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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8/13 18:27:11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한고조 유방이 파탄난 민생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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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고조 유방은 최초의 평민출신 황제로서 중국이라는 큰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의 지위에 올랐던 사람이지만,  유방하면 떠오르는 건 '초한전쟁에서 한나라 대빵하던 사람' 이다 보니, 황제로서 업무는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들의 관심이 부족한 편입니다. 


여기다 일처리가 거칠고 무식한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딱히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록을 따라서 살펴보면 유방 역시 민생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한전쟁은 비록 단기간의 싸움이었으나, 진나라 말기의 항쟁과 더불어 그 이전까지 중국에서 발생한 전쟁 중 가장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이로 인한 민생의 파탄은 어마어마한 수준이라 생산은 정체되어 물자는 고갈되었고, 물가는 요동쳐 쌀 1곡에 1만전에 육박했으며,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었고 백성들은 생업을 잃었으며 심지어 이름 난 장수들이라 할지라도 말이 부족해 소를 타고 다녀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楚漢久相持未決, 丁壯苦軍旅, 老弱罷轉饟. 

초군과 한군은 오랫동안 서로 대치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오랜 종군 생활에 고달파했고 노약자들은 군량 운반에 지쳐 있었다. ─ 고조본기


楚漢久相持未決, 丁壯苦軍旅, 老弱罷轉漕. 項王謂漢王曰:「天下匈匈數歲者, 徒以吾兩人耳, 願與漢王挑戰 決雌雄, 毋徒苦天下之民父子爲也.」

초군과 한군이 오랫동안 서로 대치하며 결판을 내지 못해, 장정들은 군역(軍役)에 시달리고 노약자들은 전조(轉漕)에 지치게 되었다. 항왕이 한왕에게 말하기를 “천하가 여러 해 동안 혼란스러웠던 것은 오로지 우리 두 사람 때문이다. 원컨대 한왕과 겨루어 자웅을 가리고, 애꿎은 천하의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지 말기로 하자.”라 했다. ─ 항우본기


是時漢兵與項羽相距, 中國罷於兵革, 以故冒頓得自彊, 控弦之士三十餘萬.

한나라 군은 항우(項羽)와 서로 대치해 있었으므로 중원 천하는 전쟁에 지쳐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묵돌이 손쉽게 흉노를 강화할 수 있었다. 흉노에게는 활에 능숙한 군사만 해도 30만 명이나 되었다. ─ 흉노열전


季布曰:「樊噲可斬也! 夫高帝將兵四十餘萬衆, 困於平城, 今噲柰何以十萬衆橫行匈奴中, 面欺! 且秦以事於胡, 陳勝等起. 於今創痍未瘳, 噲又面諛, 欲揺動天下.」是時殿上皆恐, 太後罷朝, 遂不複議撃匈奴事. 

“번쾌를 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옛날에 고조께서는 40여 만의 군사를 거느리고도 평성(平城)에서 곤경을 당하셨는데, 지금 번쾌가 어떻게 10만의 군사로 흉노의 한가운데를 마음껏 짓밟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는 태후를 면전에서 기만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진(秦)나라는 흉노를 정벌하는 일에 군사를 부렸다가 진승(陳勝)이 봉기하는 틈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았는데 번쾌는 또 면전에서 아첨을 해 천하를 동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때 전(殿) 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고, 태후는 조회를 파하고는 다시는 흉노를 정벌하는 논의를 하지 않았다. ─ 계포난포열전




漢興, 接秦之獘, 丈夫從軍旅, 老弱轉糧饟, 作業劇而財匱, 自天子不能具鈞駟, 而將相或乘牛車, 齊民無藏蓋.

한(漢)나라가 흥기해 진(秦)나라의 쇠락 국면을 이어받을 즈음에, 장년 남성들은 군에 입대해 전쟁을 치렀고, 노약자들은 군인들을 위해 양식을 실어 날랐다. 일반 사회에서는 생산이 거의 정체 상태에 머물러 물자가 대단히 부족했다. 천자라고 할지라도 털 빛깔이 같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갖출 수 없었으며, 어떤 장군과 재상들은 겨우 소가 끄는 수레밖에 탈 수가 없었으며, 백성들은 저축이라고는 거의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 평준서


關中大饑,米斛萬錢,人相食。令民就食蜀、漢。

관중에 큰 기근이 들어서 쌀은 1곡에 무려 1만 전이었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촉, 한에 가서 밥을 먹게 하였다. ─ 자치통감




