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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11/15 05:00:27
Name 와인하우스
Subject [일반] 재미가 없다.


일기, 잡설에 가까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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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헌정사, 아니 정부수립 이래 가장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마 유사 이래로 따져 봐도 손에 꼽을 만한 사건일지 모른다) 일어나서 정치글도 세심히 읽고 뉴스도 열심히 보며 잠깐이긴 했지만 집회도 나간 모범시민이 되었지만, 사실 나는 별로 정치에 관심이 없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정치권의 각종 사건 및 활동과 정치 인사들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것들은 이 사건 이전까지 정말로 단순 흥미에 불과한 것이었고, 지금도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분배’가 나의 삶이나 혹은 사회 전반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정치 행위와 정치권에 대한 나의 관심은 역사책이나 사극을 볼 때의 느낌과 비슷한 것이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대개는 그 자체로 재밌어서 보는 거니까.


  기본적으로 나는 자유주의자, 즉 리버럴이다. 전형적인 리버럴과는 좀 거리가 있다. 어렸을 때는 아나키즘을 꽤 열심히 파고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염세주의적 성향이 강해지며 사람 대 사람, 혹은 집단 간의 연대를 믿지 않게 되었고, 반면 자본주의가 대중문화 발전에 끼치는 영향을 깨달아 지금은 ‘캐피탈리즘 호!’를 외친다. 소녀시대만 있으면 사파티스타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린 시절 공부하던 아나키즘이 내게 남겨준 것은 국가주의에 대한 극도의 반감, 막스 슈티르너에서 니체로 이어지는 에고이스트 정신이다. 다만 그것들은 사회 체제를 구성하는 데에는 무력한 것이 사실이고, 연대를 믿지 않는 고독한 인간으로 살아가기에 자유주의와 현대식 자본주의만큼 알맞은 체제는 없었다. 내가 뭐 진짜 철학자나 초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만큼 나는 성인이 된 후 대부분의 선거에서 민주당계 후보를 찍기는 했지만 결코 스스로를 민주당 지지자로 여기지도 않고 진보정당에 심정적 동조는 할망정 진보-좌파로 나를 규정한 적도 없다. 경제란 사실상 내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었다. 아마 온오프에서 나와 정치 관련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내가 이런 스탠스인지 전혀 모를 것이다. 사실 민주계나 진보계에 그다지 애착이 없는 만큼, 지방선거 정도라면 새누리당을 찍을 의향도 충분히 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독특한 사상을 유지해오면서 느끼는 건 외로움이다. 어릴 때 이상한 책을 읽고 있는 나는 별종 취급을 받았으며, 지금 민주계에 그럭저럭 지지를 보내는 입장에서 논쟁을 벌여도 나와 같은 쪽에서 얘기하는 이 사람이 정말 나의 편이라고 생각하기도, 나의 의견을 반박하는 저 사람이 나와 2차원적인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하기 어려웠다. 말하자면 논쟁을 하다가 필연적으로 내가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를 꺼내야 할 때 말못할 피로감을 느껴왔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 중 국정교과서를 찬성하며, 자기는 인터넷과 사회에서 워낙 성향이 한쪽으로 기울어있기에 반대쪽의 목소리도 들어보려 일베를 한다는 친구가 있었다. 국정교과서와 일베는 진영을 떠나 상식의 차원에서 옹호할 수 없는 문제임은 확실하다. 말문이 막혀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그 녀석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 오유하니?”


  내가 그 녀석의 주장을 반박하는 순간 나는 ‘오유’=‘진보’=‘좌파’가 될 테고, 그 녀석은 나를 소위 ‘깨시민’으로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짜증이 나는 건 나와 친했고 내심 나중에 영리하게 잘 살 것이라 여겼던 친구가 중립적인 체 일베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논쟁을 하는 순간 나는 필연적으로 스테레오타입의 진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지난 토요일에 고민 끝에&얼떨결에 간 광화문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 백만 명에 육박하는 인파가 모인 그 곳은 언론의 표현대로 정말 축제와도 같았다. 음악이 울려퍼지고, 노점상은 촛불이나 먹거리를 팔며,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들도 많이 보였다. 무력 충돌 이전의 2008년 촛불집회도 그랬을까 싶었다. 학생들, 노동조합원들, 일반 시민들은 뭉쳐서 혹은 각자 거리를 행진하며 구호를 외쳤다. 그 전에 다리가 아파 빠져나왔지만, 파도타기 장면이 역사에 남을 아름다운 장면이라는 것 역시 분명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과 행동에 동감하면서도, 학생도 노동자도 아니고 사실은 보통의 시민조차 아닌 나는 그 장소에서 다른 종류의 혼란에 빠졌다.


