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 제주도 49박 50일 여행기(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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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 제왕절개 수술이 결정되고 아내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까지는 한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토요일 저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병원측에서는 정말 서둘렀던 것이다. 아내가 수술실에 들어가자 나는 양가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상황을 설명했다. 약간 껄끄러웠던 것은 아내가 장인어른께는 여행사실을 말씀드리지 않고 왔다는 점이었지만, 지금 그게 문제인가. 그래서 제일 먼저 전화를 드렸다.
“다른데 가지 말고 거기있게. 내가 당장 갈테니까 내가 갈 때 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그런데 여기가 좀 멉니다...”
“어딘데?”
“제주도에 제주대학교 병원입니다.”
“……… 멀리도 갔네.”
나름 지금 상황을 설명을 드리고, 아이와 산모가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고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분명 많이 걱정 하셨을 것이다. 양가 가족들에게 한번 씩 전화해서 상황을 전하고 나니 한시간 가까이 흘렀다. 그리고 나서는 수술중 이라는 메세지만 하염없이 보고있은지 얼마가 지났는지, 관계자가 와서 아내가 회복실로 옮겼다고 전한다. 전신마취에서 잠시후 깨어날 거라고 했다. 몸도 마음도 추스려서 아내에게 다가갔다. 힘겹게 눈꺼풀을 올리고 나를 보더니 하염없이 보고싶었다는 말만 계속하더라…
아이는 봤는지, 건강한지 이걸 제일먼저 물어볼 거라 생각하고 부모님들께 전화하느라 지나가는 걸 못 본것 같다고 미안하다는 대답을 준비했던 나는, 비몽사몽에도 만나자마자 보고싶었다는 말을 몇번이고 계속하는 아내 덕분에 손을 꼭 잡고 복잡한 감정을 삭이고 고마운 마음만 남길 수 있었다.
수술을 집도하신 교수님께서는 응급수술이다보니 출혈이 좀 많았다고 했다. 그것 외에는 괜찮다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나니 소아과에서 아이를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29주도 채 못채우고 태어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산소 호흡기도 아니고 기도에 삽관으로 산소를 받고 있더라. 그리고 황달치료라고 무슨 빛을 쬐고 있는데 너무 안타까워 5초를 못 보고 있었다. 1.32KG이라고 했다. 담당 선생님 말씀으로는 아이가 많이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주수에 비해서는 괜찮은거라는 말로 설명을 시작한다. 이른둥이들은 만삭아에 비해 많은 것이 힘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채 발달하지 못한 호흡기로 인한 호흡곤란, 역시 아직 발달하지 못한 망막의 발달여부, 그리고 정말 치명적일 수 있는 괴사성 장염등을 앞으로 지켜봐야 한단다. 인큐베이터에서 보통 6주에서 8주는 있을 거라고 했다.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빨라도 6주에 나오기는 어려울거라고 한다. 마음속으로 아이에게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아빠가 사고를 피하지 못해서 너무 큰 고생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아빠는 엄마 뒷바라지 열심히 하고 올테니 조금만 더 버티고 커달라고 부탁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보험회사에 전화를 했는데 지금 주말이라 담당자가 월요일에 출근을 하니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처리가 될 거라는 말만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주말사고는 외주업체에 맡겨서 처리하기 때문에 이런 인수인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외주업체다 보니 책임감이 덜한거다. 상대 차량이 보험이 안되는 상황이면 골치아파 질텐데… 보험은 가입이 되어있다고 들었다고 빨리 끊으려 한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다. 상대 보험사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구급차가 오고 나서 다 버려두고 왔기 때문에 상황파악이 안된다. 게다가 아내는 산부인과 진료가 끝날 때 까지 다른 진료를 못받게 규정이 되어있단다. 그렇게 나와 아내는 임산부가 교통사고가 나면 어떤 불편을 겪게 되는지 몸소 겪게 되었다. 걱정은 걱정으로 접어두고, 불편은 불편으로 감수하고 이제 정신을 차린 아내 옆 보호자소파에 누워 도란도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걱정했던 큰 일은 생기지 않아 다행이다. 둘 다 무사히 걸을 수 있어 다행이다. 섣불리 비행기타고 올라가지 않아 다행이다. 교수님이 잘 봐주셔서 다행이다. 마침 사고난 곳 근처에 대학병원이 있어 다행이다. 이야기할 수록 참 많은 일들이 다행이었다. 그리고 마음이 가라앉으니 이제 온몸이 쑤신다. 그렇게 둘 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오셨다. 그렇다. 7월말 8월초 극성수기, 게다가 일요일이라는 상황에서 그와중에 새벽비행기를 어떻게 어떻게 구하셔서 한밤중에 광주까지 가셔서, 한참 기다렸다 새벽같이 날아서 다음날 아침에 오신거다. 생각보다 상황이 나쁘지 않은 것을 눈으로 확인하시니 맥이 탁 풀리는게 옆에서도 느껴지더라. 배와 어깨에 벨트맸던 곳에 시꺼먼 피멍이 들어있었다. 아내를 장모님께 맡기고 응급실로 가서 xray를 찍었는데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들보다 우월한 똥배가 고마웠다. 자 나는 이제 시간이 약인 것 같다. 맘껏 아내와 아이를 간병할 수 있게 되었다. 저녁에는 어머니가 오셨다. 아버지는 미처 표를 못구해 내일 오신단다. 이제 갓 태어난 꼬맹이가 양가 부모님 제주도 여행 시켜드리는 모양새가 웃프다. 그렇게 행복이(태명)는 양가 부모님을 한자리에 모아 결혼후 미뤄뒀던 술자리를 강제로 만들어냈다.
