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이, 은하의 따뜻한 체온과 코 끝을 스치던 향기가 사라진다.
나홀로 텅빈 어둠 속에서, 밀려오는 허탈감에 건조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하..."
이런 후유증이라니. 가슴이 너무 퍽퍽하고 갑갑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결말이었지만, 정말로 이렇게 되니 갑자기 명치를 쎄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내 안에 소중한 뭔가를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짝짝짝.
- 기대이상이네요. 아저씨.
이런 내 허탈한 심정을 조롱하는 듯한 박수소리와 함께, 어둠 저 편에서 익숙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워어. 그렇게 원망하는 눈빛으로 보지 마세요.
그리고 조롱하려는 의도로 박수를 친 건 아니라구요.
원래 한 번 아니꼽게 보이기 시작하면, 계속 그렇듯이 아이의 말에도 원망감이 가시질 않는다.
- 잠시 진정해보세요.
가슴 속에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이 시점에서 화를 내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
그래, 이렇게 잠시라도 은하와 이어져 볼 수 있는 것도 저 정체모를 아이덕분이다.
(사실 아이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만) 애초에 타임슬립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순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고? 내가 누구한테?
목소리가 아이라고해서 이 '존재' 자체를 아이라고 생각했던 건가? 무르다. 물러.
생각해보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과 동급일 리 없다.
- 키득키득.
순간 비릿한 웃음소리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것은 마치 뱀 앞에 놓인 개구리가 느끼는 감정, 공포였다.
이런 신적인 존재에게 화를 낼 셈이었나.
- 신이라뇨. 과분하네요. 다행스럽게도(?) 저는 그런 귀찮고, 거창한 존재가 아니랍니다.
어쨌든 갑자기 그렇게 저를 두려워하실 필욘 없어요. 저희 쪽에도 해서는 안 되는 불문율이라는 게 있어서요. 키득.
아이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 공포에 사시나무 떨리 듯 덜덜거리던 몸이 멈췄다.
[하아.]
순간 긴장이 탁 풀려 호흡이 쏟아져 나온다.
- 진정이 좀 되셨나요?
진정이 됐냐니. 니가 진정시킨 거잖아.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 뭐, 이렇게 안하면 아마 진정이 되지 않았을 거에요. 키득.
제가 생각보다 바쁜 몸이라서. 그럼 정산 좀 해볼까요?
[정산?]
- 미션을 종료했으니 보상이 있었을 텐데요?
아아. 은하를 포옹하던 그 순간 주변에 요란하게 뜨던 상태창이 생각났다.
어디에 쓸 지 모를 스킬포인트 같은 걸 받았는데...
- 아주 흡족한 수준이에요. 듀토리얼에서 5포인트나 벌다니! B랭크 수준만 됐어도 괜찮았는데
이 정도면 A랭크 수준이라고요.
[A랭크?]
- 어쨌든 그 스킬포인트는 굉장한 거에요. 인간으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거든요.
씹혔다. 아마 일부러 내 반문을 무시한 것 같다.
아직 직접적인 정보는 받을 자격이 안 된다는 건가.
[스킬포인트로 뭘 할 수있지?]
- 역시 인간들은 급하네요. 지금 설명합니다.
2.
[정말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고?]
- 네.
스킬 포인트라길래 그냥 게임놀이 수준의 그것을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들은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단순한 게임 포인트 따위가 아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거의... 말도 안 되는 권능이다.
스킬 포인트.
명칭 그대로 스킬을 찍는 포인트로 쓸 수 있다.
육체를 강화하거나,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캐치하거나, 일시적으로 매력을 상승시킨다거나...
어쨌거나 아주 다양한 스킬들이 존재하고 이를 찍는데 사용할 수 있는 게 스킬포인트의 1차적인 용도다.
그러나 이 정도 수준이라면 감히 권능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 스킬포인트가 감히 권능이라고 까지 말한 이유는, 바로 이 스킬 포인트가 시간 화폐의 개념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스킬 포인트를 소비함으로써 원하는 시점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포인트를 사용해
은하와 사귀기로 한 시점의 나로 타임워프를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스킬포인트는 만약 인간세계에 존재한다면 최고의 가치를 가질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5포인트를 사용하면 과거의 나로 얼마나 머물 수 있는 거지?]
- 과거요? 음... 뭐 아무렴 좋으려나. 그때그때 달라요.
놀리는 건가.
- 놀리는 게 아니에요. 정말 그렇다구요.
아저씨가 돌아가고 싶어하는 시점의 가치가 얼마냐에 따라 1포인트당 일주일이 될 수도 있고, 몇 초가 될 수도 있거든요.
확실히... 인생의 모든 순간이 똑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수긍이 간다.
[그럼 은하와 있을 수 있는 시간의 가치는 얼마야?]
- 오우. 벌써부터 그 귀한걸 쓰시려고요? 어디보자... 1포인트 당 하루네요!
생각보다 후한 시간에 놀랐다. 솔직히 기껏해야 몇 시간 수준일 줄 알았는데.
은하와 같이 있던 순간이 생각보다 많은 가치가 있지 않은 걸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잠시나마 이런 존재에게 화를 내고 싶었을 만큼 분명 은하를
꼭 안았던 그 순간은 분명 소중하고 가치있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 스킬포인트란 것의 가치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이겠지.
실제로 방금 아이의 말에 의하면 '그 귀한 것'이라고 표현했으니,
이런 초월적인 존재에게도 스킬포인트의 가치는 상한가라는 소리다.
- 정말 이런 듀토리얼에서 만난 여자에게 스킬 포인트를 쓰려구요?
