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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9/20 18:48:21
Name 임전즉퇴
Subject [일반] 5.18 택배 대법판결을 보며 근본적인 표현의 자유를 생각해봅니다.
일단 이 판결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판결입니다. 피고가 공무원이면 모를까 정치적이랄 수도 없고.
보도기사에 따르면 1, 2심에서 이미 일관되게 '모욕은 맞고 명예훼손은 아니다'고 했고, 대법원에서는 이것이 법률상 문제가 없다고 확인했을 뿐이니까요. 이 정도면 한국 법조계에서 이런 건은 이렇게 처리하기로 법리의 합의가 이루어진 셈입니다.
더하여 명예훼손은, 마치 간통처럼, 근본적으로 사인 간의 다툼이므로 형벌로 처리하는 건 국가주의적이라는 해석이 있다고 들어 와서요. 개인적으로는 그게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구요. 확실히 권력이 있는 쪽에서 악용하기 좋은 죄목입니다. 물론, 역시 간통처럼, 약한 쪽으로도 칼자루가 돌아가는 칼이기는 해서, 지금 이렇게도 쓰이고.

거슬린 것은 법이 아니라, 피고 측에서 아주 당연하게도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다는 언급입니다.
법알못일 때에는 의외였지만, 찾아보면, 우리 헌법의 여럿 '00의 자유' 가운데 '표현의 자유'는 없습니다. 가장 직접적으로 가까워 보이는 것이 제21조 언론/출판의 자유죠. 그리고 헌법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이 조항의 의도는 전통적인 행정권력의 사전검열 및 사후의 유통 방해, 보복적 처벌을 막는 것이죠. 이에 우리 헌법에서는 검열/허가의 금지를 2항에서 명시하고, 4항에서는 이 자유가 있다고 해서 타인의 명예와 권리를 침해하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침해하지 말라는 것으로 '공중도덕'과 '사회윤리'도 있습니다. 행정권은 늘 이걸 확대해석하고 싶어하니, 그걸 막으라고 사법권이 분립되었지요.)
그럼 표현의 자유는 잘못된 명목인가? 물론 아닙니다. 제37조에서는 명문상 지목하지 않은 자유와 권리도 보장된다고 선언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상식선에서 늘, 판례상 용어로는 '일반행동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표현행위는 따로 다루긴 합니다만, 일반행동의 예외가 아니죠. 시쳇말로 사람이 입(손가락)이 있으면 놀리는 게 자연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굳이 입법례를 찾자면 (법은 아니지만)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9조에 명문이 있구요.

제가 떠올리는 문제는 이겁니다. 그런 평범한 자유가 종종 이리도 거창하게 써먹히는가? "폐를 끼쳤다면 유감이지만 그때 나로선 하고 싶어서" 정도로 풀어 쓸 수 있는 일인데 "그것은 정당한 권리"라고 하는 게 왜 이리 희한한 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가? 그것을 받아 "그래, 표현의 자유 맞지."라고 하는, 적어도 돈 받고 변론하는 사람은 아닌 듯한 어느 제3자들의 쿨함은, 헌법정신에 근거를 둔 신념이라도 되는가?
제가 새겨본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와 그들이 의도적으로 그러는진 모르지만, 정당화될 구석은 없지도 않다는 것.
표현의 자유는 제26조 청원권, 제22조 학문/예술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과도 현실적인 연관성을 갖지만, 인간 본능을 생각해볼 때 궁극적으로 제19조 양심의 자유로 연결됩니다. 양심의 자유라고 하니 고고한 덕성만 보호하는 것 같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사상/신념의 자유이며, 내심만 아니라 그 실천도 (기본적으로는) 보호하는 것이죠(생각이야 원래 간섭할 수 없고). 표현도 특정한 효과가 있는 실천이구요. 굳이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면 죽냐 숨겨라, 속여라 하는 것은 꼰대질이죠. '한 마디 꼭 해주고 싶어서 죽겠다'는 느낌이 때로 얼마나 절실한지는 거의 다 공감할 겁니다. (그렇게 키워가 되어가죠.)
물론 위 피고는 그냥 유머로 했을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유머의 욕망도 대단하죠. 부장님 개그가 나오는 이유가, 그래도 아랫사람들이 자기 보고 하하호호 하는 걸 느끼고 싶은 나름의 노오력 아니겠습니까. 인기인이 되어야 한다는 게 필생의 신념인 경우도 있구요. 그래서, '남의 인격권 v. 내 표현의 자유'라는 구도는, 실제로는 '남의 인격 v. 내 인격'일 수도 있게 되어버립니다. 표현의 자유 운운하는 변론을 '기분나쁘니까 그냥 이쪽이 닥쳐달라는 거냐'라는 불평으로 바꿔서 상상해보면 웬걸, 저도 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싸고 싶으면 싸야죠. 판사님 이건 제 괄약근의 잘못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아는 정답은 뒤집히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보혈이 번제를 폐했는지는 몰라도, 헌법이 도덕률을 폐하진 않았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는 확고한 법언도 있거니와, 굳이 말하자면 헌법에서 존엄하게 보호한다는 인격의 개념에는 '사회인'이라는 전제가 내재한다고 봐야 합니다. 사회에 빚진 게 없다는 태도까진 몰라도 자꾸 사회를 흔드는 인격을 사회가 보호하겠습니까?(아마도 이게 사형이 유지되는 이유죠.) 인간적으로, 그쪽 애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들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좀 돌아보길 바랍니다.

