못지않은 인지도를 자랑하게 된다고 들었다면 내가 얼마나 비웃었을까.
90년대 초로 기억한다. 신승훈이라는 가수가 발라드로 가요계를 평정하던 때였다. 그의 인터뷰를 어딘가에서 들었던 기억이 있다. 다른 가수와 헷갈린 걸수도 있다. 인터뷰에서 국내 #1이 되었는데 꿈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빌보드 차트(1위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높은 수준을 말하지 않았었나)에 올라가는 것이라고 대답하더라. 90년대 초라면 우린 아직 잘 살단고 말하기 어려운 때였다. 음악이나 예능, 심지어 만화까지도 읿본에서 무분별하게 베끼곤 했다. 그런데 국내 가수가 빌보드차트에 올라간다고? 말하는 그도 실현가능성을 높게 본다는 느낌이 없었고, 듣는 사람도 그냥 지나가는 말이려니 했다.
그렇게 30년이 지난 거다. 단순히 빌보드차트에 올라가는 것보다 더한 일들이,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실현가능성이 높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났다. 문화 면에서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다니.
정치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하기에는 아직 네가 너무 어리다.
실은 어제 M아저씨와 술을 마시면서 같은 이야기를 했다. M아저씨는 경제학 교수이지만 투자에 관심이 많지. 경영학과 학부에 불과하지만 경제에 관심이 많은 나와 반대로. 돈 문제만 아니었더라도 난 경제학과나 수학과에 가서 경제학설사나 수학사를 공부하였을거다.
이야기의 주제는 왜 경영학/경제학에는 문화 면에서 일어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였다. 재무와 경제학도 수입학문이거든. 음악이나 드라마가 수입문화이고 축구도 수입된 운동인데, 왜 우리나라 학자 중에 아직 노벨경제학상이 없냐 말이다. M의 주장은 미국에 활동 중이거나 국내에도 좋은 학자들이 많지만 그들이 이제 시작이라는 거다. 박찬호나 박세리라고 들어봤니. 자신들이 속한 분야에서는 전설로 존경받을만한 존재이지만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쌓기엔 다소 부족했다는 거다. 재무와 경제학자도 세계적인 수준은 있지만 이와 비슷하다는 거다. 앞으로 나온다면 지금 세대나 다음 세대, 그러니까 네 세대에서 나올 거라는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건 망상일까. 십년후에, 당장은 아니더라도 노벨경제학상이 보장될만한 성과를 내는 젊은 한국인이 나올까. 물리학상이나 화학상 같은 기초과학이 더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나오면 좋겠다. 십년후에 네가 대학생이 될 때에는 수입학문들이 국내에서 더 나은, 쓸모있는 형태로 바뀌어 수출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가 배우는 이론과 실무가 다른 나라 어디에서도 배우기 힘든 양질의 교육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네가 취직하거나 네 친구들이 창업하는 기업이 무얼 하는지 전세계 다른 기업들이 모방하려 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날이 올까.
네 세대가 직면하는 십년후가 지금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네 세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단다. 지금 망상으로 느껴지는 이 막연한 바람들이 십년후에도 헛된 꿈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말이다. 30년 후에는 말이다. 지금과 그 과정 속에 느꼈던 불안감과 무기력함이 헛된 망상이었고, 막연한 희망이 실은 진정한 꿈이었다고 깨닫게 되길 말이다.
그래서 나는 네 세대를 위해 오늘도 기도한다.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사람은 결국 혼자 크는 거니까.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라고 해둡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