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달살이'님의 2주뒤면 부인과 따님이 3주간 여행을 떠나게 되어 혼자 지내게 되었다는 글에 주말에 홀로 여행을 떠나 보시라는 댓글을 달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마 전 다녀왔던 여행 - 이라기엔 무박1일 - 기를 써 보고 싶어졌습니다.
밤 10시, 세종문화회관 뒷편 야외카페입니다. 컴컴해서 잘 안보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커피나 음료를 마시며 시원한 밤바람을 즐기고 있습니다. 저기 어두운 한켠에서 저도 음료에 소주 한팩을 따라넣어 빨대로 마시고 있습니다.
주말이나 평일에 시간나서 가게되는 가벼운 국내여행에서는 저는 주로 '여행**럽' 이라는 여행사를 이용합니다. 부산에서 강릉까지 8~9시간 걸리는 완행열차를 타 본다던지(버킷리스트) 가 아니면 여행사를 이용하는게 자차 운전해서 다니는 것 보다는 여러모로 편리합니다. 가이드가 있어서 설명해주는 것도 마음에 들구요. 여행사의 평생회원이다보니 여행안내 팜플렛이나 문자가 오는데 몇군데 안내 중 저의 관심을 끄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대왕암’
대왕암을 모르는 분은 아마 없겠지요.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이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라 용이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 그 유골을 뿌린 곳이 대왕암이다.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급 관심이 생겨 여행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했더니 이런 사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니 그 곳에 다리가 놓여져 있지 않겠습니까? 구미가 동했습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대왕암의 중앙에 열십자로 물길이 통하는, 그런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수 있다? 구미가 마구마구 동했습니다.
여행 중 두어군데 더 들른다는데 다른 곳은 관심 없습니다. 새벽에 어디서, 명선도라는 곳에서 일출 본다는데 아시다시피 일출은 열 번가야 한번 볼까말까... 일출엔 관심없습니다. 그리고 보통 무박 여행은 피곤해서 잘 안가는데 우등버스랍니다. 뭐 견딜만하게... 괜찮겠지요?
밤 10시30분 버스가 와서 탑승합니다. 좌석은 역시 넓고 앞뒤 거리가 여유있어 편합니다. 등산화 벗고 배낭에서 준비해 온 슬리퍼를 꺼내 신고 목베개 꺼내 베고선 편안히 자리 잡습니다. 조금 전 섞어마신 이슬이 때매 슬슬 졸리기 시작합니다. 30분 쯤 뒤 양재에서 또 한번 일행을 태우고 나서 가이드가 일정에 대해 설명합니다. 내일 새벽 도착지 진하의 명선도에서 일출 볼 계획이랍니다. 진하? 어디 진하? 내가 아는 그 진하?... 술기운에 스르륵 잠듭니다. 새벽에 어딘가 도착해서 버스는 멈추었지만 계속 잡니다. 가이드가 이제 일출보러 가자고 깨워서 일어납니다. 부스스 버스에서 내렸더니 눈앞에 ‘진하해수욕장’ 이라는 커다란 꽃간판이 보입니다.
여기... 그?... 진하해수욕장? 그 곳에... 내가 왔단 말야? 어기적 어기적 가이드 뒤를 따라 백사장을 걸어갑니다. 새벽 어스름한 백사장은 인적이 드뭅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 곳이 맞습니다. 기억이 서서히 납니다.
총각시절 이 곳 진하해수욕장 인근에 사는 사람과 사귄적 있습니다. 시골이라 별다르게 갈 곳이 없어 항상 이곳 진하해수욕장의 카페에 왔습니다. 그 때가 가을겨울 거쳐 봄까지의 몇 개월이었는데... 뭐 별로 깊게 사귀진 않았습니다. 그저 서로 괜찮다... 정도? 그 때는 연애보다 결혼할 상대를 찾는 시기라... 상대방도 저를 그런 기준으로 만났던 것 같고, 거리가 멀어 자주 만나지 못하고 띄엄띄엄 만나다보니 서로 생각하는 마음도 띄엄띄엄해지고... 그냥 그렇게 언제 헤어졌는지도 모르게..
