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베게 출판사, 『누르하치 - 청제국의 건설자』 (원제 노이합적 사진)
천제셴 대만대 역사학과 학과장, 한국 원광대 명예박사 저 pp.354 ~ 359 中
……거의 모든 사서(주 : 조선과 명나라 문인들 기록들 외에 청나라 쪽에서 남긴 기록들 포함)에서는 누르하치가 '학살을 즐겼다' 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이런 기벽이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믿을 만한다. 당시의 명나라와 주변 민족들 역시 이에 대해 하나같이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던 것 같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굳이 후금의 '적국' 이었던 명나라의 (편향되었을) 기록을 들 필요조차 없다. 조선 사람들이 친히 보고 들은 기록이나, 누르하치 치하의 칸국에서 관리를 지낸 한족의 기록만 봐도 전체적 상황을 파악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조선의 서생 이민환은 후금에서 포로로 '죄수' 생활을 했다. 그는 나중에 귀국하여 저술한 『책중일록(柵中日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르하치 추장은 됨됨이가 의심이 많고 사납다. 또 권위적이면서 포악하다. 비록 부인이나 평소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조금이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바로 살해한다.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다. 」
이 때문에 그는 누르하치가 '동생(슈르하치)를 죽이고 그 부대를 합병했다' 고 생각했다. 동시에 큰아들인 '홍파도리(저영)' 도 누르하치가 살해했다고 굳게 믿었다.
후금에서 관리직을 지낸 한족 유학성의 지적도 참고할 만하다. 천명 11년 누르하치가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그는 누르하치에게 올린 글에서 패전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한족을 마구 살해해서 어찌하려 하십니까? 그들을 살려 남겨두는 편이 여진에게는 훨씬 유리합니다. 영토를 점령한 다음에 옛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파괴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대책일 것입니다."」
유학성은 누르하치가 병법을 바꾸어 다시는 한족 주민을 살해하지 말기를 건의하며, 그의 버릇이 패배를 가져왔다고 책망한 것이다.
한족 출신의 또 다른 관리가 누르하치 사후 신임 대칸인 홍타이지에게 한 말도 있다. 『천총조신신공주의』의 기록에 따르면 그 관리는 은근히 누르하치를 비판하며 이렇게 지적했다.
「"이전의 대칸께서는 의심이 많아 살인을 너무 많이 저지르셨고, 민심을 얻는다는 것을 모르셨습니다. 하늘이 대칸께 요동의 영토만 허락하신 것은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이 기록들은 그가 살인을 좋아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드러낸다. 예를 들어, 그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시대를 보면 이때부터 그의 그러한 성격이 드러난다. 아이혼성 전투에서도 그는 성을 점령한 뒤 그 안의 한족을 거의 다 살해했다. 겨우 살아남은 몇몇 부상자에게는 화살촉으로 상처를 다시 찌르면서, 요동 변방의 명나라 관리들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실로 극도의 잔인함이었다.
합달 부족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누르하치는 성을 함락한 다음 무릎을 꿇고 들어와 자신을 알연한 합달 패륵 맹격포록을 거둬들이고 성채의 항복도 수용했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그러난 나중에는 맹격포록을 채 안에 안치한 후 죄를 뒤집어씌어 죽였다. 투항한 자신의 사위도 죽인 것이다.
엽혁 부족을 소멸하는 전쟁에서, 서성을 굳게 지키던 엽혁 패륵 포양고는 최후의 결사 항전을 준비했으나,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인 대패륵 대선이 '항복한 당신을 죽이면, 그 화가 나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라고 맹세하며 투항을 권고하자 마음을 바꿔 대선과 하늘을 우러러 술을 마신 후 투항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포양고가 이용 가치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그를 목 졸라 죽였다. 하늘을 우러러 맹세한 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살인을 즐기는 누르하치의 기벽과 천성을 보여주는 사례는 끝이 없다. 청하 전쟁 떄 명나라의 "군민 약 1만 명이 누르하치에 의해 모두 살상되었다." 라는 기록이 사서 곳곳에 등장한다. 개원 공방전에 대해선 조선의 이민환이 남긴 기록이 있다.
「누르하치가 개원을 함락하고서, 학살한 주민이 무려 6 ~ 7만 여 명에 이른다」
철령이 점령당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성안의 남녀 주민 다수가 학살당했다. 심양 전쟁에 대한 『만문노당』천명 6년 3월 13일의 기록에 따르면, 팔기군은 성 함락과 동시에 명나라 병사와 주민 7만 명을 살해했다. 서평보 전투에서는 후금 부대의 피해가 막중했던 만큼 처참한 보복성 학살이 진행되었다. 이에 대해선 『명희종실록』 천계 2년 정월 정사의 기록이 있다.