저같으면 차라리 실질적인 스킬을 찍어서 다음 미션에서 더 많은 스킬을 벌어볼텐데...
여차해서 잭팟터지면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 있을텐데요. [뭐?]
- 스킬포인트는 낱개의 단위보다 덩어리가 될때 그 가치가 말도 안 되게 불어나거든요.
물론 몇 십 몇 백 포인트 정도로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는 없지만요.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 더욱 다음 미션을 위해서 스킬에 투자해야한다구요.
앞으로 미션들은 튜토리얼만큼 쉽지 않을 테니까요. 키득.
충격적이다. 스킬포인트를 모아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니.
완전 대박이잖아?
- 그럼 다음 미션으로... [아니 1포인트 지금 쓰겠어.]
- 흐음... 정말이에요?
아이는 아쉽다는 듯이 되물었다.
[응.]
- 분명 후회할 거에요. 그런 하루와 바꾸기에 포인트는 정말 아까운 건데... [괜찮아. 은하와 한창 잘 만나고 있을 시점의 하루로 부탁해.]
- 아이 참. 알았아요.
분명 스킬포인트가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쩐지 은하를 향한 이런 감정이 남아있을 때 그녀를 보지 않으면 더 큰 후회를 할 것 같았다.
온통 내 앞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3.
- 현민아! [왔어?]
한껏 차려입은 은하는 정말 예뻤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은하는 너무 예뻤다.
무릎 위까지 온 청치마에 하얀스웨터. 그리고 컨버스화까지.
이렇게 꾸미면 진짜 예쁘겠다 생각만했던 은하의 모습이었다.
이거 참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취향저격인가.
거기에 이렇게 애정을 담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니.
하하하. 절로 웃음밖에 안 나온다.
- 갈까?
데이트 시작과 함께 은하와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 그녀와 잡은 손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깍지지어진다.
참 웃는 모습만큼 손도 이렇게 따뜻했구나.
은하와 함께한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왔기에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하는 날인가 싶었지만,
그냥 누구나 다 하는 아주 기본적인 데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손 잡고 같이 걷고, 거리를 구경하고, 밥을 먹고, 영화도 보고.
은하는 이렇게 잔잔한 여자구나.
그래 아마 은하와 사귀었다면 이런 평소와 같은 잔잔함이 최고의 순간이었겠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에도 은하는 내게 특별함을 느끼게 해주는 여자구나.
아무 것도 아닌 일도 미소짓게 하고, 뭘 먹어도 입가에 묻히는 모습도 사랑스러운.
내가 정말 스킬 포인트로 교환한 것이 하루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은하와의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 이제 가야겠네. 힝. 아쉬워어어.
은하는 어느 덧 자신을 데려다주는 내게 아쉽다는 듯이 볼멘소리를 했다.
많이 아쉬워? 그래도 나만큼 아쉬울까?
아마 나보다 더 아쉬울 순 없을거야.
[나도 아쉽다. 하.]
뭔가 가슴 한 켠에서 묵어리진 감정을 꾹 눌렀다.
- 그래도 내일 또 보면 되잖아. 헤헤.
내일이라...
[응.]
- 다 와버렸네.
벌써 은하의 집 앞에 도착해버렸다.
은하는 들어가기 아쉬운 듯 뒷짐을 지고는 내 주위를 천천히, 빙글빙글 돌았다.
- 휴. 이제 진짜 가야겠다. 얼마 같이 안 있던 것 같았는데 벌써 밤 11시야. [그러게. 안 갔으면 좋겠다.]
- 뭐, 뭐?
아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절대 아니었는데. 피식.
그러고보면 은하 입장에서는 오해할만한 소지가 있었다.
[그런 의미로 한 건 아니고. 하하.]
- 몰라 변태야! 아 통금시간 지나겠다. 진짜 갈게!
은하는 집쪽으로 총총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 아!
그러더니 갑자기 멈춰서서는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 아쉽겠지만, 오늘은 이걸로... 진짜 갈게 안녕!
쪽.
뺨에 은하의 감촉이 스쳐지나갔다.
그 수줍던 은하가 먼저 뽀뽀라니.
그 묘한 느낌에 소년같은 마음이 들기도하고, 아쉽기도하다.
너무 아쉬워. 진짜 정말.
[은하야!]
참지 못하고 멀어지는 은하를 따라잡았다.
[정말 좋아해 많이]
다소 과격했고, 배려 없이 그렇게 은하를 거칠게 포옹했다.
은하는 뭔가 의아하다는 듯이 '왜그래 현민아? 무슨 일 있어?'라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은하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 나도 좋아해. 현민아. 내일 보면 되니... 읍.
다소 충동적이었다는 점 인정한다. 이렇게 은하의 의사를 확신하지 않고
키스까지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은하의 포옹이 따뜻해서, 나를 도닥이는 작은 손이 너무 기분이 좋아서
저질러 버렸다.
[잘 자. 진짜 가 봐. 내일 보자.]
- 어? 어어. 그, 그래.
은하는 넋이 살짝 빠진 듯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은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뭔가 서럽게 가슴을 탁치고 올라온다.
애처럼 질질짜지 않으려고 간신히 가슴을 달래고 진정시켰지만, 살짝 충혈된 두 눈 까지는 어떻게 못했다.
거 참, 다 큰 아저씨가 별 꼴이야.
그리고... 그렇게 서서히 어둠이 다시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10 브릿지편 끝.
11편 본편으로 만나요~
- - -
다소 오그라 들어도 이해해주세요.
원래 현실 연애는 이것 보다, 그 어떤 소설보다 유치하답니다~ 인정? 어 인정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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