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이라는 격월간지가 있는데 한 호에 한 인물을 다루며 해당 인물의 삶과 철학을 조명하는 잡지(근데 무슨 잡지가 양장이야...)더라구요.
최근호에 이문열이 나오길래 단물 다 빠진 작가 이제와서 뭐 읽을거리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팬심에 충동구매하고 말았습니다.
책 가격과 두께를 보니 이젠 출판도 창렬출판인가... 그런 생각이... 그래도 소설 필론의 돼지를 만화로 실어놓기도 하고 이문열 부인의 인터뷰도 있고 해서 그럭저럭 만족은 했습니다..
이하 일부 요약발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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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작업은 보통 언제 하나요? 작가마다 글이 잘 나오는 시간대가 있다던데요.
A 항상 시간이 모자랍니다. 아침 가리고 저녁 가리고 할 시간이 없어요.
Q 밤낮없이 쓰면 하루에 원고지 몇 매나 쓰죠?
A 하루에 한 30~50매쯤 써서 세 번 정도 퇴고하면 최종적으로 10매 건지면 좋은 거죠. 그럼 한달에 300매 정도...
젊었을 때는 한달에 5, 600매도 썼는데 그러려면 눈 떠 있는 시간은 다 써야 합니다. 안그러면 절대 못 채워요. 시간을 고르긴 뭘 고릅니까.
Q 책이 3천2백만 부 나갔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A 1998년 즈음에 3천만부 정도였을 겁니다 [불행히도] 삼국지,수호지 쪽에서 2천만 부 나갔고요... 창작한건 천만 부...
그 뒤로는 별로 안팔렸는데 1년에 십만부 정도...
Q 책값 만원에 인세 10%만 잡아도 수입이 300억 원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수입 아닌가?
A 초기 소설 잘 나갈때는 책값이 1500원이었어요. 그걸로 계산하면 훨씬 적겠죠. 그래도 인세 수입이 내가 제일 많을 겁니다.
앞으로도 안 깨질 건데 내 책이 최고라서가 아니라 이제는 책이 안 팔리는 시대니까...
Q 인세를 더 달라고 해도 되지 않나?
A 똑같이 10% 받아도 누구는 10만부 누구는 100만부 팔리는데 누구는 3천부도 안팔려요.
그렇게 차이가 나는데 인세까지 차이가 나서 누구는 10%짜리 작가, 누구는 15%짜리 작가 이렇게 되면 그건 할 짓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Q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뭡니까?
A 사람의 아들이 230~240만부로 가장 많아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비슷하고....
Q 과거에 비해 판매량이 뚝 떨어졌는데 이유가 뭘까요?
A 시장 자체도 줄었고 독자들도 피로도가 있을 거고...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내 독자들은 평균적으로 대여섯권 정도는 읽었을 건데
어떤 작가의 책을 그만큼 읽으면 다 읽은 기분이 듭니다.
Q 정치색에 따른 호오도 영향을 미쳤을 텐데요.
A 책을 불사른다든가 하는 것들도 영향을 미쳤죠. 책이 처음 나올 때 몇 명이 보수 꼴통 이라면서 욕을 하면 그런 것도 영향이 있구요.
Q 학생 운동에 가담한 적이 있나요
A 대학교 때 그런 일이 있었어요. 아버지의 사상을 알기 위해 일본판 사회주의 전집을 구해서 가지고 있었어요. 언젠가 일본어를 배워서 읽으려고 감춰 놨는데, 친구들 중에 일본으로 밀항하다 붙들린 애들이 있었어요. 그때 일본 밀항이 유행할 때예요. 그중에 대학생이 있으니까 두드려 팬 거죠. 이것저것 불다가 내 친구한테 사회주의 사상 전집이 있다. 이리 된 거예요. 그래서 끌려갔는데 기가 막히더라고요. 내가 월북을 해서 6개월간 교육을 받고 그 책을 가지고 내려와서 애들 포섭해서 일본을 통해 월북시키려 했다는 시나리오가 짜여져 있는데 이걸 알리바이 증명을 못하겠더라구요. 그때 휴학하고 놀고 있을 때여서 증명할 데가 없었어요. 용케 무사히 나오기는 했는데 그 뒤로는 데모한다고 하면 아예 학교를 안갔습니다.
Q 직장 다닐 때는 어땠나요?