이렇게 우연히 다시 와 보니 참 기분이 이상해지면서 왠지 아련해집니다.이 해수욕장 앞바다에 섬이 하나 있었던 건 기억나는데 그게 명선도였네요. 보통 해수욕장 앞바다에 조그만 섬이 하나 있는 건 흔하고 그런 섬은 이름도 없는데 저 조그만 섬은 명선도라는 이름이 있었네요. 그 것도 일출사진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역시 예상대로 바다위로 떠오르는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대신 매우 아름다운 붉은하늘과 붉은바다를 보았으니 그런대로 만족했습니다
저 사진의 왼쪽 바다와 오른 쪽 바다의 파도가 중앙에서 서로 만나 부딪쳐 십자파도를 그리는 모습도 꽤나 유명하다는군요. (그런데 저녁 해질녁의 붉은 하늘은 보통 석양, 노을이라고 하는데, 아침 해 뜰 때 사진처럼 붉은 하늘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저 정말 궁금해서, 검색해보면 아침에도 노을이라고 나오더라구요. '노을'이란 단어는 아무래도 저녁해질 무렵이 더 어울리잖아요? 피지알러님 능력자 많으신데 적절한 표현 좀 알려주세요)
가이드 안내로 아침 먹으러 식당 가는 도중 강변에(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 캠프?도 아니고 모기장하나 쳐놓고 잠자는 커플을 보았습니다.
모기장밖에 커다란 남자슬리퍼하나 여자샌들하나 있는 걸 보니, 아마 야외에서 밤하늘 별을보며 파도소리 들으며 응응... 하는 걸 즐기는 연인인 모양인데, 다른 곳도 아니고 이미 개장한 해수욕장인데 사람들이 새벽에도 왔다갔다 하는 곳인데,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정리하시지...
아침먹고 드디어 대왕암보러 갑니다. 중간에 ‘슬도’라는 곳에서 내려 드라마 ‘메이 퀸’ 촬영장소라는 아름다운 풍광과 거문고소리가 울려나오는 등대도 보고, 그 곳에서 해안길을 걸어서 대왕암까지 갑니다. 이럴 때가... 저는 제일 행복합니다.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햇볕을 느끼고 바람을 느끼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이, 천천히 걷습니다.
여행사에서도 시간을 아주 넉넉히 줬습니다. 30분이면 갈 거리를 1시간 반!
도중에 백도라지 밭을 지납니다. 바닷바람에 흔들거리는 하얀 도라지꽃들이 아름답습니다.
멀리 대왕암이 보입니다. 대왕암과 연결 된 다리를 1995년 현대중공업에서 공사했다는군요. 바위색깔이 밝은핑크색으로 독특하게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제가 아는 대왕암은 중앙에 열십자 모양으로 바닷물이 통하게 되어 있는데? 그런 광경 보이지가...?? href="htt
놀랍게 바위틈에 고양이가 있습니다. 고양이에게 시선과 생각이 뺏깁니다. 아니? 한 두마리가 아닙니다. 아니 아니 많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고양이가? 뭘 먹고 살까? 물새알이나 작은 물새들을 잡아먹고? 그래서 물새들, 갈매기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가 봅니다. 그렇다 해도 먹이가 부족할텐데 어떻게 저렇게 많은 고양이들이? 보니까 바위 여기저기에 사료가 놓여져있습니다. 누군가... 저 자비로운 사람은 자신이 물새들을 몰살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지요? 개념없는!... 아니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물새 똥들 때문에 바위가 더럽혀져서 일부러 고양이를 키우는지도...
이런 게 혼자 다니는 여행의 즐거움입니다. 혼자 벼라 별 오만가지 생각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마눌님 모시고 다니면 꿈도 못 꿉니다. 언제나 모든 신경, 안테나는 마눌님의 기분에 맞춰져 있어야 한다는, 그래야만 여행이 무사히 끝나고 방긋 웃으면서 집에 돌아 갈 수 있다는...