  박근혜와 그 일당들은 엄정한 처분을 받아야 마땅하며 탄핵이나 하야가 정치적으로 가능한 방안이든 아니든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온당하다. 그걸 명확하게 알고는 있지만, 그 자리에 나의 힘을 보태자고 나서기에는 그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무너지면 시민들(과 야권)이 승리한 셈이겠지만, 그것이 나의 승리기도 한 것일까? 비겁하다면 비겁한 일이다. 골방에서 비웃기만 하는 거냐고 욕해도 사실 할 말은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는 내가 스스로를 민주-진보계는 물론 보통의 한국 시민들과도 동질감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온 탓이다.


  사태가 길어지며 안티 박근혜로서 그의 민낯을 드러낸 것에 대한 기쁨과 이어지는 코미디 같은 상황들을 지켜보며 느끼던 쾌감은 점차 희석되어갔고, 지금은 솔직히 조금 지쳐있다.


  박근혜 게이트에 대한 글들은 동어의 반복이자 각자의 감정 토로의 장이 된 채 교착 상태에 빠져 발전적인 논의는 멈추었다. 비박 역시 봐주지 말고 엄단해야 한다는 글, 박근혜에 투표한 사람들을 공격적으로 성토하는 글 등이 광장을 메운다. 물론 노인 투표권 제한 정도로 너무 나간 게 아닌 이상, 그런 의견들이 잘못되었다거나 무의미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또한 짧게는 지난 10년간 야권과 그 지지자들이 현실적, 정신적으로 구석에 몰려 있던 것도 사실이다. 10년이 아니라 민주계 정부 시절을 따져보더라도 이만큼 민주계가 보수계에 압도적 우위를 점한 적이 있었을까. 그러니 지금은 합당한 그들의 시간일 뿐이다. 하지만 그럴만한 때인 것을 이성적으로 또한 감정적으로 이해는 해도, 야권 지지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나는 지금의 광장이 그다지 재미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이 사람들의 탓이랴.


  항상 나는 리버럴적인 주제를 논하고 싶어 여러 커뮤니티를 떠돌아 다녔지만, 자칭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내가 봤을 때 진짜 리버럴들은 매우 드물었다. 그들 대개는 감정에 많이 휘둘리거나 먹물주의자였다. 그리고 진짜 리버럴들은 유시민처럼 밥맛없는 인간으로 찍히거나 혹은 사안에 따라 이 편 저 편에 붙는 박쥐 취급을 당한다. 사실 리버럴은 다른 진보계나 보수계와 달리 결속력이 약해서, 파이터 기질이 강한 게 아닌 이상 잘 나서지 않기도 하지만. 그저 지금 내가 하나 원하는 게 있다면 지금처럼 민주계나 진보계에 어정쩡한 지지를 보내는 상태에서 꼽사리 끼지 않고 언젠가는 나의 사상적 외로움을 달래줄 곳을 찾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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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omile
16/11/15 05:04
수정 아이콘
3~5번째 문단은 소녀시대만 빼면 저랑 똑같은데요. 크크.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글이 올라왔나 싶었습니다.
Quantum21
16/11/15 05:44
수정 아이콘
외로워 하실필요 전혀 없어보이는데요.

제가 느껴지기에는,

피로하기만 할뿐,
답도없고 ,
사회에 보탬이되는지도 확신할수없는
정치관련 논란들에 대해
적절한 회피스킬로 대응하시는 분들이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최대 지분입니다.

이분들을 새누리냐 아니냐, 보수냐 진보냐로 나누어 보는것은 별 의미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사견입니다만, 제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는 한가지 이유는 진영논리에 매몰되지 않는 이런 막대한 규모의 중도층이 있기때문입니다.
이코님
16/11/15 06:22
수정 아이콘
저 또한 일베하는 친구와 비슷한 이유로 멀어진 기억이 떠오르네요. 일베의 주장에 반대한다 너 오유하니? 이런 타입은 외롭지 않죠. 때론 지쳐서 저런 생각 회로가 부러울 때도 있지만 외로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점화한틱
16/11/15 08:09
수정 아이콘
많이 와닿는 글이네요. 저도 어느 한 진영이 대해 일방적인 지지를 하지 않습니다. 나쁘게말하면 회색분자라고까지 하더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스스로를 사상의 스펙트럼에 놓고 보았을 때 중도우파적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지인들과 얘기나누다보면 언급하신 피로감이 몰려든다는 게 뭔지 많이공감합니다. 수많은 논제들에 대해 어떠한 진영논리로 생각하지 않고 각각의 논제들을 개별화해서 판단하는 저로서는 함부로 어느 정당, 어느 후보자를 일방적으로 지지하기 어렵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답이머얌
16/11/15 08:43
수정 아이콘
공감하는 편인데요...
어느 정당, 어느 후보자를 일방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지만, 일단 새누리는 제껴놓고, 현 상황에서 어느 쪽을 밀어야 하는가 식으로 생각해서 투표하다보면 거의 정해지더군요.

