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바로 러시아의 괴승 라스푸틴이 죽음을 맞이한지 백주년 되는 날입니다.
최순실게이트로 인해 한국내만이 아니라 해외언론에 의해서도 최근 들어 많이 회자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라스푸틴의 행적과 죽음에 관해서는 센세이셔널한 기록들이 워낙에 풍부해 그가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겠지만, 그만큼 그를 둘러싼 일화들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져볼만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라스푸틴의 평전 "Rasputin and the Fall of the Romanovs" 를 쓴 콜린 윌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사의 어떤 인물도 그리고리 라스푸틴만큼 선정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자료로 가득 차 있지 않다. 그에 대한 책이 백권도 더 있지만, 어떤 한 책도 그라는 인간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다. 대부분이 날조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다.” 저자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랑을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는 하지만, 저게 1977년작이니 당시로써는 저런 표현이 어울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라스푸틴의 죽음인데,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버젼은 대략 이렇습니다:
"암살 주모자는 황제의 조카인 이리나 공주의 남편으로 당시 러시아 최대의 유산 상속자였던 유스포프 공과, '검은 100인조'의 창설자 푸리슈케비치였다. 그들은 평소 라스푸틴이 아리따운 이리나 공주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것을 이용하여 그를 암살하기로 했다. 12월 말, 그들은 공주를 딴 곳으로 빼돌리고 공주의 초대장으로 라스푸틴을 유스포프의 저택으로 불러냈다. 1층의 '암살실'은 호화롭게 꾸몄고 식탁 위에는 청산가리를 넣은 과자와 독이 든 포도주를 올려놓았다.
라스푸틴은 유스포프가 친히 모셔왔다. 유스포프는 공주가 2층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는데 곧 내려올 거라면서 그에게 계속 술과 과자를 권했다. 독이 퍼진 라스푸틴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기타를 잘 치는 유스포프에게 집시 노래를 들려달라고 했다. '겁에 질린 암살자'는 기타를 치고 '시체'는 술 마시며 노래 부르는 기이한 광경이 몇 시간이나 계속됐다.
견디다 못한 유스포프가 마침내 권총을 꺼내 라스푸틴을 쏘았다. 라스푸틴이 고꾸라지고 2층에 있던 공모자들이 뛰어내려 왔다. 그때 갑자기 '시체'가 벌떡 일어서서 유스포프의 어깨를 움켜잡더니 견장을 북 뜯어내고는 비틀비틀 옆문 쪽으로 걸어갔다.
푸리슈케비치가 연신 몇 발을 쏘아 라스푸틴을 쓰러뜨렸다. 공모자들은 밧줄로 시체의 양손을 묶어, 얼음을 깨고 강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사흘 뒤 라스푸틴의 시체가 발견됐다. 손을 묶은 밧줄은 풀려 있었고, 폐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사인은 독에 중독돼 죽은 것도 아니고 총 맞아 죽은 것도 아닌, 익사였다. 어쨌든 라스푸틴은 죽었고, 살인자들은 동정적인 여론에 힘입어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26267&cid=43027&categoryId=43027
[네이버 지식백과] 로마노프 왕조 몰락의 에피소드 하나 - 요승 라스푸틴의 전횡(1915년 ~ 1916년) (러시아역사 다이제스트 100, 2009. 7. 24., 가람기획)
게다가 대부분의 기술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라스푸틴이 자신의 죽음 이후 러시아 황실이 얼마 가지 못할거라는 예언을 남겼다는 것으로 매듭을 짔습니다. 이 정도면 괴이한 인물의 후덜덜한 최후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과연 얼만큼이 진실이고 허위일까요?
최근 라스푸틴에 대해 저서를 낸 저자 더글라스 스미스에 의하면 라스푸틴의 죽음에 대해 대중이 친숙하게 여기는 많은 부분들이 라스푸틴의 암살 주도자들이 남긴 진술들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거나 내용 자체의 무게가 가벼워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암살의 주도자로 알려지는 유스포프는 1927년에 회고록을 냈는데 그 당시 러시아 망명 귀족사회에서 이 책은 대필작가가 쓴 것이라는 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1953년에 제목을 바꾸어 다시 한번 회고록을 내기도 했습니다.
