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판
:: 이전 게시판
|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5/08/11 19:42
예전에 보신 글이 어떤 것이었나요? 제가 참고한 텍스트는 참고문헌 리스트에 있는 게 전부이고, 주로 참고한 책은 참고문헌 리스트 중 강명관 선생님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입니다. 페이퍼 형태로 제출할 땐 인용한 부분이나 기록의 출처 부분에 각주를 달았는데, 여기에 옮겨쓸 때는 각주다는 법을 몰라서 각주를 전부 지웠습니다.
15/08/11 20:09
pgr21에서 봤어요. 기술의 진보가 반드시 대중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고요. 기술은 그자체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환경역시 중요하다고요. 그예로 직지심체요절을 들었거든요. 왜 조선은 금속활자가 대중화돼지 못했는가? 다만 그게 글인지 댓글인지 글이면 제목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나네요.
15/08/11 17:37
근데 에칭 기법을 활용한다면 페이지 단위로 만든다고 쳐도 목판인쇄보다 금속판인쇄가 훨씬 더 빨리 만들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옛날에는 에칭 기법이 없었을까요? 중세시대 검 같은거 만드는거 보면 에칭 기법으로 장식 문양을 만들고 뭐 그랬다는거 보니까 에칭 기술이 아예 없던건 아닌데.. 에칭으로 금속판 만들어서 인쇄하기엔 비용이 너무 비쌌던건가...
15/08/11 17:39
그리고 전에 읽었던 글을 보면 중세 유럽쪽 사회적 조건 중에 금속활자 기술로 성경이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일반인도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게 됨에 따라 경전을 직접 읽을 수 있고 맘대로 해석할 권한을 가지고 있던 성직자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고 교회의 세력 약화로 이어졌다는 내용도 기억이 나네요.
15/08/11 19:45
결론에 적었듯이, [우리가 어떤 사건의 역사적 영향력을 평가할 때, 대응되는 단일한 사건들을 일대일로 단순비교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교에서는 해당 사건이 위치한 복잡한 사회적 맥락 또는 의미를 삭제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고찰은, 한국의 금속활자술이 비록 구텐베르크의 발명만큼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진 못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그 나름의 역할 및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더욱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15/08/11 17:54
문자차이가 결정적이었을 것 같아요. 기술적차이도 컸지만, 필요가 기술을 낳는다고 효용이 더 컸다면 기술도 빠르게 따라갔겠죠.
그럼 쿠텐베르크의 인쇄술보다 나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서양의 활자술과 나란히하는 동양의 활자술로서 자리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되면 지식이 전파되는 속도와 범위, 양이 모두 증가했을테고, 이는 충분히 세계역사를 바꿀 수 있었을 것 같네요.
15/08/11 17:57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이 글을 보니 기술이 독점적으로 발전한 것과 경쟁적으로 발전한 것에 대한 차이에서 오는 발전의 양상을 비교해 보고 싶어지네요.
15/08/11 18:02
내러티브, 사상과 종교에 대한 욕구는 인류 보편적 욕구입니다. 동, 서양에서 형태는 다를지라도(ex 드라마 -판소리, 성경 - 사서삼경) 결국 본질은 '진리의 추구'와 '정보의 습득' 이라는 것에서 같지요. 다만 조선의 궁궐에서는 인쇄술 테크 찍을 타이밍이 아니라고 - 바꿔말하면 [수요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은 대항해시대가 도래하면서 '정보의 습득'에 대한 수요가 어마어마하게 커진 반면 중국에서 일어나는 비단의 시세변동이나 일본 은채굴량에 대한 정보가 조선 국정에서 가장 중차대한 정보였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15/08/11 20:00
정보 습득 욕구 자체의 증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못해보고 있었네요. 다른 분들이 댓글에서 언급해주신 것처럼 종교개혁과 인쇄술의 연관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편인데, 다른 한편 대항해시대와 도서시장의 연관도 파헤쳐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만 무슨 책을 봐야 할 지...)
15/08/11 18:08
얼마 전에 '책의 문화사'라는 책을 읽고 알게 된 점은....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15세기 후반의 유럽에는 '서적산업'이 어느 정도 자리잡혀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피렌체 같은 곳에서는 개인도서관에 장서를 모으는 일이 빈번해서 필사공장을 만들어서 책을 파는 서점들이 있었고 유럽의 필사가들과 필사화가들이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다네요. 제지공장과 양피지공장이 어느 정도 판매를 예상할 수 있었고, 장사수완이 좋았던 모 서적상은 유럽 각국에 책을 공급하고 교황청 도서관 건립사업을 하며 도시의 엘리트 취급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구텐베르크도 돈까지 빌려서 사업을 할 생각을 했겠구나 하고 납득이 가더군요.
15/08/11 19:51
오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저도 시장의 활성화 유무가 인쇄술의 활용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해주신 책도 한번 찾아보고 싶네요.
15/08/11 20:56
제가 쓴 내용에 살짝 오류가 있는데 그 서적상이 교황청 도서관 건립사업을 한게 아니라 '교황청에도 책을 공급하고, '메디치' 가문의 도서관건립사업에 참여'한 걸 제가 헷갈렸네요. ^^;
15/08/11 18:22
조선에서는 출판산업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고, 책을 생산해서 사고 파는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가장 큰 한계였던 거 같아요. 일단 초보적인 시장경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제약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통되는 서적은 모두 국가가 독점적으로 생산한 것이었고, 이마저도 구입하기 힘들어 사람들이 필사해야 했죠. 이른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책이 필사가 아닌 <출판>된 것도 조선시대가 아니라, 구한말/일제강점기 때였으니...