「서평에서 누르하치가 군민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학살했다.」
누르하치가 대패를 겪었던 영원성 전투 때는 참패에 따른 수치심과 치밀어오르는 화가 학살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퇴각하는 길에 순전히 학살 목적으로 명나라 부대 군량미 저장소인 각화도 공격에 나선 것이다. 각화도의 명나라 수군은 후금의 상대가 되지 않는 전력이었으나 팔기군은 섬에 상륙한 후, 수군은 물론이고 상인과 주민 3만 여 명을 영원성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모조리 학살했다.
누르하치는 한족을 통치하다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경우 '보이는 한족을 모조리 학살한다' 는 생각을 진지하게 실천했다.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까지, 요동과 요서의 많은 한족들이 저항 운동에 나서 제법 큰 규모의 무장 항쟁들이 있었다. 누르하치는 이런 무장 세력들에 대해 절대로 관대로 처리대신 모조리 죽이는 쪽을 선택했다.
철산과 동산의 광부들만 1만 여 명이 살해를 당했다. 특히 탕참보 같은 곳은 무장투행 대신 소극적 도주만 일어난 곳임에도 불구, 1만 여 명이 살해 당했다. 천명 7년에는 대선이 다시 의주에서 한족 3천 여 명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천명 8년 6월, 복주에서 한족 출신 장정의 수를 속여 보고하는 일이 발생하자 누르하치는 장정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다. 이보다 훨씬 격렬한 무장 투쟁이 발생했던 개주, 금주, 해주, 진강의 참상은 말할 것도 없다.
누르하치 통치기 만년에, 후금은 극도의 정치적 불안과 식량의 절대 부족으로 대단히 심각한 위기에 몰려 있었다. 누르하치는 사태를 해결하는 대신, 이 모든 책임을 한족에게 돌려 불만세력들의 시선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그는 한족이 적이냐 우군이냐의 기준을 '식량의 유무' 로 규정하도록 했다. 즉 '식량이 없는 한족은 적' 이라 말한 것이다.
후금 관리들은 실제로 이 원칙에 근거해 팔기군이 함락한 지역의 한족을 조사, 식량이 있는 가정과 없는 가정으로 나눴다. 이는 "대여섯 되의 식량과 가축이 있어 생활이 가능한 사람은 식량이 있는 호구에 편입시켜 거주하는 곳에 계속 머무르게 하고, 이에 해당하지 않으면 식량이 없는 호구에 편입해 등록한다." 라는 기록에서 드러난다. 누르하치는 무순과 철령, 개주 등지에서도 이런 조사를 대대적으로 행했다. 식량이 있는 호구는 북으로 이주시켜 땅과 거주할 집을 줄 것이라 했고, 식량이 없는 사람들은 체포해 처분을 기다리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식량이 없는 가정의 장정들은 모조리 학살되었다. 식량이 있는 사람들이 북으로 이주하는 일도 없었다.
천명 10년 10월, 누르하치는 '살려둬서는 안 될 한족' 을 가려내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직접 총병관 이하의 관원이 자기 관할의 촌과 진으로 가서 직접 학살 대상자를 선발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명나라의 전직 관리, 수재, 대부호와 후금에 복종하지 않는 독신 남자를 비롯해 의심스러운 이들은 모조리 학살했다.
누르하치는 한족에 대해 씻을 수 없는 확실한 원한이 있었다. 한족 학살이 그에게 있어 불변의 정책이었던 것이 이해의 소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자신이 아끼던 주변 사람들조차 어렵지 않게 죽이곤 했고, 친인척에게도 사정이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동생과 큰아들을 죽였다. 만주문자 창제를 비롯해 여러 공이 혁혁한 창업 동지이자 신하인 갈개와 파극십액이더니 역시 좋은 최후를 보지 못했다. 갈개는 반란을 꾸몄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처형 당했고, 파극십핵이더니 '뇌물을 받았다는 판결을 받고 사형 당했다.
그 뿐만 아니라, 조선의 병사들 역시 학살당했다. 사르후 전투에서 투항했던 조선 군인 3 ~ 4천 명 중에 1천 명은 조선 정부가 동맹 제의에 즉각 화답하지 않자,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명목으로 학살되었다. 이런 사례를 보았을때, 누르하치는 '학살광' 이라는 평가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