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자영(蔡子英)
원말 명초 시대, 하남(河南) 영녕(永寧) 출신으로 채자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평범한 한족 문인이었던 그는 원나라 지정 연간 펼쳐진 과거제도에서 천문학적인 경쟁을 뚫고 합격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고, 이윽고 뛰어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그런데 채자영이 급제의 영광을 얻어냈던 바로 그 순간은 원나라 패망하고 명나라가 새로 들어서는, 채자영 개인에게 있어서는 불운했던 시대였던 게 문제다. 결국 원나라의 수도가 함락되고 나라가 패망하게 되자, 채자영은 북원의 유력한 장수인 코케 테무르를 따라 정서 지방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북벌하는 명나라의 기세는 끝이 없었고, 결국 정서 지역도 공략 당해 코케 테무르는 달아났고 채자영은 외톨이 신세가 되고 만다.
혼자가 된 채자영은 필사적으로 관중까지 달아났다. 하지만 주원장은 채자영의 이름을 듣고 그를 잡기 위해 초상화를 전국에 배포했다. 전중국이 채자영을 잡으려 들 정도였으니 호사스런 도피 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고, 한때 원나라의 행성참정(行省參政)이었던 그는 이름을 바꾸고 막노동일로 하루 품삯을 벌면서 근근히 살아갈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추격을 피하려던 노력도 헛되어 결국 채자영은 잡히게 되고 말았다. 주원장이 직접 명령으로 채자영을 끌고 오라고 했기 때문에, 채자영은 포승줄에 묶인 채 머나먼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그렇게 채자영이 걸어가던 중, 그는 낙양 방면을 지나게 되었다.
탕화(湯和)
낙양에는 명나라 개국 공신이자 제국의 가장 유명한 장군 중 한 사람인 탕화가 있었다. 탕화는 그 유명한 채자영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자 궁금했는지 그를 직접 보러왔는데, 형틀에 묶인 채자영은 탕화를 보더니 길게 읍만 할뿐 무릎을 꿇으려고 하지 않았다.
깜짝 놀란 주위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채자영의 무릎을 굽히려고 했다. 한데 채자영은 두들겨 맞으면 맞았지 무릎을 꿇으려 들지 않았다. 화가 난 탕화는 채자영에게 소리쳤다.
"건방진 놈! 어디 네 놈 수염에 불이 붙어도 그렇게 뻣뻣하게 구는지 한번 보자!"
탕화는 채자영의 수염에 불까지 질렀으나, 채자영은 꾹 참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당시 낙양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채자영의 부인도 있었다. 채자영이 잡혀왔다는 말을 들은 부인은 어떻게든 채자영을 만나려고 했지만, 채자영은 부인을 피하며 굳이 만나려 들지 않았다.
이런 수난을 겪은 끝에 채자영은 머나먼 길을 지나 드디어 수도, 남경에 이를 수 있었다. 채자영을 만난 주원장을 자영의 형틀을 벗기고, 내심 은근하고 정중하게 위로하며 명나라의 관직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채자영은 듣지 않았다. 그 자리를 떠난 채자영은 따로 글을 작성해서 주원장에게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폐하께서 하늘의 부름을 받아 천하의 군웅을 물리치고 평정하고 사방의 조공을 받는 동안, 신은 붙잡혔을때 탈출하여 솥 안에 든 물고기처럼 남산에서 지냈습니다. 장장 7년을 도주하고 다니면서 추적을 받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굳이 번거롭게 해버렸습니다. 이제 폐하는 천자의 자리에 오르셨으니 어리석은 사람들도 절개를 갖추었고 항복하지 않는 자에게는 벌이 내렸습니다. 폐하의 헤아림이 천하를 가득하고, 신이 받은 은혜 역시 끝이 없습니다. 마땅히 견마와 같이 힘을 다하는게 옳은 도리겠지만, 다만 사람에게는 의리라는 것이 있으니 어찌 처음의 뜻을 바꾸겠습니까?"
"이 몸은 본래 평민 출신입니다. 알고 있는 지식이 부족함에도 과분하게 벼슬이 제후에 이르러 높은 자리를 받아 15년을 지냈으니, 나라의 은혜를 갚는 선비로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더해 절개까지 잃게 된다면, 천하 선비들의 얼굴을 제가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선 근본을 세워 공명정대한 원칙으로 자손, 신하, 백성을 가르치려 하십니다. 한데 거기에 감히 예와 의리가 없음을 바랄 것이며, 포로의 몸으로써 염치도 없이 새로운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과 제가 나란히 같은 반열에 설 수 있겠습니까?"