일본 같은 경우 <출판시장>이 존재했고, 그 덕분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이 1867년에 이미 공식적으로는 15만부, 비공식적으로는 25만부 팔렸던 것이죠. 사실 지금도 책 25만부를 파는 게 쉽지 않은데...
15/08/11 18:29
조선시대의 활자는 아무리 혁신된 기술이라도 사회 여건이 맞지 않으면 사장된다는 법칙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에서 발굴된 파에스토스 원반이 대표적인 사례죠. 기원전 1700년대에 만들어진 파에스토스 원반은 세계 최초의 인쇄물이라는 엄청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이 그 가치를 알아차릴 만큼 성숙하지 못했기에 그대로 사장되었죠. 조선시대의 금속활자는 인쇄매체의 한자사용이 일반적인 사회 분위기와 시너지를 내지 못했기에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발행하던 조보朝報라는 것이 있었는데, 조보는 왕의 칙령이나 조정의 중요 공지사항들을 적어서 반포하던 종이로 오늘날 신문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최초 등장하는 것이 중종 때이고 그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분발分發이 태종 때부터 있었으니 조선 초기부터 존재했다고 추측이 됩니다. 민간에서는 이 조보를 필사하여 돌려 보며 과거시험이 언제고, 조정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논하던 기록이 전합니다. 그런데 이 조보라는 것은 선조 때 "누가 조정의 일을 밖에 전하는가. 이는 필시 이적利敵이다"라는 선조의 격노로 인해 관련자들이 귀양가고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지배층은 피지배층이 더 똑똑해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아마 금속활자가 한글사용과 시너지를 내서 민간에 보편화됐다면.. 어디서 적을 이롭게 하느냐며 조보의 사례처럼 지배층이 발끈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5/08/11 19:55
재미있는 사례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지배층은 언제나 피지배층이 지식과 정보를 더 갖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데, 유럽의 경우 그 제지를 시장경제의 힘(그리고 많은 분들이 추가로 지적해주셨듯이 종교개혁의 파급력)이 뚫어내버린 것이겠죠. 한국의 경우 중앙정부의 힘이 너무 강했던 것이 지식정보기술의 활용을 막았던 커다란 요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기에 정부의 힘이 약해졌을 때 외세의 침입 없이 한두 세기 정도 더 시간이 흘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15/08/11 20:03
인쇄기술 자체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조선도 활자 가지고 그냥 논 건 아니고 교열방식이 인쇄방식은 꾸준히 계량을 했으니까요. 문제는 앞선 댓글들에도 말이 있지만 전체적인 상업 발달에 따른 시장 유무죠. 거기다 문자 차이에 따른 활자 제작의 난이도 차이가 더해지는 거고요.
조선은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 활자를 만약 만들려고 하면 몇천자 몇만자 형틀을 만들어야 하는데다 그렇게 비용과 시간을 들인다 해도 뽕을 뽑을 데가 없습니다. 특히 저 제작 비용 때문에 조선 후기에 상업 출판 시장이 생긴 다음에도 민간에선 목판인쇄가 주류였지 활자인쇄는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일단 48개 형틀만 있으면 활자를 만들 수 있으니 제작 비용이 엄청나게 차이나죠. 거기다 기존 출판 시장만이 아니라 딱 때가 종교개혁으로 싸운다고 여기 저기서 성서 읽는다고 난리 났을 때니까, 금속활자 인쇄가 있더라->보니까 투자 좀 하면 나도 만들 수 있겠다->만들어서 성서만 팔아도 본전은 한참 뽑는다 식으로 돌아가니 너도 나도 활자 만들어 출판 시장에 뛰어드는 거죠. 거기다 성경 아니라도 라틴어 책 찍으면 유럽 단위로 팔아먹을 수 있으니.
15/08/11 20:21
그렇군요. 사실 초창기 금속활자 말고, 그 이후의 기술적 발달에 대해서는 상세히 읽어본 바가 없었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역시 이 주제에 있어서는 기술 자체보다는 기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을 좀 더 파헤쳐봐야겠군요.
15/08/11 21:02
한자라는 문자 자체의 결함도 충분히 치명적인 부분이 있지만 그보다는 문자의 쓰임이 어떠하였는가, 인쇄술이 무엇을 위해 쓰였는가에 더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구텐베르크 이후 유럽에서는 무려 번역된 성경을 찍어낼 수 있었죠. 수도원 담장에 갇혀 있었던, 그래서 성직자의 입을 통할 수밖에 없던 것들이 수도원 바깥으로 빠져나와 신과 일반 사람들을 직접 매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총균쇠에서 유럽이 중국보다 앞서가기 시작한 이유를 중국보다 덜 조직화(? 정확히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네요)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진나라 이후로 거듭 통일되어오며 문자부터 온갖 것들이 하나로 묶여 있던 중국 사회와 달리 각 국가 안에서도 끊임없이 경쟁해야 했던 유럽 사회에서 오히려 기술발전이 요구되고 자극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명나라 때 정화의 원정이 결국 물거품이 된 것을 언급하는데, 조선도 세종 때를 지나서는 학풍이 (적어도 서양의 관점에서는) 퇴보하고 폐쇄적으로 되어버렸죠. 중국과 조선에서는 백성들에게 무언가를 굳이 배포하거나 알릴 필요가 크지 않았을 겁니다. 국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상공인 계층이 성장하거나 종교개혁이 이뤄진다거나 하는 일 자체가 딱히 없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