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에게 마왕이 쓰러지고, 마족의 땅 제국에선 새로운 마왕을 뽑기 위한 대회가 벌어집니다. 쟁쟁한 실력을 가진 차기 마왕 후보진 가운데 어라, 뭔가 이상한게 섞여 있군요. 마족의 영토 한 복판에 인간? 그것도 마왕을 쓰러트린 원흉인 용사? 네, 우주용사 히맨을 닮은 듯한 이 용사의 이름은 헬크. 헬크는 예선을 우수한 성적으로 돌파한 소감을 묻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인간이 밉다. 인간을 멸망시키자."
인간을 지켜야 할 용사가 극도로 인간 불신에 빠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나나오 나나키의 만화 헬크는 용사물 클리셰 비틀기로 스토리 도입부를 풀어나갑니다. 사실, 용사가 나쁘고 마왕이 착하다란 클리세비틀기도 너무 비슷한 작품이 남발된 나머지 그렇게 참신하다고만 할 수 있는 플롯은 아닙니다. 전개 초반에 개그와 클리셰비틀기로 스토리를 진행 시키는 까닭은 작가에게 다른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죠.
시작은 가볍지만 페이지를 넘길 수록 만화의 스토리는 진지해집니다. 비극, 신파, 절망적인 운명을 극복하는 희망과 우정.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안드나요? 만화 헬크는 고전 rpg 게임이나, 소년 판타지 만화에서 보여줬던 정석적인 스토리텔링을 지향합니다. 그리고 그 오래된 플롯을 훌륭하게 묘사해내지요.
마족은 악하지 않은 종족임에도, 인간 왕국의 위정자들은 끊임없이 마족은 사악하고, 위험하다고 백성들을 세뇌시킵니다. 오히려 마족 제국이 불모지의 독기에서 생성된 마물을 억제하는 수호자 역할을 함에도 계속해서 마족을 적대하고 전쟁을 걸어오죠. 대륙을 지켜내기도 벅찬데,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인간놈들이 툭하면 시비를 거니 제국 입장에서도 마음에 들리가 없었지요. 마족과 인간간에 감정의 골은 깊었고 서로를 이해할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제국 사천왕이자, 히로인인 버밀리오는 헬크를 계속 의심하고 경계할 수 밖에 없었죠.
대회 결승전 인간에게 함락당한 마왕성 탈환 과정에서 헬크와 버밀리오는 폭주하는 게이트에 휩쓸려 제국과 인간왕국이 있는 대륙에서 한참 떨어진 세계의 끄트머리로 순간이동됩니다. 그리고 제국까지 돌아오는 긴 여정 속에서 헬크라는 인간을 이해하게 되죠. 처음에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다가도 적인 자신을 구해주고, 요리를 대접하고 항상 친절하게 웃어주는 헬크의 모습을 보며 닫혀있던 마음이 점점 열립니다. 제국으로 귀환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밤 헬크는 버밀리오에게 칼 한자루를 내밀면서 자신의 과거를 예기해줍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폭주하게 되거든 말려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면서 버밀리오에게 내민 단검으로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죠.
헬크는 항상 웃고있지만 내면엔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슬픔을 짊어지고 있는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하나뿐인 가족인 동생이 눈 앞에서 칼로 목을 그어 자살하거나, 사랑하는 연인과 소중한 동료들이 불완전하게 용사로 각성되어 괴물로 변하는 참혹한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세계의 의지를 대행하여 세상을 멸망시켜 리셋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란 악당의 흉계로 인간 왕국은 자아를 잃어버린 괴물만 남게 되죠. 사실 인간은 이미 멸망한 거나 다름 없었습니다. 헬크가 인간을 멸망시키자고 말한 것은 돌이킬 수 없게 되버린 동족과 소중한 이들을 자기 손으로 안식 시켜주겠다는 애처로운 사명감입니다.
인간을 괴물로 변이시키는 눈이 내리던 날, 흉측하게 변해가는 헬크의 연인 앨리시아는 자아를 잃고 괴물이 되는 도중에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헬크를 보니 마음이 미어집니다. 그리고 헬크의 뺨을 어루만지며 부탁을 하죠.
"나는 헬크의 웃는 모습이 좋아. 다시 만날 땍 헬크를 기억 못하게 되어도 항상 웃어줘."
헬크가 항상 웃고 있었던 것은 연인 앨리시아의 부탁 때문이었습니다. 당장 미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슬픔과 고뇌를 품고 있음에도 헬크는 인간성을 잃지 않았죠. 하지만 금이 가기 시작한 헬크의 정신이 붕괴되기까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 했습니다. 인간 중에서 가장 각성율이 높은 용사였기에 헬크가 이성으 끈을 놓고 폭주하게 되면 세계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거대한 재앙이 될 수도 있었죠. 그렇기에 헬크는 신뢰하는 버밀리오에게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무기인 마검 용사살해를 건네고 진실을 밝힌 겁니다.