A 제대하고 학원 선생을 2년 했는데 학원 원장이랑 선생들 눈치 보면 알아요. 어디 갔다 오면 자기들끼리 쉬쉬 하고 그러는거. 형사가 와서 이사람 저사람 묻고 그런 거죠.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은 저 사람 무슨 일 저질렀나 하고 저를 경계하게 되고 아주 불편해지죠. 나중엔 내 나름대로 대응책이 생겨요. 내가 미리 얘기를 해 놓으면 피해가 적죠. 아버지가 이러이러해서 형사가 오는데 그냥 아시는 대로 대답해 주시라고. 그러면 좀 덜하죠. 나중에는 아예 형사한테 제발 좀 찾아오지 말고 그냥 우리끼리 만나자 그랬습니다.
Q 미국에는 어떤 일로 갔나요?
A 한국과 거리두기가 첫째 이유였고.. 두번째는 미국 쪽으로 눈도 뜨고 입과 귀도 틔우는 시간으로 쓰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Q 영어 학원도 다녔나요?
A 케임브리지 시티 안에 있는 모든 어학원에 한국 학생이 50%나 되요. 그러니 내가 창피해서 갈 수가 있나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45분 거리에 사우스 보스턴으로 갔어요. 거기도 학원가가 좀 있는데 한국인이 15%정도 있더라고요. 첫날에 불러서 밥을 사면서 나 여기 온거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6개월을 들었는데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근데 학원 다니는 4시간 빼고 나머지는 한국말로 생각하고 한국말로 말하고 그러니까 결국 영어는 안 늘더라구요. 그래도 작문 선생은 내 영작을 좋게 봤는지 6개월 후 나보고 그러더라구요. '미스터 리. 늦은 것 같긴 하지만 글을 한번 써 봐라.'
Q 전업 작가로 나선다니까 고향 어른들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A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전통적 가치에서 문학 혹은 문장에 값을 쳐주지 않았습니다.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인의 이미지는 <폐허>나 <창조> 동인들... 폐병 걸려서 피 토하고 죽거나 아편 같은거 하는 퇴폐적인 삶.. 또 장부가 글 쓰는 것에 너무 치우치면 큰 뜻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여자들한텐 더 심했죠. 문장이 찬란하면 창부의 본색이라 했으니... 제가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가니까 그러는 거예요.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꼴랑 언문이나 배우러 갔나... 가치 배분이 참 낮았죠. 그래서 처음 작가가 되고는 한동안 고향을 안 갔습니다.
Q 1979년 데뷔 첫해에 중단편을 8편이나 발표했는데?
A 문단에 나갈 때 이미 단편 12개, 중편 5개, 장편 1개를 가지고 있었어요.
Q 등단하기 전에 그걸 다 써놨다고요? 여기저기 투고를 하시지?
A 일종의 비축이었죠. 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런 연마를 통해 글쓰기가 늘기도 할거고...
하나 달랑 해서 다음 작품 낼 때까지 몇 년 걸리면 잡지사도 안 쳐다보잖아요...
Q 외국에서는 어떤 작품이 반응이 좋죠?
A 시인하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비슷할 겁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처음에 우리나라에서 좋은 평을 듣지 못했어요. 80년대 중반에 나왔는데 각박한 시절에 급장이 물러나는 것에 연민을 느끼고 욕하라는데 안 하고... 애매한 입장이죠. 제일 저항했던 놈이 그 모양이고 나머지는 붙어먹다가 나중에 급장이 무너지고 나니까 그때서야 일어서서 저 새끼 나쁜 놈이야 하고. 그걸 80년대 5공에 대입시키면 얼마나 애매해요. 그런데 프랑스 르몽드를 보니까 내가 듣고 싶던 말을 써 놨더군요. 외국인이 보기에 우리는 정치와 문화, 혹은 정치와 경제 사이에 이상한 불합리를 겪고 있는 거예요. 저런 사회에서 저런 경제적 번영이 어떻게 생겼냐 이거죠. 그때까지 운동권이나 민족 문학 쪽에서 이런 문제를 설명하려는 책이 더러 나갔는데,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그런 나쁜 놈들이 있으면 너희 나라는 망해야 되는데 왜 안망했냐 이러면서 헷갈렸는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면서 비로소 한국의 처지를 알겠더라는 거죠.
