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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2/22 13:23:15
Name 후추통
Subject [일반] 동북공정의 시작, 연변정풍운동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만주 일대로 많이 나아갑니다. 조선 후기의 사회변천과 이후의 세도정치 아래서의 혼란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이주하기도 했으며,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로 병탄할 때 독립운동을 위해서, 일본의 통치를 피하기 위해서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죠.

이들은 중국 동부지방, 즉 만주 지역에 살면서 그 지역에 대대로 살던 만주족이나 한족과는 다른 한민족 그리고 조선인이라는 확고한 정체성 아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1946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한반도 신탁통치에 대해서도 연변을 비롯한 각지의 조선인들은 군중대회를 통해 신탁통치를 격렬히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거기다 1948년 초에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총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한국으로 오자 목단강을 비롯한 각지 조선인들이 집회를 열고 한국임시위원단을 규탄하는 집회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조선인들이 조국보위를 위해 중국 당국에 조국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죠.(아무래도 이후의 상황전개를 보면 북한 쪽을 자신들의 조국으로 생각한 듯 합니다.)

1957년 4월 27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정풍운동을 하라는 지시를 중국 각 지역에 하달합니다. 목적은 당 내부의 그릇된 경향 추방을 위한 것이었고, 당 내부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의 언론 자유를 말하기도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정풍운동 과정에서 중앙당에 대한 비판이 급속도로 많아지자, 중앙당은 자산계급우파분자를 공격할 것을 지시합니다. 즉, 반우파투쟁을 시작한 것이죠. 실제로 57년 하반기부터 중국 전역에는 반우파 투쟁이 벌어지게되죠.

연변의 조선족 지식인들은 이러한 정풍운동 과정에서 많은 좌담회나 지상토론을 벌였는데, 조선족 인사들은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 정책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드러냅니다.

주덕해는 포괄적으로는 중앙당의 소수민족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지엽적으로는 비판을 가합니다.

주덕해 : 민족집거지구에서 민족구역자치를 실현했지만, 형식 뿐이고 내용이 없고 민족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자치권한이 약하다. 행정부가 수직적 명령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치지구에서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어려워 실제로는 민족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또한 민족이 산재한 산재지구에서도 한족과 소수민족문제, 인민정부와 소수민족간의 모순이 있다. 이는 인민정부가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적지않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주덕해, 연변 조선족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본명은 오기섭으로, 1927년 고려공산주의 청년동맹에 가입하고 1931년 동경성에서 중국공산당에 들어간 후 아무르강의 닝안 ·미산 등지에서 공산당활동을 했죠. 1959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 주석직무, 그 후 중공연변주위 제1서기겸 주장 직무와 연변대학 교장직도 겸임합니다. 연변예술학교를 세워 조선족 예술인을 양성하는 등 조선족의 권위신장에 노력한 것이 화근이 되어 ‘지방민족주의 분자’로 낙인찍혔고 문화대혁명기간 중 임표 ·강청 등에게 박해를 받았으나 주은래의 보호로 베이징을 거쳐 1969년 호북성 1953농장에 피신하였다가 우한에서 폐암이 발병하였고 1972년 7월 3일 61세로 사망합니다. 1978년 명예회복되고 시신이 연길로 돌아와 연길 시민공원에 안치됩니다.


주덕해는 당시 공산당 중앙후보위원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러한 비판은 이 좌담회에 참여한 반대파들이 ‘노패 민족주의자’들 역시 공산당의 민족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고 합니다. 이희일의 기록에는 이때 당시 산재지구의 문제가 많이 지적되어 민족차별의 정황, 민족문화교육의 경시, 민족간부 출신이 자기 민족언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정황, 민족공업 발전 문제 등을 마구 비판했다고 합니다. 거기다 좌담회가 끝나갈 무렵에는 연변 자치주를 확대해 자치구를 만들자는 의견도 조선족 지도자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57년 6월, 주덕해는 심복인 김명에게 자치주 확대의 3가지 이유서를 받아듭니다. 그 내용은

1. 연변자치주의 관할 범위와 경지 면적이 적고 산이 많아 구릉지대가 많아 조선족 인구는 증가하지만 자급자족이 곤란하다.
2. 연변의 조선족은 한어(중국어)를 못하고 외지 공작이 어렵다.
3. 목단강 일대와 교하 장백 등 자치구역을 확대하면 동북의 조선족들이 연변으로 오길 원하더라도 용이하게 안배가 가능하다.