다만 사안에 따라서는 어느 쪽을 밀어야 할 필요없이 스스로의 생각만 가지면 되지만 자기 논리에 구속된다고 하나요? 일단 민주당을 밀었으면 그쪽으로 생각하려는 관성을 스스로 가지는게 힘들더군요,
16/11/15 09:03
수정 아이콘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아직 한국의 민주주의는 많이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면, 한국인 중에 와인하우스님의 광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아니,
그러한 광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수 자체가 굉장히 소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이 소수는, 와인하우스님처럼 철학책을 통해 혹은 해외경험을 통한 선진 민주주의를 접하던가, 등등의
정말 여러 다른 특이한 케이스들이 모인 집합체라고 생각합니다.(그렇지만 여전히 대다수에 비하면 극소수이죠)

맞다 틀리다의 수준이 아닌, '그럴 수 있다'를 인정하는 수준까지 오지 않은 겁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물론 앞으로 차차 나아질거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차차'의 속도감에 대해서는 저마다 주관적으로 판단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나가 최고다!
16/11/15 09:09
수정 아이콘
본인의 사상적 고매함을 믿으신다면 지금이 제일 재밌을 때인데 아쉽네요. 권력을 비웃어줄수있거든요. 절대권력에 대해 비웃을수 있는게 얼마나 큰 자유이며 권리이며 행복인데요~~
아점화한틱
16/11/15 09:26
수정 아이콘
대체로 본문과 동질감을 느끼는 제 입장에서 얘기해보자면 비웃는 건 자유이며 권리인데 행복하지는 않더군요. 국가와 국민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본인도 속해있는 권력을 비웃는 입장이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민주적 절차를 통해 합법적으로 대통령이 된 자가 저모양이라는 사실에 자괴감과 쓴웃음만 날 뿐이죠.
미나가 최고다!
16/11/15 09:42
수정 아이콘
저만의 아나키스트 적인 느낌으로는 권력이 필요악적인 느낌이 있는지라 비웃을 수도 없는 중세시대보다는 지금이 훨씬 상황이 낫죠~
프레일레
16/11/15 12:53
수정 아이콘
비웃는거 행복하지 않습니다
정말 승질만 납니다
이런 상황에 즐거워하지 않으면 대번에 넌 보수냐? 새누리 지지자? 박사모?이럽니다 이렇게 님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저는 글쓴님 언급한데로 스테로타입의 진보 코스프레를 해야 하는 건가봐요
살려야한다
16/11/15 09:40
수정 아이콘
굉장히 공감가네요.
16/11/15 10:11
수정 아이콘
내용의 가타부타를 떠나서,
이런글이 있어야 피지알이죠.
추천박고 갑니다.
아니아니
16/11/15 10:13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 바를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지적하시는 부분까지 전체를 바라볼줄 아는 사람들도 지금은 힘을 모을때라고 판단하고 보태고 있을 뿐인거겠죠. 결코 몰라서가 아닐겁니다. 지금은 그럴때가 아니다. 일단 무언가 이루어낸 다음에 돌아보던지 하자. 정도의 생각은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을겁니다.

아무튼 글 내용에는 매우 공감하지만 어디까지가 제대로된 신념인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질수 없는 수준이고 우리편이면 모조리 땡큐인 상황에 지나치게 앞서가봤자 이게 현 시점에서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인식의노력
16/11/15 11:24
수정 아이콘
그러게 말입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명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야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매우 고무적이고 도취되어 있겠지만, 그들에게 힘을 보태주는 사람들이 단순히 그들의 보고 있는대로 이용되는 사람이라고 단정하긴 어렵고, 글쓴님과 같은 경우도 있는데 말이죠. 물론 와인하우스님과 같은 사람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소수일 것 같다는 느낌은 듭니다만..

대화와 행동은 의도를 갖기에(의도부터 비롯되었다고 봐야겠죠), 상황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것만큼이나 상대방에 따라서 다른 내용의 대화와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그 상대방이 나를 규정함에 있어 '이 사람이 나에 대한 관계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한다.' 라고 인식하기보다는, '이 사람은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구나.' 라는 인식에 멈추는 것이 아쉽긴 하죠. 하지만 뭐 또 그러려니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인식해주는 자들이 마음대로 적과 우리를 구분해서 행동해주는 자들이 결국은 귀찮음을 무릅쓰고 싸워주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프레일레
16/11/15 12:49
수정 아이콘
추천드렸습니다
"스테레오 타입의 진보가 될 수 밖에 없는 점"
"사상적 외로움"
절절히 공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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