첫 회고록에서는 라스푸틴이 총 두방을 맞고 쓰러졌다가 입에 거품을 물며 좀비처럼 다시 일어서서 공격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두번째 회고록에서는 총 한방으로 쓰러졌다가 일어나는 걸로 내용이 바뀝니다. 유스포프를 이를 두고 악마의 환생 또는 사탄의 환생과 같았다는 과장적인 표현을 사용하죠.
암살극의 다른 동조자인 육군 군위관 라조베르트는 사건에 대해 유스포프보다 더 일찍 공식 발언을 남겼는데, 그는 1918년 뉴욕타임즈에게 자신들은 황후를 만나러 가는 라스푸틴을 길거리에서 쏴 죽였다고 하여 사건의 장소가 완전히 다른 곳을 시사했습니다. 훗날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자신이 라스푸틴의 암살 시도에 대해 가책을 느껴, 청산가리를 다른 무해한 물질로 교체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와 달리 푸리슈케비치의 회고록에는 당시 의사였으며, 리버럴한 민주주의자였던 바실리 마클라코브라는 사람이 유스포프에게 청산가리를 제공했다고 적혀 있는데, 마클라코브는 푸리슈케비치의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어 자신은 그냥 아스피린을 갈아서 준 것 밖에 없다고 독살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어떤 암살범의 기술이 신빙성이 있는지 혼란스러울 지경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CSI를 봐서 알수 있듯이 용의자들의 발언보다 죽은 자의 시체를 통한 '소리 없는 증언'이 미스터리 해결의 핵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스푸틴의 부검 책임자였던 코소로토브 박사의 검시 기록은 훗날 레닌그라드 기록 보관소에서 분실되어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다행히도 코소로토브가 1917년에 <러시아 자유지>와 남긴 인터뷰를 통해 라스푸틴의 시체 상태가 어떠하였는지 알수 있습니다.
오늘날 광범위하게 알려진 것과는 달리 코소로토브는 라스푸틴의 몸에서 익사나 독살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라스푸틴의 얼굴과 머리는 심각한 외상상태를 보였는데 머리의 우측은 부서진 상태였고 오른쪽 귀는 머리에서 거의 분리된 상태였습니다. 몸통의 좌측은 아마도 칼에 의해 잘린 듯 개방되어 있었으며 성기는 몸에 온전히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라스푸틴은 몸에 세군데에 총상을 입었는데, 첫번째 총알은 위와 우측 콩팥을 관통, 둘째는 라스푸틴의 우측 콩팥을 뚫고 들어가 척추에 박혔으며, 세번째는 이마 한가운데로 들어가 두개골을 명중시켰습니다. 코소로토브에 의하면 첫째나 둘째 총알만으로도 라스푸틴은 20분내에 사망에 이렀을거라고 합니다.
저 세발의 총알들이 어떤 순서로 발사되었는지 알수는 없지만, 정황상 이마에 쏘여진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볼수 있을 겁니다. 두개골에 총알을 맞으면 즉사가 되버리니까요. 유스포프와 푸리슈케비치의 회고록이 모두 동의하는 점이 푸리슈케비치가 마지막 치명탄을 당긴 사람이었다는 것인데, 최근에 새로 제시된 의혹에 따르면 이 역시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유스포프의 첫 회고록에는 영국어 번역 협력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오스왈드 레이너입니다. 1888년 소박한 영국 가정에서 태어난 레이너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1907년 옥스포드대에 입학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2년 후 유스포프를 만나게 되어 둘은 가까운 친구가 됩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5년, 영국군 장교인 레이너는 러시아의 수도 성 페트로그라드에 영국 정보 요원으로 파견됩니다 영국으로써는 러시아가 동부전선에서 독일을 견제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했는데, 라스푸틴은 니콜라스 2세에게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으라고 설득하고 있었기에, 그는 영국에게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이 정도면 영국이 현장에 배치된 자국의 정보요원인 레이너와 그와 가까운 사이이면서 라스푸틴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유스포프를 선정하여 라스푸틴의 암살을 계획했고, 유스포프를 이 사건의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다는 추측을 해볼수 있는데, 이는 실제로 2007년 영국의 저자 앤드류 쿡이 자신의 저서 "To Kill Rasputin"에서 내세우는 가설이기도 합니다.
