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여름 휴가를 맞은 아내와 나는 제주도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여행은 좋아하지만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을 꺼려하는 우리 부부가 7월말에서 8월초 극 성수기에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가기까지는 나름 큰 결심이 필요했다.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임신 7개월에 접어든 아내의 배가 더 무거워 지기 전에.. 그러니까 아직은 불편하지만 걸어다닐만 한 지금이 둘만의 오붓한 여행의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는 조급함이 우리 부부의 등을 떠민 것 같다. 일단 결정을 하고나니 숙소 예약이니, 비행기표니 하는 사소한 일들은 금방 해결되었다. 돈만 평소보다 조금 더 들었을 뿐이다.
난 제주도에 지금껏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다. 제주도에 어디가 있는지도, 무엇이 유명한지도 하나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든 처음가보는 곳은 설레게 마련. 신혼여행 때 처럼 하루씩 번갈아가며 계획을 세우고, 동선을 짜고 준비물을 챙긴 후 마치 신혼여행이라도 다시 가는 기분으로 우리를 두팔 벌려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던...) 제주도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이른시간에 아침비행기를 타고 제주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예약한 렌트카로 바다로 달렸다. 역시, 여행의 시작은 바다다. 특히 제주도의 바다는 정말 아름다웠다. 난 바다를 좋아한다. 따스한 햇살, 모래사장, 파도, 바다냄새, 바람 다 좋지만 넓은 바다를 보고있으면 시간가는줄 모르겠다. 바닷가를 갔다가 상상속의 바다와 너무 달라 실망했던 적이 종종 있었는데 제주도의 바다는 그런거 없다. 상상속의 바다 딱 그모습이다. 여행 계획 세울 때 태풍만 안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에 정말 구름한점 없었다. 해수욕장에서 적당히 먼 곳에 우연히 찾아가게 된 경양식 식당은 프랑스인 쉐프가 한국인과 결혼해서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메뉴가 맛있기도 했지만 창문 사이로 보이는 식당과 주변 바닷가 풍경이 이국적이기도 하고 신비로웠다. 제주도의 첫인상은 환상적인 바닷가와 식당이었다. 제주도의 두 번째 인상은 넓은 국도의 제한속도가 50~60인 곳이 이상할 정도로 많다는 점. 그리고 운전하는 차들의 매너나 상태가 심하게 별로라는 점이었다. 지리를 잘 모르는 외부인들이 자차가 아닌 렌트카로 많이 다니다보니 사고도 많다고 한다. 사고율이 전국 최고라나.. 그래서 더욱 조심조심 운전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부부는 여행 운이 좋은편 이었다. 미리 많은 조사와 준비를 한 것도 아닌데다 제주도에 대해 잘 모름에도 불구하고 찾아갔던 식당마다 매우 만족스웠고 숙소 역시 깔끔하고 위치도 적당했다. 날씨 역시 최고였다. 내 생에 첫 제주도 여행은 아주 만족스럽게 마무리 되고 있었고 그렇게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여행 마지막 날 우리는 예정을 변경했다. 아침 코스에서 아내가 좀 힘들어한 관계로 공항 근처 해수욕장에서 잠시 앉아서 쉬다가 차를 반납하고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서귀포방면에서 제주시 방면으로 차를 몰다가 네비를 잘못봐서 길을 놓쳤다. 그리고 십여분 후 또 길을 놓쳤다. 평소 운전을 오래 했던 아내가 네비를 잘 봐주기 때문에 이런일이 흔치 않다. 이런 실수를 두번이나 해서 한라산방면 국도를 타게 되었다. 길이 좁은 2차선인데다 꼬불꼬불해서 운전하기 불편했지만, 잠시 차를 몰다보니 산간에 말 목장이 나왔는데 너무 멋있어 즉흥적으로 구경하고 가게 되었다. 아내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올까 고민 하다가 좀 이따 가도 되겠다고 해 길을 나섰다. 아마, 이날 했던 많고 많은 선택들 중 하나만 안했거나 다르게 했더라면. 또는 네비게이션을 잘못보는 실수를 한 번만 안했다면 우리 부부의 제주도 여행은 평범한 2박 3일 여행으로 끝났을 것이고 지금 쯤 태교동화를 읽어주며 사이좋게 보듬어 안고 잠을 청하고 있겠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지 못한 채 우리 부부는 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운전대를 잡고 나서는 내리막길이었다. 앞지르기 안되는 2차선 도로에서 40~50Km정도로 운전하는통에 뒷 차들이 많이 따라오고 있었고, 그들은 아마 답답해 했으리라. 내가 선두였다. 조금 빨리갈까? 생각하던 그 순간 왼쪽으로 급커브지역에서 맞은편 차선에서 오던 차 느낌이 이상했다. 머리속에 20개정도의 물음표가 지나갔다. 이녀석은 우회전을 해야하는데? 왜 속도를 줄이지 않지? 그 다음순간 꽝 했다. 에어백이 터졌고 흰 연기가 자욱했다. 아내가 비명을 지른다. 아!! 아!! 두 번 비명을 듣고 정신이 돌아왔다. 야속한 블루투스 오디오는 계속 노래를 틀어대고 있었다. 가장먼저 들었던 생각은 내가 더 천천히 갔어야 했다는 후회였다. 뒤에 따라오는 차들이 부담스러워 약간 속도를 높이려던 참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았어야했는데. 아내와 아이 생각이 났다. 우리애기! 어떻하지! 무사하겠지? 탈 없겠지? 안전벨트를 맸던 곳이 배가 아프다. 아내도 나만큼 아프겠지? 큰일인데 어쩌지. 난 뭘해야하지? 옆에 아내를 봤는데 이마에 과장없이 야구공 크기만한 혹이 나 있었고 피가 흐른다. 머리가 저렇게 부을 수 있나? 아내 얼굴을 보고나니 애기 걱정이 싹 들어갔다. 그때 한번 더 꽝 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차가 멈추지 못하고 받은 모양이다. 몇대나 더 추돌할지 몰라 아내를보고 다급히 말했다.
