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의 다른 기지들 그리고 안나.
*본인은 평균 이하의 외모를 소유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편이며,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은 아주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편이 다루는 내용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여성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나올 것 같은데, 양해 부탁 드립니다.
내용을 시작하기에 앞서 약간의 사전지식이 필요할 것 같아서 세종기지가 위치해 있는 킹조지 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사진출처 : 네이버 지식인님)
지도에서 왼쪽 아래 구석에 기지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는 것이 보입니다. 칠레의 프레이 기지가 가장 큰 기지이며 공군 기지이기 때문에 작은 활주로 까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주변으로 우루과이, 러시아, 중국 기지가 몰려 있구요. 세종기지는 꽤나 멀리 떨어져서 있습니다.
지리적인 입지 때문에 세종기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큰 기지들은 서로 왕래가 잦은 편이며, 간간이 함께하는 행사도 열립니다. (장기자랑, 간이올림픽 등) 세종기지의 경우 배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행사 공문이 날아와도 날씨에 따라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육로로 이동하기에는 크레바스의 존재 때문에 상당히 위험합니다. 능선을 따라 이동하면 비교적 안전하기는 하지만, 날씨등의 이유로 정확한 경로를 잡는 것이 어렵습니다. 2005년에 육로로 이동하던 아르헨티나의 설상차가 크레바스에 빠져 2명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지요.)
주 이동수단인 바지선 거북이와 조디악 보트입니다. 남극의 바다는 수온이 너무 낮아서 수영을 잘하건 못하건 빠지면 사망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2003년에 생물 연구 대원이었던 한 분이 바다에 빠져 사망한 사고도 있었습니다.) 안전수칙을 지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배에 탈 때 입는 옷입니다. 바다에 빠지더라도 물 한방울 들어오지 않고 탁월한 보온 효과를 갖고 있으며, 옷 입은 사람을 찐따같이 보이게 만들어 줍니다. 가격이 500만원 가량 정도 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요런 장비를 갖추면…
요런 플레이와,
요런 플레이도 가능해 집니다.
본편 시작합니다.
1.
19차 월동대 의사에게 인계를 받으면서 업무 외의 인계내용이 3가지 있었다.
-술꼬장 부리지 말 것. 특히 술먹고 전 여자친구에게 전화하지 말 것. 한국으로 전화 가능한 인터넷 전화기(당시에 인터넷 전화 업체에서 지원을 해주어서 무료로 통화가 가능했습니다)가 당직실에 비치되어 있는데, 항상 당직자가 있기 때문에 다음날 모두 너의 뻘소리를 알게된다. (죄송합니다 선임님. 저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다른 기지를 방문하게 되면 선물은 가능하면 술로 받아올 것. 새로 보급물품 오기 전에 술은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있다. 미리미리 준비해 놓도록! (세상에, 저는 17명이서 소주 5000병을 7개월도 지나기 전에 먹어치울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월동이 끝나기 전에 러시아 기지의 안나를 반드시 만날 것. 안나는 본국으로 돌아갈 날이 6개월정도 남았는데, 그 전에 반드시 만나라. 내 안부도 꼭 전해주고. (아련한 눈빛.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이 때 안나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2.
안나는 러시아 기지의 통신대원이었다.
대장님을 제외한 16명의 대원들은 순번표를 만들어서 당직을 섰다. 당직때의 즐거움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술취한 대원이 전 여자친구에게 전화하는 것을 옆에서 미소지으며 바라보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바로 안나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저녁 9시가 되면 각 기지에서 ‘우리는 무사하다’ ‘너희는 잘 지내냐?’ ‘내일 이러저러한 행사가 있는데 어쩌구 저쩌구…’ 등등의 말을 나누는 무전타임이 시작되었다.
당직자가 무전을 하는 기지도 있었고, 통신대원이 무전을 하는 기지도 있었는데, 러시아 기지는 후자였다.
무전기 가지고 놀아본 분은 아시겠지만, 이 무전이라는 것이 음질이 상당히 좋지 않다.
하지만, 안나의 목소리에는 그 번잡한 소음사이를 뚫고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상당히 어설픈 영어였지만(밤 9시에 굿모닝은 예사였다.) 문법, 억양, 발음을 모두 떠나 목소리 자체를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도 모르게 안나의 얼굴을 상상하고 있었으며 가끔은 꿈에 나오기도 했다.
3
한국을 떠난지 2달 정도 지났을 때다.
변화된 환경에 조금씩 적응이 되었고, 하계 대원들도 모두 떠났다.
17명만 남아 본격적인 월동 준비를 시작했고 조금씩 밤이 외로워 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회의때였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평소와 같이 덩치 큰 최모 대원 뒤에서 대장님의 시선을 피해 신나게 졸고 있었다.
"...궁시렁...이러저러해서..............그래서 심닥은 꼭 가도록."
"...대장님. 죄송한데, 어디를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뭐 들었니. 뭐 좀 상의하느라 러시아 기지에 갈 일이 있는데 거기 의사가 할말 있다고 너는 꼭 왔으면 하더라.”
오.
땡큐 베리 정말 감사합니다. 러시아 의사님.
4.
러시아 기지 – 벨링스 하우젠
옛날에는 잘나갔지 소비에트 연방. 대제국의 흥망성쇠를 러시아 기지에서 절실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옛날 미국과 힘겨루기를 하던 시절 새운 러시아 기지는 1990년 이후로 지원이 거의 끊기고 녹 슬어가는 컨테이너에 빵꾸 뚫린 곳이나 보수하는, 처절한 환경이었다.
지랄같은 날씨에 거북이까지 띄우고 기지를 방문하니(거북이는 세종기지의 바지선 이름인데, 이름하나는 정말 잘 지었다. 속도가 완전 거북이다.) 러시아 대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대장님들끼리 뭔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러시아 의사를 만나러 갔다.