아울러 사족으로 두 가지 생각을 덧붙여봅니다. (또다른 논제일 수 있지만)
첫째, 법과 도덕의 관계는 복잡하다는 것. '법은 도덕의 최저선'이라지만 이 말과 관련된 것은 형법+질서법의 규제 범위죠. 전체적인 법은 그 배경에서부터 정의만큼이나 합목적성(유용성), 법적 안정성(실효성)을 따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법은 법대로 검토해야 할 뿐이고, 도덕은 도덕대로 검토해야 할 뿐입니다. 두 가지가 얽힌 문제에 그저 딱 안 틀릴 정도의 법만 말하면서 도덕, 특히 미덕(美德)의 문제는 넘어간다면 그 반대의 경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감성과 지성의 관계도 또 다른 의미에서 복잡하니까요.
둘째, 의견의 다양성이 최종적인 선은 아니라는 것.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는 해야 하고 의견을 골라서 통일하려는 생각은 위험하지만, 못나서 도태될 의견인데 '논쟁은 건강에 좋다' 식으로 애써 생존영역을 마련해줄 필요가 없죠. 정-반-합에서 합은 새로운 정이므로, 정설을 확립한 것은 사상의 독재가 아닙니다. 백보 양보해서 교육용 유적 보존의 의미로 다양성을 위한 다양성을 유지한다 한들, 꼭 중심가 광장을 차지하고 사람들이 제 볼 일 보는데 무조건 같이 구경하고 비교감상문 제출하라 한다면, 그게 독재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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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20 20:20
수정 아이콘
결국 지금의 우리는 "어디까지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법이 법에 의해 "현재의 정답"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만고불변의 정답은 아니듯이(물론 대개는 그러하고 그만한 법리를 담보하지만), 이것은 법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회 모든 영역에서 고려하고 판단되어야할 부분에 법은 정의의 원칙이라는 미명 아래 부득불 감당해보겠노라고 아등바등하고 있습니다만 헌법, 나아가 자연법적 개념에 준하는 자유에서 전가의 보도마냥 휘둘러지는 "여타의 자유"는 사실에 따라 법원(法原)에서 거론되기 마뜩찮은 경우더라도 여전히 유효한 수단이자 목적으로써 용인될 수 있어야하며 이것이 말씀하신 "사회를 흔드는 행위"인 것과는 별개로 "정당화될 구석"이 아니라 두말하지 않아도 "충분한 근거"로써 당연시될 수 있는 수준(기각과 관계없이)까지 인식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직은 그 과정에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회복적 정의는 또 다른 개념이지만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바탕을 공유하고 있으며, 다소 극단적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미완이라는 이유로 자연인을 기본권리로부터 배척할 수 없듯이─의무는 결과로써 늘 고려되고 있으므로─ 법으로써 또한 사회로써 기다려줄 수 있는 시민의 인격도야 역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언제까지 기다려야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우리 시대에 목도하려거든 또 하나의 예수가 필요할지도요.
영원한초보
15/09/20 22:14
수정 아이콘
일단 판결 내용과 표현의 자유는 크게 논란되는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표현의 자유 문제는 홍어택배건 보다는 샤를리 엡도 보도가 그 경계선에 걸쳐 있는 것 같습니다.
홍어택배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그냥 특정인에게 쌍욕할 권리를 달라는 말이고
이건 그냥 폭력권을 달라는 것과 같으니까요.
무언가를 모욕할 자유가 있으냐 원칙적으로 이야기하면 언어 또한 폭력으로 쓰이면 폭력은 금지되어 있으니까 막아야 할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욕설을 배설하는 자유를 원천적으로 뺏어 갈 수 있냐하면 이 또한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endogeneity
15/09/20 22:29
수정 아이콘
법원이 모욕행위에 대해 정당행위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모욕 부분만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집유가 나온 것은
법원도 글쓴이처럼 이 사건 피고인의 행위가 표현의 자유를 꽤 심하게 일탈한 행위라고 평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5/09/20 23:14
수정 아이콘
자유라는 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얘기에 적용되는게 아닙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배척하고 싶을 때 자유라는 가치의 우월성을 인정하는데 자유의 의의가 있는 것인데요. 다른 사유로 이를 배척할거면 자유는 사실상 쓸데가 한군데도 없을걸요?
임전즉퇴
15/09/20 23:56
수정 아이콘
밤이 늦어서 그런진 몰라도, 어조는 비판적인 느낌을 주는데, 그냥 저는 동의가 되네요.
자유를 다른 가치 아래 귀속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가상적으로, A가 B를 모욕할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B도 A를 모욕할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상황이라면, 저는 그 자유로움을 무너뜨리고는 싶습니다. 어쩌면 이게 문제가 될 수는 있겠죠.
endogeneity
15/09/21 00:42
수정 아이콘
본문의 핵심 논지는 대략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적어도 돈 받고 변론하는 사람은 아닌 듯한 어느 제3자들의 쿨함은
표현의 자유가 내심만 아니라 그 실천도 보호하는 것인 점에 비추어 정당화될 구석은 없지도 않다.
2) 헌법이 도덕률을 폐하는 것은 아니고 헌법상 인격의 개념에는 '사회인'이라는 전제가 내재한다.
한마디로 '도덕률'과 '인격권의 사회적 한계'에 의하여 인격권의 한 내용인 표현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