앤드류 쿡은 법의학적 총기 실험을 통해 검시사진 속 라스푸틴의 이마에 남은 1.3센티미터 가량의 총상이 당시 푸리슈케비치가 사용했다고 주장한 32구경 권총의 총상 흔적 보다는 크고, 455 웨블리 리볼버 총상 흔적과는 유사하다는 결과를 얻어냅니다. 455 웨블리는 당시 영국장교들이 휴대했던 총기였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영국이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와는 별개로, 12월 18일 주러시아 영국 대사인 뷰캐넌이 비밀전보에 "일주전에 나는 젋은 대공들과 가까운 친구로부터, 젋은 장교들이 그
[라스푸틴]를 올해 말 이전에 죽이기로 맹세했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남긴 발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이미 암살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 비밀전보는 오늘날 영국 국가기록 보관소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유스포프는 자신의 두번째 회고록에 17일 밤 "그
[레이너]는 우리의 음모에 대해 알고는 소식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나는 서둘러 그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유스포프의 첫번째 회고록 집필 당시에는 영어 통역 담당이었던 레이너가 감수역활을 하여 영국과 자신의 역활을 숨겼지만, 레이너의 개입이 없었던 두번째 회고록에서는 제어되지 않은 유스포프가 입방정을 놀렸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보면 영국이 라스푸틴 암살 계획에 대해 단순히 알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들이 직접적으로 개입이 되어 있었던건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917년 1월 7일자로 레이너의 상관이 영국 정보국 본부에 보낸 비밀 문서가 최근 공개되었는데 이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문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이 완전히 계획한대로 진행되지 않았으나, 목표는 확실히 완수했다. 배후의 개입에 대한 불편한 질문들이 주어지기는 했으나, '다크 포스'의 죽음에 대해 모두에게 좋은 반응을 받았다.
남은 일들은 레이너가 마무리짓고 있다."
스웨덴에 있는 독일의 정보 요원들이 본국에 올린 보고서에는 라스푸틴의 암살이 벌어진 날 한 젋은 영국인이 유스포프의 집안에 있었다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훗날 영국에 돌아간 레이너는 가족에게 총알을 하나 보여주면서 그것이 라스푸틴을 죽이는데 쓰였고 자신이 현장에 있었다고 고백(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레이너는 1961년 사망을 했는데 그는 자신의 개인 문서들을 모두 태웠고 그의 외동아들도 4년 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라스푸틴이 황제에게 남긴 "저의 죽음을 가져온 사람이 황제의 친척이라면 황제의 자녀들과 친척들은 2년 내에 모두 죽을 것입니다"라는 예언은 진위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쯤되면 감이 오시겠지만 이것도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은 조작에 가깝습니다. 라스푸틴의 필체가 담긴 이 예언의 원본은 아직도 발견이 되지 않았고, 그의 문체를 연구한 사람들에 의하면 라스푸틴이 남긴 다른 글들과 윗 예언은 필체와 문법이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처음 이 사건에 대해 파해치기 시작했을때는 단순히 기존의 라스푸틴 암살과 관련된 센세이셔널한 스토리들의 허와 실을 파악한다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예상했던대로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많았는데 파고 들면서 보니 암살과 관련해 새로운 가설이 있었다는 점에서 놀랐습니다. 저에게는 꽤나 신빙성 있게 보이기도 하고요. 여러분들께서는 영국이 과연 라스푸틴 암살의 배후에 있다고 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