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창가에서 조금 떨어져 카페나 부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의자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으로 햇볕이 너무 강하게 쏟아져 들어와 그녀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도 마치 물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웅웅거려 뚜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다만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실루엣과 내 느낌이, 그녀가 내 앞에 있음을 확신하게 만든다.
그렇게 보고 있자니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진다. 초등학생 때 돋보기로 햇빛을 한 곳에 모았던 것처럼,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응축되어 또렷하게 들렸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데, 청각만큼은 공기 소리도 들을만큼 예민해져 있다.
'그렇다고 그렇게 연락을 하나도 안해?'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 '...' '다시 연락할거야? 약속할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거기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잘 보지 못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 눈을 뜨니 새벽 5시다. 한국은 아마 밤 9시? 10시?쯤. 사적인 메세지를 보내기에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을 것 같다.
그녀의 잔인함에 힘들었던 지난 몇 달이 떠오른다. 잊고 싶어서 미친듯이 운동하고, 일하고, 술 마시며 스스로를 함부로 대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날 이후로, 그녀와 관계된 모든 기억과 데이터, 물건은 일부러 외면하거나 폐기처분했다. 원래 내 삶에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삭제해 버렸다. 그런데 지금 기억이란 놈이 간사하게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여기서 일개 꿈을 핑계로 그녀를 다시 끄집어낸다면 지난 몇 달간의 고생도 물거품이 되는게 아닐까...
그러나 비몽사몽한 의식은, 아직도 잊지 못한 그녀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메세지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 믿고 싶은 판타지는 그냥 한번 믿어보겠다던, 얼마 전에 보았던 드라마 주인공의 대사가 스치며 타입을 시작한다.
000, 안녕 잘 지내?
덧1. 미국에 출장왔다가 새벽에 있었던 찌질찌질한 이야기입니다. 덧2. 이토록 선명하게 꿈을 꾼 경험이 거의 없어서 한번 기록으로 남겨보고 싶었어요. 싸이월드 때 이후로 인터넷에 이렇게 긴 글을 쓰는게 처음인데, 아마 이불킥 각이겠죠? 덧3. 전 그녀와 다시 보지 않는게 맞습니다. 전 그녀의 진면목을 봤고, 또 제 찌질함의 밑바닥을 그녀에게 보여줬습니다. 지금 우연히라도 다시 만나게 되면 꼭 헐벗고 있는 것처럼 부끄러울 것 같아요. 덧4. 그래도 한번씩 생각나는건 어쩔 수 없는데, 그래도 다시 나아지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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