Q 진보 정권 10년간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는데 전임 두 대통령들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A DJ는 싫었었는데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하면 대단한 사람이예요. 그 사람이야말로 정치 보복을 하면 제일 많이 해야 할 사람인데 옛날에 자기 괴롭힌 사람들한테 보복한게 없어요. 쉽지 않은 일이죠. 노무현은 기존의 권위주의의 틀을 깬 사람이예요. 리더십의 지평의 한계를 넓힌 거죠. 자살에 대해서는 억울한 일이고 동정도 되지만 미화는 불가능합니다.
Q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인가요?
A 우리가 산다는 건 수수께끼를 받으면서 사는 겁니다. 수수께끼에 대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 좋은 책이죠. <천일야화>에서 세헤라자데가 밤마다 얘기를 못하면 죽잖아요. 특별한 운명 같지만 사실 모든 인간은 그런 운명에 자주 빠집니다. 얘기해야 할 때 못하면 죽는 그런 상황... 그 얘기를 배우는 겁니다. 그게 무슨 얘기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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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외에 몰랐던 일화들
1978년 이문열이 만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매일신문 기자 공채가 있었는데 대졸 학력을 요구했다. 이문열은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
학력의 력 자가 이력 할 때의 歷입니까 힘력 力입니까?
수화기 저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묻느냐고 하자 힘력이면 응시하겠다고 답했다.
그래서 필기시험을 치렀고 통과했다.
이문열의 어머니는 남편의 월북 이후 기독교를 받아들였는데 기독교 신자라고 면죄부가 주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연좌제의 폐단에 상당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청년 시절 이념 문제에 몰두했던 이문열은 헤브라이즘을 이해하기 위해서 복음서와 서신서, 신학대사전 등을 읽었는데 그때 생긴 의문들로 사람의 아들을 구상했다.
처음에 썼던 중편은 고대 이스라엘 부분인데 예심도 통과하지 못했다.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이문열은 젊은 신학도와 그의 죽음을 수사하는 형사 이야기를 액자 구조로 넣고 관념적인 부분은 과감히 뺐다.
하지만 민음사의 박맹호 회장이 앞으로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당선작으로 결정했고 이렇게 탄생한 사람의 아들은 230만부가 넘게 팔리게 됨...
1994년 이문열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다룬 희곡 '여우사냥'을 발표했고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 백주기를 맞아 뮤지컬로 각색되었다. 그 음악감독을 박칼린이 맡았고 이 인연을 계기로 박칼린을 모델로 한 '리투아니아 여인'이라는 소설을 쓴다. 이것이 동리문학상을 받음. 명성황후는 2007년 창작 뮤지컬로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넘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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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박근혜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은 없고... 6.25때 가족들이 죽을 위기가 몇번 있었는데 그때 군인 덕분에 살아났었고 그런 경험 때문에 5.16에 별로 반감이 없었다는 얘기는 있네요. 또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건한 그람시의 이론을 예로 들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물리력을 동원하는 기동전보다는 문화적 <진지>를 구축하여 국민의 자발적 동의를 얻는 것이 더 지배력을 발휘하는데 80년대에서 현재까지의 우리나라의 진보진영은 그 <진지전>에서 꽤 잘 싸운 셈이라고 보더군요. 이명박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 그 진지를 탈환하려는데 진지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령관만 보내니 안 쫓겨나면 다행이라고. 물론 이문열은 이 얘기를 진보진영 칭찬하려고 한게 아니라 '그래서 짜증난다'는 뉘앙스로 말한거지만... 킄
>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전통적 가치에서 문학 혹은 문장에 값을 쳐주지 않았습니다.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인의 이미지는 <폐허>나 <창조> 동인들... 폐병 걸려서 피 토하고 죽거나 아편 같은거 하는 퇴폐적인 삶.. 또 장부가 글 쓰는 것에 너무 치우치면 큰 뜻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여자들한텐 더 심했죠. 문장이 찬란하면 창부의 본색이라 했으니... 제가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가니까 그러는 거예요.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꼴랑 언문이나 배우러 갔나... 가치 배분이 참 낮았죠. 그래서 처음 작가가 되고는 한동안 고향을 안 갔습니다.
와 이건 좀 신기하네요. 문학은 그래도 제법 역사가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는데 당시 한국 기준으로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수준이었나 보군요. 거의 오늘날 만화나 게임에 비견될 정도로 취급이 나빴네요. 물론 그냥 돈 안 벌린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