“일단 내려!”
급히 내리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내가 당황하면 아내가 더 놀랄거야. 난 당황하면 안돼. 아내가 침착하게 누워있고 싶다고 미션을 주더니 길바닥에 눕는다. 12시 다 되가는 시간이라 아스팔트가 열기를 훅훅 뿜고있었다. 더운게 아니라 뜨겁다. 급한대로 캐리어를 꺼내 그 위에 앉혔다. 핸드폰을 꺼내 119를 불렀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일단 불렀다. 뒤에 멈춰있던 suv운전자분이 배가 부른 아내를 보더니 이리와서 누우라고 한다. 그 말이 천사의 말처럼 들렸다. 고맙게도 에어컨도 틀어주시고. 기다렸다. 배가 찢어질 듯 아팠다. 아내도 배가 나만큼 아프겠지? 그생각이 들었을 때 아이가 혹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마음으로 포기를 했다. 아내를 챙기고나서 생각하자. 하지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내 상처를 물티슈로 닦아주는 것 밖에 없었다. 아내가 나보다 침착했다. 중요한 짐 챙기고 핸드폰 챙기고 선글라스 벗고 안경끼고 오란다. 시킨대로 했는데 안경을 못찾겠다. 그냥 포기하고 아내에게 돌아갔다. 그때 119에서 전화가 왔다. 차가 막혀서 15분정도 걸린단다. 젠장, 왜 이런 산에서 이런 사고가... 그때 기적처럼 사이렌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급했다.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는길에 구급대원분들이 응급조치를 해 주었다. '경상으로 보입니다' 누구에게 하는 무전인지 몰라도 그렇게 말하더라. 머리가 저렇게 되있는데 경상이라니? 배가 저렇게 부른건 안보이나? 온갖 생각이 지나갔다. 다행히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제주대학교 병원이 있었고 응급실로 갔는데.. 구급차 타고 왔다고 당장 뭘 해주는건 아닌가보다. 수속밟고 기다렸는데 그냥 계속 기다리는거다. 나중에 든 생각이지만 병원 쪽에서는 단순 사고로 생각하고 이마 상처가 심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뒤로 미룬 모양이다. 복부차폐x레이를 찍으러 갔다가 아내가 아이를 먼저 보고싶다고 말했고 이러저러 피말리는 20분정도가 지났다. 태동이 있는지 물었지만 아내는 모르겠다고,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잠시 후 간호사가 배에 난 벨트자국을 보고는 심상치 찮다고 느꼈는지 급히 산부인과로 보내주었다. 난 그저 내가 설명하고 요구를 했어야 했는데.. 라는 자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참 길고도 긴 시간이 지나고, 배에서 아이의 심장소리가 기계를 통해 들려왔을 때의 기분은 뭐라 말로 설명할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찰관들이 차에 있던 짐을 가져다 주었고, 렌트카에 사고 연락을 했다. 6시 비행기가 예약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은 큰 이상 없어보이니 비행기를 타고 지역에 가셔서 치료를 받으셔도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말했다. 하지만 규정상 교통사고로 들어온 산모는 4시간은 태동검사를 하게 되어있다고 한다. 4시간 검사를 하고나면 한 5시가 된다. 그럼 비행기 시간이 빠듯한데.. 그런데 이렇게 그냥 가도 괜찮은건가? 극성수기였기 때문에 비행기를 놓치면 언제 표가 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나중에는 이런 고민을 한 것을 또 후회하게 됐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는 아내가 (나중에 알고보니 가진통 상태) 울며불며 결국 태동검사 4시간을 채우고 당직 교수님에게 이런 환자가 왔다고 보고를 하니 당직 교수님이 초음파 한번 보고 가라고 하셨고, 초음파검사를 하시던 그자리에서 응급수술이 결정되었다. 태반에 출혈이 있고 출혈량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당장은 괜찮아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영양과 산소공급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한다. 만약 산부인과 레지던트 선생님이 규정대로 검사를 안하고 아이가 잘 있으니 올라가도 된다고 말했다면. 또는 4시간 검사 후 교수님에게 보고를 안하고 마무리 했다면. 또는 교수님이 보고를 받고도 따로 검사를 안해보고 퇴원하시라고 말했다면. 또는, 초음파를 보고서도 이상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아니다. 애초에 충격부위에 태반이 조금만 더 가까웠어도. 심지어 7개월에 만삭임산부로 오해받을 정도로 많았던 양수가 조금만 더 적었더라도 내 아들은, 그 핏덩어리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태어났더라도 건강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예정일보다 80여일 이르게 나는 아빠가 되었다.
이렇게 예정되었던 2박 3일 제주도 여행이 끝나고 의도치 않았던 49박 50일 제주도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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