러시아 기지 의사 마이클(러시아 사람이 마이클이란 이름을 써서 정말 실망했다. 러시아 사람이면 적어도 세르게이, 뭐시기뭐시기 스키 정도는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은 영어를 심하게 못했다. 나도 심하게 영어를 못했기 때문에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영어로 단어만 몇 개 말하고 서로 자국어를 말하는데 묘하게 뜻은 통하는 것 같은, 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대원들과 러시아 기지 식당에 앉아 차가운 몸을 녹이고 있었는데, 몇몇 대원이 약간 초조한 표정이다. 그 표정이 궁금하여 이유를 물어봤더니,
"응, 러시아 기지에 울트라 캡숑 미녀가 한 명 있는데… 안나라고… 이상하게 오늘 안보이네…"
나도 표정이 초조해 지기 시작한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안나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마이클에게 안나 어디있냐고 물어봤더니, 어제 당직근무여서 취침중이라고 했다.
그래…… 이렇게 쉽게 볼 수 있으면 남극여신이 아니겠지.
돌아오는 길의 바닷바람이 무척차가웠고, 나는 그날 밤에도 안나꿈을 꾸었다.
5.
발렌타인 데이였다.
2일전에 술먹고 전 여자친구에 처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변명하자면 그리 안좋게 해어지지는 않았었고, 한국에서는 전화 한 번 한적이 없었는데, 외로웠나 보다.
‘전화 잘 안들리지? 위성 인터넷 전화라 딜레이가 좀 있을꺼야. 나 남극 세종기지에 월동대로 왔어. 잘 지내니?’
‘어. 나 가을에 결혼해’
‘와우. 축하해. 잘 살았으면 좋겠다’
‘어. 근데 앞으로는 전화 안했으면 좋겠어. 뚜-뚜-‘
소식을 들은 주방장 형이 내가 좋아하는 김말이를 만들어 주었다. 김말이를 식초 간장에 찍어 먹는데 이게 식초가 너무 시큼해서 눈물이…
완전 염세적인 발렌타인 데이를 보내고 있던 내게 대장님이 찾아왔다.
"어이 심닥, 나랑 같이 러시아 기지나 가지"
러시아 기지에 파견근무 나가 계시는 총무님이 그라인더 작업중 쇠붙이가 눈에 튀어서 눈물이 계속 난다고 한다. 눈을 다치면 별수 없이 칠레로 나가야 하고 무지막지한 서류작업과 대원들의 사기저하, 무엇보다 총무님의 눈이 괜찮은지 걱정이 되어 서둘러 기지를 나섰다.
칼바람 맞으며 마리안 소만을 건너면서 새삼스레 오늘이 발렌타인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발렌타인데이는 원래 사랑을 이루어 주려다가 순교하신 성발렌타인경을 추모하는, 뜻깊은 날이야. 닥치고 기도나 드리자. 러브 앤 피스! 포에버!
천만 다행하게도 총무님 눈에 그리 큰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통증은 많이 가셨고 시력에도 문제가 없었으며, 육안상 관찰되는 이물질도 없었다. 각막에도 큰 상처는 없어 보였다. 편안한 마음으로 러시아 기지 로비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묘한 아우라가 느껴지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175cm은 될 법할 훤칠한 키의 뒷모습.
윤기 넘치는 검은색 긴 생머리 사이로 살짝 살짝 드러나는 곱고 아름다운 흰 목.
펑퍼짐한 동계용 작업복도 그녀의 아름다운 곡선을 감출수는 없었다.
짙은 회색 구름이 꾸물거리던 나의 가슴이, 부숴지기 직전이었던 나의 멘탈이, 핑크빛 저녁노을로 물들기 시작한다.
"헤이 안나" 귀청을 울리는 대장님의 청아한 목소리. 마음의 준비.
아름다운 뒷태의 그녀가 뒤를 돌아...돌아...본....다??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케빈 스페이시를 취조하던 형사가 모든걸 알아차렸을때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식스센스에서 반지를 떨어뜨릴때 모든것을 깨닳은 브루스 윌리스의 충격이 이정도였을까.
19차 20차 대원들에게 남극최고의 미녀라는 소문이 돌고있던, 우리의 안나는… 나의 모자란 표현력으로는 그녀를 묘사할 방법이 없다.
다만 떠오르는 이미지는 설악산 등산도중 백운사에 들려서 얻어 먹었던 고구마 한줄기. (고구마를 모욕하려는 의미는 추호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 난 한강고수부지 수영장 밑에 마징가 제트가 있다는 막내삼촌의 이야기를 믿었다. 초등학교 3학년때 뭐든지 다 알고 계실 것 같은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그딴건 없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울먹이며 따지던 내게 막내삼촌의 충고.
"니가 눈으로 직접 본거 아니면 믿지마라"
그 말을 명심하면서 살았어야 하는데.
기지로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떠날 때 보다 더욱 어둡게 변하고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대원들께 총무님의 안부를 전하고,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한 대원이 묻는다.
"어이 심닥, 혹시 안나 봤어?"
고민 3초.
"우와, 듣던대로 정말 환상적인 아가쒸였어요.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리네 진짜"
슬픈 발렌타인데이.
망치는 것은 나로 족하다는 착한 마음씨였을까, 아니면 ‘당신들도 한번 충격을 맞봐야 해’ 라는 사악한 심보였을까.
저 뒤쪽에서 한 대원이 씁쓸하게 웃는다.
아마 그도 진실을 알고 있나 보다. 나도 따라 웃는다. 내 손에 쥐어진 초코하임도 웃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