헬크의 진심을 깨달은 버밀리오는 검을 받으면서, 모든 일이 마무리 되면 제국으로 오라고 말합니다. 갈 곳이 없어진 헬크에게 정착할 새로운 터전을 제공하겠다는 소리였죠. 인간과 마족이라는 물과 기름 같이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두 종족이 서로를 이해하고 우정을 쌓게 되는 첫 장면입니다.
날개를 가진 인간들이 제국을 본격적으로 침공해 옵니다. 불완전하게 용사로 각성된 날개 병사들은 왕의 금술로 인해 죽어도 무한히 되살아나는 불사신이었고, 부활 할 때마다 강해지는 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국은 인간 말고도 상대해야 할 적들이 많기에 한정된 병력만 동원할 수 있었죠. 전황은 점점 불리해져만 갑니다.
헬크와 버밀리오가 귀환하면서 제국에도 희망이 생깁니다. 버밀리오의 동료인 제국 사천왕 아즈도라는 제국군이 인간 본대를 맞아 방어할 동안 소수의 정예병력으로 인간의 왕을 처단하려는 작전을 짭니다. 왕만 쓰러트린다면 술법이 해제되어 날개 병사들이 부활을 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술법의 통제를 벗어난 인간은 그나마 유지하던 인간 형체도 무너지고 폭력과 파괴만을 일삼는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모든 흉계를 꾸민 악당 마카로스는 헬크의 옛 동료들을 동원하여 헬크의 멘탈을 흔들어 놓으려 합니다. 현 세계의 멸망과 신 세계의 시작이라는 자신의 계획에 끝을 알 수 없는 헬크의 힘은 최대의 방해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결정적인 수로 연인 앨리시아를 헬크와 대면시킵니다. 연인을 한 번 잃고 다시 죽여야만 하는 운명. 버밀리오는 슬픔에 잠긴 헬크의 표정을 보면서 뭔가 잘못됐다라고 깨닫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국에 정착하여 살라는 것이 진정 올바른 해답이었을까? 그럼 헬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니었죠. 마카로스를 쓰러트리든, 전쟁에서 승리하든 간에 헬크에게 행복한 결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기다리는 건 오직 어두컴컴한 슬픔과 절망의 구렁텅이 뿐이었죠. 버밀리오는 두려운 상상을 해봅니다. 충직한 제국의 동료들과 때론 친구처럼, 때론 오빠처럼 소중한 아즈도라가 죽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버밀리오는 자기가 헬크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아챕니다. 헬크가 바라는 것은 인간의 멸망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돌이 킬 수 없는, 어떤 일말의 방법조차 없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상황임에도 암흑만이 채워진 헬크의 깊고 깊은 내면 속의 바닥에는 인간을 구하고 싶다란 미약한 희망이 있었던 거죠. 버밀리오는 헬크에게 소리칩니다. 헬크, 그녀를 죽이지 마라! 그러고는 계속하여 외칩니다.
"인간을 구하자!"
버밀리오 스스로도 방법 따윈 모르지만 인간을 구할 길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마카로스가 부질없는 낙관론이라고 조롱하지만 버밀리오는 아랑곳 하지 않죠. 포기하지 마라. 포기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것 들도 의외의 해답이 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마음을 답답하게 죄어오던 고민이 해결됐는 지 후련하게 웃습니다. 고독하게 나아가도 나아가도 끝나지 않을 어두컴컴한 수렁을 걷는 기분이었을 헬크는 버밀리오의 우정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을 얻습니다. 그래, 인간을 구하자!
인간을 멸망시키자는 절망에서, 인간을 구하자란 희망으로 변하는 이 장면은 제가 헬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명장면입니다. 이후에 스토리는 어떻게 됐을까요? 헬크와 버밀리오 두 사람 앞에 놓인 시련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고, 때론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빠집니다. 그러나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질만한 상황에서도 서로를 일으켜주고 힘을 북돋워주는 친구가 있으니 낙관적인 희망을 품어봐도 좋지 않을까요?
결말은 직접 확인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극 속에 피어나는 희망. 상대를 이해 할 수 없으리라 여겼음에도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진중하게 쌓아가는 우정. 헬크는 이젠 진부해져버린 정통 판타지의 스토리텔링을 다루면서도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기고 나면 독자에게 여운이 길게 남는 깊은 감동을 안겨다 줍니다.
이야기의 본질은 장르 구분과 유행의 흐름을 막론하고 독자를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헬크는 정말 좋은 만화에요. 범람하는 사이다패스 창작물 홍수에서 때론 느긋하게 어린 시절 즐겼던 rpg게임을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헬크를 감상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의 말대로 희망은 결코 나쁜게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