"신은 오랫동안 밤낮으로 생각하기를 오직 예전에 죽지 못함이 허물에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에 이르러 마땅히 목숨을 끊어 구차한 삶을 마감하는 게 옳으나, 폐하께서 신에게 은정과 예우를 대하셨으니 감히 죽어 이를 욕보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감히 살아서 녹을 먹을 수도 없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신의 뜻을 살피시어 저 멀리 해남 벽지에 가두어 주신다면, 저는 남을 삶은 모두 마칠 것이며 죽는 날이 온다 하여도 지금 사는 날과 다를 게 없을 겁니다."
"옛날의 의인들은 집에서 목을 매어 죽었고 문을 잠그고 스스로 몸을 찢어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이라고 부귀 영화를 싫어하고 죽음을 좋아해서 그러진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비록 몸이 솥에 삶아져 죽는다 하더라도 감히 어길 수 없는 의리가 있기에 그러했던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헤아려 주시옵소서."
주원장은 이 글을 보고, 감탄을 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글을 오랫동안 특별히 보관해야 하는 글이라고 여겨, 특별히 의조(儀曹 예조)에 중히 보관토록 했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뒤, 주원장은 이상한 보고를 받게 된다. 채자영이 있는 곳 근처에서 밤마다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었다. 주원장이 그 이유를 주위 사람에게 묻자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이상한 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그가 옛 임금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원장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이 무슨 수를 쓰든, 이 사람은 결국 얻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문제는 그런 채자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점이었다. 주원장은 고심하다가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1376년 12월, 주원장은 채자영을 무죄방면 했다. 그리고 특별히 그를 변경으로 안내해, 카라코룸으로 무사히 떠나게 하여 채자영이 과거의 주인을 따를 수 있도록 아무런 조건 없이 보내주었다. 결국 채자영은 포로가 되어 명나라 황제의 면전까지 끌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절개를 인정 받아 아무런 조건 없이 북원으로 무사히 갈 수 있게 되었다.
파양호 전투
1363년, 주원장은 마침내 최대의 적수 중 한 사람이었던 진우량은 '파양호' 에서 거의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며 몰락시켰다. 진우량 휘하 수만 명의 군대가 모조리 몰살 당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진우량 본인 마저도 화살을 잘못 맞아 사망 했을 정도니 세력 자체가 그대로 패망한 셈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싸우러 나간 진우량이 있다 치면, 싸우러 나가지 않은 진우량의 남은 가솔과 세력도 남아 있었다. 진우량의 첫째 아들이자 본래 태자였던 진선아(陳善兒)는 이 싸움에 참가했다가 사로 잡혔고, 둘째 아들인 진리(陳理)가 남아 남은 세력을 이끌고 후계자로 즉위했다. 하지만 이후의 싸움은 하나마나한 셈이나 다름 없었다.
주원장 본인이 친정까지 와서 적극적인 공격을 펼치자, 결국 진리는 버티지 못하고 세력을 들어 바치며 항복했다. 항복을 하며 진리는 직접 성 밖으로 나와 주원장을 만나러 왔는데, 생각해보자. 주원장은 진리의 아버지인 진우량도 죽였고, 이제 그 세력도 손아귀에 쥐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진리 따윈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다. 하물며 진리는 본래 태자도 아니었고 어린 아이 였을 뿐이다.
적진 한 복판에서 주원장을 만난 진리는 벌벌 떨면서 겁에 질려 감히 고개를 들어 주원장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런 진리의 태도에 적국의 수괴를 상대하는 주원장의 태도도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주원장은 나이도 어린 진리가 아버지도 없어진 채 저렇게 바들바들 떠는 게 굉장히 안쓰럽다고 느꼈고, 바닥을 기는 진리에게 직접 다가가 부축하여 일으켜줬다. 그리고 두 손을 꽉 잡아준 채 말했다.(太祖見理幼弱,掖之起,握其手曰)
"걱정 말거라. 내가 너를 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니라."