캇카님 댓글은 '자유의 우월성'의 진정한 의의를 지적하는 데 그 골자가 있는데
본문의 1) 부분과 달리, 본문의 2) 부분은 일견 자유의 우월성을 일관하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자유의 우월성이란 것은 자유가 도덕률, 사회통념, 인간으로서의 완성, 신과의 합일 같이
자유주의가 소위 '가치관'이라고 일축하는 것들에 대한 자유의 우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의 우월성 테제는 자유 대 자유의 문제에 관해선 사실 별다른 것을 말해주진 못했습니다.
자유주의 전통 내에서 그 문제는 자유의 제한 문제로 논의되어왔습니다.
자유의 우월성 테제가 자유주의 전통의 공통분모라면, 자유의 제한은 자유주의 내부의 다양성이 나타나는 지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혹은 자유주의가 모호해지는, 흐려지는 지점인지도 모릅니다.)
전자가 자유주의 윤리학의 영토라면, 후자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영토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의 제한에 대한 자유주의 전통 내부의 논의는 많은 경우
종교, 도덕, 관습 등이 자유주의의 옷을 입고 자유주의 사회로 복귀하도록 하는 백도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도 그런 예라고 볼 순 있지만 사실 본문의 글쓴이만 탓할 건 아닙니다.
사실 자유주의는 기독교 복음주의와, 군국주의와, 복지국가적 사회주의와,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별 무리없이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 괴이한 발상들이 자유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꼴까지 참아주진 못하겠지만
자유의 제한이라는 세탁기를 한번 거치고 나면 그 알맹이를 삼키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물론 그런 사례들은 사상이나 이론이 현실에서 순수하게 관철되지 못한 예일 뿐이라고 말할 여지도 없진 않겠지만
사실은 자유주의 사상 자체가 그러한 '침윤'을 허락하고 있다고도 보입니다.
15/09/21 01:07
수정 아이콘
뭐 그렇죠.

실제로는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자유의 제한이라는 것이 필연적인데
문제는 이 필연성을 구실로 삼아, 사실은 나의 가치관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을 제한하려는 나의 욕구가 필연적인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기에 한번씩 생각해보시라 댓글을 달았습니다.

댓글 잘 읽었습니다.
비토히데요시
15/09/21 08:06
수정 아이콘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기억해두어야 겠네요.
차사마
15/09/21 12:59
수정 아이콘
모욕이나 인간의 존엄성이란 말은 자칫 표현의 자유에 어려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이상하게 선진국에서는 저 두 가지를 이유를 실정법에 적용하지 않는데, 첫번째로 모욕은 단순히 심한 욕을 먹었을 때 느끼는 게 아니라, 자존심을 구기게 하거나, 수치스러움을 느낄 때도 가능합니다. 즉 표현에 있어서 개개인의 편차가 너무 심하다는 거죠. 그래서 사실상 실정법으로 처벌하기 힘든 겁니다. 협박이나 테러 예고, 타인의 권익 침해를 목적으로 한 명예훼손 말고는 모욕이나 자존감 붕괴를 근거로 처벌하는 법은 없다는 거죠.
연필깎이
15/09/21 19:28
수정 아이콘
여러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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