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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10/01 22:34:21
Name Eternity
Subject [일반] 모든 공감은 외로움으로 통한다 (-이웃의 한 수험생을 위하여)
*반말체인 점 양해바랍니다.*





모든 공감은 외로움으로 통한다


하루 중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그때만큼은 잡념에 흔들리지 않고 외로움에 구속당하지 않았으니까.

사람들로 북적이는 구내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1년이 넘게 수험 생활을 하면서도 혼자서 밥을 먹는 일은 유일하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밥을 먹으며,
친구-연인들과의 대화에 여념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홀로 도시락을 꺼내는 내 존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듯한 착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까끌까글한 밥알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차가운 밥을 정수기 물에 말아 억지로 밀어 넘기면서,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수십 번도 더 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는 게 싫어서 결국 택한 방법은 생체 리듬을 바꾸는 것.
점심은 식당이 한가해지는 2시 이후에 먹었고
저녁은 아예 식당에 내려가지도 않은 채, 집에서 싸간 과일 몇 조각으로 대신했다.

왜 저녁을 먹지 않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저녁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자꾸만 졸려서.." 라는 부차적인 이유만 둘러댔을 뿐,
'외로워서'
라는 말은 조용히 눌러 삼켰다.

지긋지긋한 수험 생활을 이겨내고 합격의 기쁨을 맛 본 사람들은
남들보다 공부를 잘 한 사람들이 아니라,
남들보다 외로움을 더 잘 이겨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외로움은 떨쳐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지독하게 달라붙었다.
거부하고 피한다고만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한 가지를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외로움이 아닌 '나의 외로움'이라는 사실.
누군가 만들어서 나에게 던져놓은 외로움이 아닌,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외로움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는..
감당하기 힘든 고독과 외로움이 몰려올 때면
조용히 눈을 감고,
나를 짓누르는 고독과 외로움을 찬찬히 느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고독이고.
나의 외로움이므로.

결국은 다 내 것이고,
결국엔 다 내 것이어야 한다면..
두려워하고 피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이 대신할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한 삶이 있고 자신만의 아픔이 있다.

내 가족들에게도, 또 내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도
각자 개개인이 누려야 할 행복이 있고
또 각자가 감당해야 할 상처와 아픔이 있는 것처럼.

진정한 아픔과
존재의 깊은 상처는,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있거나
누군가의 위로를 통해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은 스스로가 감당해낼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분명,
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내 자신을 위한 노력이자
내 삶을 찾기 위한 발버둥인 것처럼..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다.

차분하고 맑은 정신으로 한 줄 한 줄 글을 쓰다보면 어느새
마음 속 생채기 위로 살며시 새살이 돋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보잘 것 없는 내 존재 자체가 정화되는 느낌.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읽어내려 갈까.
그들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까..

내 블로그의 덧글 속에 자주 등장하는
'공감해요' 라는 네 글자 속에서 나는,
'나도 외로워요' 라는 여섯 글자를 읽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외로워서이고
누군가 이 글을 읽는 이유도 외롭기 때문이다.

모든 공감은 외로움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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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갈수있을까?
15/10/01 23:15
수정 아이콘
수험생은 아니지만 공감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여름보단 가을
15/10/01 23:36
수정 아이콘
수험생 시절이 생각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지하생활자
15/10/01 23:41
수정 아이콘
구구절절히 맞는 말입니다.

덧붙여 질문 드리자면.. 결혼하면 안 외로워지나요?
Eternity
15/10/02 09:01
수정 아이콘
음.. 저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15/10/02 14:57
수정 아이콘
얼마전에 제 지인 페북(여자분입니다) 에서...
결혼해서 아이도 둘이나 가졌는데, 아직도 외롭다는 글을 봤습니다.
그 남편이 집안에 잘 못하는 사람도 아닌걸로 아는데 말이죠...
15/10/02 16:43
수정 아이콘
결혼했습니다. 아들만 둘이구요. 북적북적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외롭습니다.
15/10/01 23:43
수정 아이콘
저도 수험생 시절이 생각나네요.
합격의 기쁨은 누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런 고독감이나 외로움이 저를 많이 성장시켜준것 같아요
차우차우
15/10/02 00:54
수정 아이콘
222 공감합니다
스타슈터
15/10/02 10:47
수정 아이콘
그래서 글을 쓰나봅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글을 보고, "난 혼자가 아니였어" 라고 생각해주기를 바라고 있는것 같아요.

내가 겪었던 상처들과 외로움들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겪는 문제라는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보는이에게 치유를 주면서, 자신도 치유하고 싶은 마음이요. 그런 마음에 매일 글쓰는걸 포기하지 못하나 봅니다. 누군가는 써야 읽으니까요. 흐흐
Cliffhanger
15/10/02 12:57
수정 아이콘
외로움 뿐만 아니라, 인간 근원의 감정을 느껴 본 사람의 글은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기분이 들어요. 좋은 글입니다.
곱창전골
15/10/02 13:00
수정 아이콘
첫 문단만 봐도 뭉클하네요.
고등학교 시절,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외로움과 공허함이 뒤섞인 시기였는데
말 그대로 책상에만 앉아있었습니다.
레페브라운
15/10/02 14:45
수정 아이콘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 시절 또한 제 인생이니깐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구들장군
15/10/02 22:36
수정 아이콘
고시낭인 시절 생각나네요.
지금 느끼시는 외로움이,
뜻을 이루신 뒤에는 추억이고 성장의 밑거름이지만,
실패로만 반복되면 그냥 상처이더군요. -_-;;
나똥구리
15/10/03 08:15
수정 아이콘
공감이 갑니다. 전 오래전에 신경림 시인의 갈대라는 시를 읽고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외로움에 대해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외로움이 좀 견딜만 하더군요. 이 외로움이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 할거예요. 잠시 잊는 순간이 있더라고 사라지지는 않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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