연변의 조선족이 중국어를 못해 외지로 나가기 힘들다는 것에 이희일은 58년 이전에는 연변 대학에서는 전부 조선어로 강의를 했고, 그 결과 졸업생들은 중국어를 하지 못해 민족들이 섞여사는 지역의 사업수요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물론 최고학부였던 대학이 이정도면 다른 초중등학부는 뻔하죠. 실제로 문혁시기에 나온 자료에 의하면 연변대학 출신들 대다수가 북한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즉 중국에서 자리를 잡고 그 영향력을 확대해야 할 조선족 출신들이 언어문제로 인해 북한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것은 결국 이 연변자치주의 북한과의 결속이 심해졌다는 것을 알수 있죠.

세 번째의 연변 외부의 조선인들을 연변 내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산재지구의 민족갈등문제로 인해 조선족을 연변 재 조선족 자치주에 받아들여 몸집을 불려 자치주를 자치구로 확대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이러한 주덕해의 요청에 대해 강경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중국어를 강제로 보급하고 연변 조선족 지도자들의 뜻인 영역과 자치권한 확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중국인과 동화시키려 한 것이죠.

1957년 7월7일 연변일보가 낸 우파분자의 진공 격퇴 분쇄라는 제하의 사설을 시작으로 연변 역시 정풍운동이 시작됩니다. 58년 자치주 직속기관의 당원간부대회에서 주위원회 부서기 김명한은 지방민족주의 반대하고 민족단결을 강화하자는 동원보고를 한 이후, 중국 공산당은 자치구역확대 주장은 민족주의라고 규탄하며 탄압하고 한어대약진운동을 전개, 조-한(조선족-한족) 연합학교 구성, 중국 조국관 교육을 시작합니다.

중국이 이러한 자치확대를 탄압한 이유는 바로 조선족들이 북한과 연계될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쇼프가 등장하면서 중-소 갈등이 일어났고, 북한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남한과 대치, 이 기회를 틈타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하죠.

중국의 이러한 경계를 부채질 한 것은 영토문제 였습니다.

1948년 12월 길림시에서 열린 민족사업좌담회에서 연변 행정책임자로 있던 임춘추는 그 세력과 함께 연변의 북한 귀속화를 주장했고, 임민호 파는 소련 방식을 통해 연변을 자치공화국으로 해야한다 고 주장합니다. 거기다 이 좌담회 직전에 주덕해와 임민호는 북한으로 들어갔고, 당시 북한 선전상으로 있던 허정숙은 연변의 민족 자결화를 주장합니다. 거기다 임민호는 북한 인사들 앞에서 자치공화국 수립을 위해 노력하며 자치공화국 수립을 통해 연변을 북한에 귀속화 할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임춘추와 임민호는 그 방법론에 따라 달랐지만, 결과적으로는 연변자치구의 북한 귀속을 말했던 것이죠. 만주 조선인을 대표했던 주덕해는 연변의 북한귀속에 관한 것은 전혀 말하지 않았지만, 북한과의 연계한다는 발상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고 48년 4월 민족사무처장을 맡자 연변의 문화건설은 북한에 의지해야 한다고 발언했고, 연변대학의 교재는 북한의 것을 가져다 썼으며, 한국전쟁 발발 직전 중국 중앙 동북국에 연변에 성급의 자치공화국 건립 허가, 조선인들의 심리에 맞는 지방조직 형태 형성을 건의합니다. 그러나 52년에 출범한 연변 조선족 자치구는 그 자치권한이 매우 최소화 되어 있어 주덕해는 많이 실망햇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자치권리, 자치구역 확대를 위해 연변 조선 민족주의자와 주덕해는 손을 잡았고, 57년 상반기의 자치구역 확대론에 중국 정부는 연변의 북한 귀속, 연변 자치공화국화에 연계에서 판단했습니다. 거기다 중-소 관계의 악화와 1959년 인도-중국간의 국경분쟁에서 소련이 중국을 배신하고 인도를지지, 티베트 내부의 분리 독립운동의 격화로 인한 같은해의 티베트 봉기는 자치권 확대=북한 연계라는 인식을 중국 공산당에게 심어줬죠. 이러한 점은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조반파(북한 반대파)들은 아예 드러내 놓고 소련과 북한을 반대하고 연변 내 조선인 유력자들을 북한의 간첩혐의를 씌워 몽땅 숙청해 버립니다.