그렇게 진리를 다독인 주원장은, 성 내의 부고(府庫)에 있는 진우량 집안의 재물 중에 진리가 가져가고 싶은 물건은 마음대로 가져가게 했다. 그리고 진리에게 귀덕후(歸德侯)의 작위를 내려 주었다.
진우량은 패망했지만 주원장은 진우량의 집안을 멸족시키지 않았다. 앞서 항복한 진리는 물론이거니와, 진우량의 늙은 아버지인 진보재에게 후작을, 진우량의 살아있는 두 형(진우량의 동생들은 진우량과 같이 파양호에서 전사했다)에게는 백작직을 내려주었으며, 죽은 진우량의 동생에게는 왕위를 내려주고 그 죽은 사람들의 묘당까지 세워주고 제사를 지내고 살게 해주었다.
다만 문제는 진우량의 아들인 진리였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직접적인 핏줄인 진리는 외부에 풀어놓을 경우 남은 진우량의 잔당들이 무언가 계략을 꾸밀지도 모르기에 수도로 끌려온 상황이었다. 아버지도 죽고 본인은 남경에서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으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입장이니 진리는 평소 자신의 상황에 대해 앓는 소리, 죽는 소리, 불평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불손한 소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주원장에게 전해졌다.
틀림없이 주원장의 측근들은 "저렇게 불손하며,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진리를 죽여 없애야" 한다는 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원장은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저 아이는 그저 어릴 뿐이다. 다만 내가 걱정되는 것은 저 어린애를 주위의 못된 사람들이 함부로 부추겨 일을 저지르게 하지 않을까, 그래서 본인의 몸도 건사하지 못할까 그게 걱정될 뿐이다. 그러니 멀리 외국으로 보내 그 곳에서 살게 하는 편이 낫겠다."
그래서 주원장은 진리를 다름아닌 '고려' 에 보냈고, 고려의 공민왕에게 특별히 비단까지 보내서 진리를 잘 봐주십사 하는 의사까지 나타냈다. 고향을 떠나 먼리 타향으로 온 기구한 처지긴 하나, 그래도 주원장 최대 적수의 직접적인 혈육으로서 목숨을 건사하고, 오히려 중국에 남아있는것보다도 안전에는 나은 편이었다. 진리는 명나라 황제의 유지를 받은 고려 - 조선 정부에서도 진리가 삶이 곤궁해지면 따로 땅을 마련해주는등 섭섭치 않은 대우를 해주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다.
이 진리의 후손이 바로 우리나라 양산 진씨다. 주원장의 관대한 처분 덕에 진우량의 후손들이 다름아닌 고려에서 세를 늘려 이어진 것이다.
명옥진(明玉珍)
원말명초 촉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일군 군웅으로 명옥진이라는 사람이 있다. 지방 정권이지만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명옥진은 살아생전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문제는 명옥진이 죽고 나서였는데, 후계자가 된 아들 명승은 채 10살도 되지 않았던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갓난 아이가 황제가 되니 자연히 나라의 상황도 엉망이 되었고, 그 틈을 타 주원장이 쳐들어오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놀란 명승은 달아나려 했으나, 명승의 어머니이자 명옥진의 부인이었던 팽씨가 이를 만류했다.
"우리가 도망을 쳐 하루 이틀 더 버틸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쳐도 얼마를 버티겠습니까? 공연히 그 과정에서 백성들만 다칠 뿐이니, 이미 우리가 패망한 바에야 백성들의 목숨이나 살립시다."
명승은 그 말을 듣고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명승은 패망한 세력의 항복 의사 답게 손을 뒤로 묶고, 옥새의 끈을 입에 물고, 관을 쓰고 어머니 및 다른 가족들과 함께 나왔다. 그렇게 비참한 꼴로 수도로 압송된 명승 일행의 처분에 대해, 이들을 어찌 대접해야 하겠느냐고 주원장이 예를 담당하는 신하들에게 물어보자 신하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옛날 촉나라의 맹창이 송나라 태조에게 항복한 예를 참조하면 될 것 같습니다. 황제께서는 봉천전에 거하시고, 명승 등은 모두 성문 밖에서 엎드리고 신하들이 명승의 대죄를 크게 알려 전하면 될 듯 합니다."