대왕암을 다 둘러 봤는데도 아직도 아침 아홉시입니다. 가이드는 이 곳에서 열시오십분에 만나자고 했는데... 하릴없이 나무 그늘아래 바위에 앉아 막연히 대왕암 바라보며 쉽니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갑니다.
고개 들어보니 다음 코스라는 ‘울기등대’가 소나무 사이로 보입니다. 천천히 걸어 올라갑니다.
울기등대 입구 양쪽에 기울어진 기둥처럼 세워져 있는 고래 턱뼈
울기등대의 우람한 소나무 둥치
울기등대는 가이드 말로는 한국최초의 등대라는데, 들으면서 설마 한국최초일까? 했는데, 역시 안내판에는 ‘울산지역’ 최초 등대라고 적혀있습니다. 둘러보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노인 human pattern과 노인과 바다에 대한 안내판도 읽어보고...(뜬금없이 왜 저곳에 노인과 바다가 있을까요?) 하다보니 열시가 되어 갑니다. 아까 보았던 바닷가 해녀들이 장사하는 곳 같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조금전에는 아무도 없고 천막으로 덮여 있었지만 이 시간이면 누군가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역시나... 해녀할머니들이 이고지고 나타납니다. 한분을 붙들고 먹을거리 달라고 합니다. 해녀할머니는 다른 해녀할머니에게 손님 뺏길까봐 서두릅니다.
바닷물속에 감춰두었던 석화자루를 끌고와서 몇 개 까줍니다.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처음보는 크기의 석화입니다. 보통 자연산 굴은 조그맣고 양식굴이 크다 라는 상식이라 “이거 양식이에요?” 물어봅니다. 양식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크게 키우지는 못한다는게 상식인데 말입니다. 무식이 용기지요. 자연산으로 바닷속에서 10년 이상 자란 석화 - 굴 - 이라네요. 역시 한입에 먹기에는 너무 크니까 칼로 여러토막으로 잘라서 줍니다. 멍게하고 해삼 섞어서 이만원이랍니다. 참소라도 섞어 달라니 겨우 소라하나 썰어넣고 삼만원이랍니다.
어쨌든 마수걸이일테니 할머니 기분좋으라고 비위 맞춰주면서 급하게 먹고 가이드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갑니다.
‘대왕암 공원’이라고 돈 들여 조성한 곳의 주차장으로 나와 이동하기 전 화장실에 들렀더니 벽에 이런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역시 부유한 도시는 화장실도 유머가 있네요. 버스기사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사는 도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는데 저는 울산과 거제도가 매년 순위를 번갈아 오르내리고 있다고 했고 버스기사는 여수도 산단이 있어서 포함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수도 만만찮게 돈 흐름이 좋은 곳이랍니다.
가이드가 데려간 식당 - 여행 코스에 포함 된 - 점심식사는 맛있었습니다. 여행사에서 조사한 메뉴니까 우리가 단독 여행가서 무작정 들어가는 식당보다는 아무래도 더 맛있겠지요.
점심 후 마지막 코스인 경주의 ‘주상절리’ 보러 갑니다. 이동하는 버스안에서 가이드는 폭탄같은 발언을 합니다.
“지금 보고 온 대왕암은 울산의 ‘대왕암’이라고 경주의 ‘대왕암’이 아니”라고
이게 무슨 말입니까? 대왕암이 경주와 울산에 따로 있다니... 대왕암이라면 당연히 경주의 바닷가에 있는 문무대왕릉이라는 대왕암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가이드 말은 울산의 ‘대왕암’은 문무대왕 '왕비' 의 능이랍니다. 이런 십장생! 이건 ‘사기여행’ 아냐?