1958년의 연변정풍운동 이후의 연변 내 상황을 증언해주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1955년에 연변을 떠나 60년까지 소련 유학을 다녀왔던 연변대 교수 정판룡과 같은 연변대 교수인 김태국 교수죠.

정판룡 교수는 자신의 저서 ‘내가 살아온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책에서 연변정풍운동 이후의 상황을 이리 말하고 있습니다.

55년 내가 연변대학을 떠날때만 하더라도 연변의 조선인들은 자신이 조국이 조선(북한)인지 중국인지 잘 분간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정풍운동 이후로는 모두가 중국이 자신들의 조국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조국은 절대 있을수 없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중국인들을 지칭하는 것은 한족들이었으나 자신들의 조국이 중국임을 받아들인 이상, 조선족들은 한족들을 중국인으로 부르지 않았다. 정풍운동 전에는 여자들은 바지 입기를 꺼렸지만 돌아와 보니 여성들은 바지를 즐겨 입었으며 남자들도 한족처럼 중산복 입기를 좋아했다.

김태국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정풍운동 전, 조선족들은 한반도와 중국을 모두 자신의 조국이라 생각하던 것을 버리고 중국만을 자신의 유일한 조국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정풍운동은 이제 조선족들은 민족,문화적인 측면에서 고국(한반도)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고 중국 국민으로서 살아가야한다는 결심을 확고하게 굳히도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민족정풍운동의 결과 조선족들은 한반도와의 문화적 연계보다는 중국 내의 다른 민족들과 문화적인 교류를 통해 조선족 특유의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하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두 교수의 발언은 실제로 1992년에 실시된 여론조사로 증명됩니다. 1996년에 일본에서 나온 중국조선족-역사, 생활, 문화, 민족교육이라는 책에서 1992년의 여론조사가 공개됩니다.

그 여론조사는 연변내 조선족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였는데, 주제는 “당신의 조국이 중국인가 조선인가”였습니다.

그 결과 중국이라고 대답한 것은 평균 70%이상이고, 간부(정부기관 공무원이나 기업종사자)들은 95%, 중학생 90%, 대학생 60%, 농민 30%가 중국이라 대답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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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리
12/12/22 15:27
수정 아이콘
실제로 동북지방에 살면서 조선족 1,2,3,4세대 모두 만나봤습니다.
1,2세대는 자신은 조선인이라는 의식이강합니다. 1세대 할머니는 중국어도 잘 못하시고요.
2세대 분은 본문에 나온 연변대학나오신분입니다. 그때만해도 조선사람끼리만 살았다고 하시네요.
3세대는 중년층이었는데, 중국어조선어 모두 하며 중국사회에 잘 융화해서 살아갑니다. 한국과 중국이 축구하면 둘다 응원한다고 하더라구요.
4세대는 젊은층인데, 거의 중국인으로 보셔도됩니다. 요즘은 일부러 조선족학교안보내고 한족학교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어 잘 못하는 비율도 늘고 있구여...

앞으로 세대가 지날 수록 조선족이라는 개념은 사라질겁니다..
깃털티라노
12/12/22 15:48
수정 아이콘
조선족은 향후 20년만 지나면 거의 만주족만치 사라져 없어질겁니다.
동북공정은 그시작이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시기로 올라갈정도로 오래되고 중국이
동서남북 몽땅 중국은 하나다라는 전제하에서 시작된거니까 새삼스러울것도 없지요
루크레티아
12/12/22 16:16
수정 아이콘
사실 조선족이야 사는 곳인 연변, 만주 일대가 예전부터 중국 왕조의 영토였으니 자연히 한족과의 접촉도 많고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생각 할 만 하죠. 저런 정책의 진정한 타겟은 조선족보다는 오히려 티벳이나 위구르 같은 지역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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