보통 제왕절개를 하고 스스로 걷게 되는데 2~3일 걸린다고 한다. 아내는 회복이 빠른건지 의지가 강한건지 24시간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아이가 보고싶다며 낑낑 걸어서 아이를 보고 왔다. 안쓰러웠지만 많이 움직이면 회복이 빠르다니까 좋은 것일게다. 수술 3일째 되는 날 부터 젖이돌기 시작했다. 내심 안나오면 어떡하나 신경쓰이던 와중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아내도 인큐베이터에 들어있는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며 기꺼워한다. 유축기를 사서, 병원 아래 편의점에서 대야를 사서, 병실 옆에 있는 정수기물로 열탕소독을 해서 힘겹게 힘겹게 처음 짜모은, 겨우 30ml정도 되는 노오란 초유를 아내와 함께 신생아집중치료실에 반쯤 웃으며 흥분한채 가져가서 잘 써 달라며 간호사분께 전달했던 일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남은 약 45일의 제주도 생활이 젖과의 전쟁이 될 줄 내가 그 당시에 어떻게 알았겠는가?
다행히 상대 보험사와 연락이 닿았다. (장인어른이 여기저기 전화하더니 알아내시더라.) 주말 지나고 월요일이 되어 오후가 넘었는데 왜 지급보증이 하나도 안되어있느냐며, 어떻게 피해자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야 되느냐며 전화로 역정을 내신다. 무보험이 아님에 일단 안도했다. 상대 보험사 직원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월요일에 출근해보니 외주업체에서 일을 대충 처리해서 상황이 엉망이었으니. 그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보험회사 직원과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화를 참기 힘들었다. 이 사람이 사고를 낸 것도 아니고 일처리를 한 것도 아닌데 화가 나면서도 안됐기도 했고… 그래서 말로 하기 싫으니 접촉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다고, 서로 서면으로만 전하자고 했다. 뭐 결국 내 의사처럼 되진 않았지만 우선 진정은 되었다.
경찰에서도 연락이 오더라. 잊고있었는데 차에 나도 몰랐던 블랙박스가 있어서 메모리를 가져갔다고 한다. 가해자 쪽에서는 중앙선 침범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단다. 사고가 나면 기억이 왜곡되거나 상실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왠지 기분이 나쁘다. 내가 기억하는 사고 상황과 아내가 기억하는 사고 상황은 거의 동일했다. 왜 저차가 이리오나 생각하던 찰나에 부딪혔던 것이다. 경찰서에 사고 조사차 방문하는데 별 걱정이 다 들었다. 내 기억이 왜곡된 거라면 어쩌나, 블랙박스 메모리가 잘 작동하지 않았으면 어쩌나 등등. 그래도 주변에 목격자가 하도 많아 괜찮을거라고 위안하며 경찰서로 갔다.조사관님이 메모리를 개봉해서 장인어른과 내가 같이 봤는데, 내 기억속의 상황 그대로였다. 다만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부터 부딪힌 순간까지 난 참 많은 생각을 했는데 블랙박스 상으로는 상대 차가 이상하다 부터 꽝 할때 까지 1초남짓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이건 뭐 의심과 논란의 여지가 없는 중앙선침범 사고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블랙박스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상대가 기억안난다고 우겼으면 자칫 복잡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내 차에는 아직 블랙박스가 없다. 작년에 아내와 한창 연애할 때 늦은 밤에 운전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 때를 생각하니 약간 닭살이 돋았다. 집에가면 개똥이(차이름)에게 블랙박스를 꼭 선물해야 겠다.
세시간에 한 번씩 유축기로 젖을 짜고, 젖병 세척 소독 건조, 틈틈히 경찰서 다니고, 보험회사 직원과 만나고 병원 일보고 나도 치료받고, 하루에 두 번 아이를 면회가면서 직장에 연락해 사정을 설명하고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출생신고를 하고 이렇게 저렇게 정신없이 일주일을 보내고나니 아내의 퇴원예정일이 되었다. 그 날은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돌아가는 비행기를 예약한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아내의 재수술이 결정되었다. 절개및 봉합 부위에 염증 소견이 있어 퇴원을 못하게 되었다. 아내는 그날 사고후 처음으로 하루종일 서럽게 울었다. 병원에서 나가면 당장 갈 곳이 있는것도 아니지만 병원에 있기가 너무 힘들고 싫다고 했다. 어차피 아이보러 매일 병원에 와야 하지만, 그래도 병원에 있기가 힘들단다. 부모님들 께서는 그래도 잘 된 일일수도 있다고 위로하시는데 재수술 하고 입원하는게 어떻게 잘된일이냐며 정말 서럽게 울었다. 그날은 사고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복이 엄마라는 짐을 내려놓고 순수하게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딸이었고 내 아내였던 것 같다.
그렇게 폭풍처럼 일주일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