이 후 보게 된 경주 바닷가의 ‘주상절리’는 정말 기가막힌 광경 - 용암이 바닷물에 식혀지면서 굳어진 모양인데 마치 통나무처럼 굵은 나무목재들이 오각형 육각형으로(제 눈에는 마치 사각형) 나무 목재들이 쌓여있는 모습 - 저게 돌덩어리라니, 돌덩어리들이 저런 모습이라니... 가지런히 누워서 층층히 쌓여있는 모습, 나선형처럼 부채꼴로 쫙 펼쳐져 있는 모습... 정말 장관이었지만, 왠지 저는 기분이 언짢아서 사진 한컷 누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돌아오면서 생각해보니 울산시가 저렇게 떠억하니 대왕암이라고 표지판도 붙이고 대왕암공원까지 조성해서 운영하고 있는데 설마 대놓고 ‘사기’칠 리가 없지 않을까? 뭔가 대왕암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겠지... 편하게 생각하고 차내 숙면을 취했습니다.
역시 돌아와서 검색해보니 일부 사학자들은 경주가 아니라 울산의 대왕암이 진짜 대왕암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네요. 큭큭큭 (흥! 울산시에서 응응...히히힛)
최근 운동을 무지막지하게 해서 체력이 좋아졌을 거라고 은근 자부했었는데 아니더라구요. 저질 체력은 여전해서 집에 돌아오니 엄청 피곤했습니다. 샤워 간신히하고 짐 정리하고 있는데 마눌님이 생글생글 웃으며 “누구랑 갔어?” 합니다. 누구랑 가다니...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잇는거야? 흠흠!... 저는 그 의심이 재미있어서 더 하라고 대꾸 안합니다. 마눌님이 설마 질투를?... 흐흐흐! 사람이 나이를 먹으니 변하는 것도 있네 그랴.
출발하면서 밤이라 동행들에게 방해될까봐 폰을 무음으로 했다가 아침에 시간 볼 때 전화 온 걸 봤지만 무슨 일 있으면 문자도 했을텐데 없길래 대수롭지않게 생각하고 전화를 안했더니 의심이 들었나 봅니다.
원래 무소식이 희소식이잖아요. 저도 마눌님이 겨울에 멤버들하고 일주일씩 골프 여행 갔을 때나 친구들과 어디 여행가서 중간에 한번도 집으로 연락 안 왔어도 뭐라고 한 적 없습니다. 여행은 모든 것 잊어버리고 과정을 즐기는 거 아니겠어요?
울릉도 여행을 여러번 다녀왔지만 재미있고 추억에 남는 여행은 마눌님과 함께 갔을 때 보다 혼자 갔던 여행이었습니다.
첫 번째 홀로 떠났던 울릉도에서 작가 ***씨의 부친이라는 홀로여행 온 어르신과 입대하기 전 홀로여행왔다는 고려대생을 만나 울릉도 부둣가에서 셋이서 마셨던 술이 즐거웠고
두 번째 홀로 떠났던 울릉도행에서는 역시 혼자 여행 온 비슷한 나이의 사람과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방을 사용하게 돼 만났는데 베트남에서 식품사업을 하고 있다고, 베트남은 원래 식품사업은 외국인에게 허가하지 않는데 어찌어찌해서 하고 있다고, 집안일로 부인과 함께 귀국했는데 부인은 친정집에서 쉬고 있고 자신은 이렇게 기간동안 정처없이 고국을 돌아다니며 사진찍고 있다고... 같이 울릉도의 특산 홍합밥, 따개비밥을 먹으며 나누었던 대화 들...
사실 울릉도 그렇게 여러번 갔던 이유는 - 마눌님과 두번, 혼자 두번 - 독도에 가보기 위해선데 아직 독도를 못 가봤습니다. 모두 기상이 맞지 않아서... 조만간 또 갈 계획입니다. 독도 가 보는 것도 버킷리스트.
여행은 역시 혼자 떠나는 게 좋다며 지인들에게 얘기들을 해 주면 십중팔구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 사람들과 그 후 연락하냐”고 그러면 저는 대답하죠 “여행은 여행으로 끝내는 거”라구요. 연락처를 묻지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음 주말에 홀로 여행, 한번 떠나 보시지 않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