즉 승리자인 주원장이 위엄 있게 자리에 떡 하니 앉아 있다 치면, 저 멀리 명승은 성문 밖에서부터 머리를 땅에 박고 눕고, 그 명승의 앞에서 명나라 관리가 죄를 나열하며 꾸짖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한때 황제였던 자로서는 비참한 처우였다. 주원장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명승은 유약한 아이일 뿐이다! 굳이 그럴 것 까지 있겠는가? 그런 법도는 면해주도록 하여라."
주원장의 지시에 명승은 최악의 굴욕은 면해졌고, 귀의후에 봉해져 수도에서 살다가 이윽고 진리와 함께 고려로 떠났다. 이 명승이 고려 - 조선에 와서 남긴 후손들이 바로 한국의 연안 명씨가 되었다.
명승의 후손인 연안 명씨의 명세빈, 명계남. 주원장이 명승을 살려주지 않았으면 두 사람은 태어나지도 못했다.
원나라 순제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새로 들어서며, 명나라 군사들이 파죽지세로 북벌함에 따라 원나라 황족들은 전부 북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난리통에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어물거리다 명나라 병사들에게 붙잡힌 왕족들도 있었다. 게중에서는 심지어 원나라 순제의 손자였던 매적리팔라(買的里八刺)도 있었다. 어머니가 고려 출신의 권황후였던 매적리팔라는 명나라 장수 이문충의 손에 붙잡혀 수도로 끌려오게 되었다.
명나라 장수의 대승 소식과 더불어 적의 가장 직접적인 황족도 잡아 냈으니, 이는 틀림없이 명나라로서는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수 많은 신하들이 주원장에게 경하의 인사를 올리려 했지만, 주원장은 잠깐 생각하더니 갑작스러운 지시를 내렸다.
"이전, 원나라 조정에 출사하여 녹을 먹던 자. 전부 하례(賀禮) 하지 못하도록 하라!"
원나라의 신하였다가 귀순한 신하들은 축하의 말을 올리지 않아도 되며, 올려서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사로잡힌 매적리팔라는 한때 신하였던 자들이 자신이 사로잡힌 것을 '축하한다' 고 하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었으며, 몸은 명나라에 귀순했지만 아직 마음 속으로는 한때 모시던 원나라 조정에 대해 복잡한 감정인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면서 억지로 '축하합니다.' 라고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매적리팔라가 수도에 도착하자, 일부 신하들은 "매적리팔라를 종묘에 바치자." 는 제안을 해왔다. 말하자면 고대 로마에서 개선식을 열어 위세를 과시하고 승리를 자랑하면서, 포로에게 굴욕을 주는 것과 비슷한 짓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원장은 물었다.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를 정복 할때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런 전례가 있는가?"
"주무왕의 전쟁 때는 있지는 않았지만, 옛날 당나라 태종이 왕세충을 잡아 그리 한 적은 있습니다."
"당태종이 왕세충이 아니라 수나라 황족을 잡았다면 그리 했을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짐은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
결국 주원장은 단칼에 신하들의 제안을 거절했고, 매적리팔라가 최악의 굴욕을 당하는 꼴을 막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지난 100여년 간, 원나라는 틀림없이 중국의 주인이었다. 그대들은 물론이고 짐의 부모 역시 원나라의 다스림에 힘입어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들떠 경박하게 구는가? 이런 짓은 하면 안되는 것이다!"
신하들에게 따끔하게 훈계한 주원장은 도착한 매적리팔라를 숭례후(崇禮侯)에 봉하여 편안히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매적리팔라가 사로잡혀 끌려온지 4년 뒤. 주원장은 북원 황제에게 보낼 편지 하나를 준비하고는, 그것을 매적리팔라에게 맡겼다. 그리고 매적리팔라를 풀어주어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매적리팔라는 가족들의 품에 돌아갈 수 있었고, 북원의 군주였던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 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사례는 중국 역사 전체를 살펴봐도 찾기 어려운 사건일 것이다.
청나라의 조익은 주원장을 가리켜 "명태조는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도적의 성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 라고 평했다. 아마 개국 군주로서의 호걸적 기풍와 훗날 지독한 숙청과 편집증적 증상으로 인한 도적의 성품에 대해서는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현' 의 면모라는 것은 낯설 수 있겠지만, 이런 사정을 알고 보면 그 말도 그리 틀린 듯 하지는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