漢興,接秦之敝,諸侯並起,民失作業而大饑饉。凡米石五千,人相食,死者過半。高祖乃令民得賣子,就食蜀、漢。天下既定,民亡蓋臧,自天子不能具醇駟,而將相或乘牛車。

한이 일어났을 때는 진의 피폐함을 이어받았고, 제후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켜서 백성들은 생업을 잃었으며, 대기근도 들었다. 대체로 쌀이 1석에 5,000천 전이나 하여 사람들이 잡아먹고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 고조는 이에 영을 내려 백성들이 촉군과 한중 지역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을 때도 백성들은 숨기거나 저장할 만한 것이 없었고, 자연히 천자조차도 털색이 같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갖출 수 없었으며, 장군이나 재상이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 한서 식화지







보시다시피 사기, 한서, 자치통감 등의 기록에서 당시의 혼란상에 대한 기록들은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끝없는 전쟁, 혼란, 여기에 대기근, 지칠대로 지친 백성들과 엉망이 된 물가……




 이러한 사태에 완전한 종지부를 찍고 초한전쟁의 여파가 완전히 사라진 시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문제와 경제 시절의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일컫어지며, 전쟁의 후유증을 회복한 시기는 비록 내부적으로는 정치적 투쟁이 치열했지만, 외적인 사업을 크게 벌이지 않았던 여후 시절이 언급됩니다. 



當孝惠、高後時,百姓新免毒蜇,人欲長幼養老。

혜제와 고후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백성들은 전쟁의 독철(毒蜇)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어린 자녀를 잘 키우고 노인들을 잘 봉양하고자 하였다. ─ 한서 형법지


孝惠、高後之間,衣食滋殖。

혜제와 고후 연간에는 입을거리와 먹을 거리가 더욱 불어났다. ─ 한서 식화지




 이렇게 전한 초기를 다룬 사가들은 혜제와 여후 시절을 초한쟁패기의 혼란을 벗어난 시기로 평가했고, 문제와 경제 시절을 본격저으로 국가의 부가 늘어난 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정말 당연한 소리지만, 전쟁을 종결시킨 고조 유방 역시 민생의 부흥을 위한 조치에 상당히 공을 들였습니다. 다만 말년의 유방에 대한 이미지는 '숙청' 과 '백등산 포위전' 의 실책으로 대표될 뿐인데다, 유방의 행적을 살펴보자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본기』 에서 이러한 행적이 주로 나타나지 않는 편이기에 전후복구와 민생 안정을 위한 유방의 조치는 거의 무시되는 면이 적잖이 있습니다.


 전쟁 종결 이후 유방이 취한 민생 안정의 조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상공업 억제를 통한 물가 안정


天下已平, 高祖乃令賈人不得衣絲乘車, 重租稅以困辱之.

천하가 평정된 이후, 고조(高祖)는 곧 상인들에게 명령을 내려 비단옷을 입는 것과 수레 타는 것을 불허했으며, 아울러 그들에게 조세를 가중하게 부과했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해 그들을 핍박하면서 곤경에 빠뜨렸다. ─ 사기 평준서



 통일 이후 유방은 국가정책으로 상인들을 탄압했으며, 여러 규제와 막대한 조세를 통해 그들을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동아시아 국가의 상공업 억제 정책은 유교 사상과 연결되어 종종 비판을 받기도 하나, 한고조의 시대는 유교가 이제 막 국가에 자리를 잡는 단계로써 달리 헤게모니를 구가할 시점이 못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인들에 대한 억제 정책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於是爲秦錢重難用, 更令民鑄錢, 一黃金一斤, 約法省禁. 而不軌逐利之民, 蓄積餘業以稽市物, 物踊騰糶, 米至石萬錢, 馬一匹則百金. 

당시에는 진나라의 돈이 너무 무거워 사용하기에 불편해서, 백성들에게 가벼운 돈으로 개주(改鑄)할 것을 명령했고, 또한 황금 한 정(錠)에 한 근(斤)으로 무게를 규정했다. 법령은 간략하게 그리고 금례(禁例)는 줄여버렸다. 그리하여 법도를 준수하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도모하는 돈 많은 장사꾼들은, 돈을 엄청나게 끌어 모아 시장의 물건들을 사재었으니, 물가가 크게 뛰어 쌀 한 섬은 만 전(錢), 말 한 마리는 백만 전에 거래되었다. ─ 사기 평준서



 이보다 앞선 시점에 유방은 진나라의 불편한 통화를 한번 개혁하는 동시에, 각종 규제 정책을 대폭 완화하여 자유방임적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여타 돈 많은 거상들은 매점매석을 통해 물가를 좌지우지 하여 민생에 크나큰 부담을 안겨주었기에, 전후 안정을 위해 물가를 안정시켜야 했던 유방은 이들을 탄압하고 규제하여 일종의 물가안정책으로 삼은 셈입니다.


 상인들에 대한 탄압은 여후의 시대에 이르러 조금 완화되기는 했습니다만은, 지나친 방임과 더불어 성장한 상공업의 폐단에 대한 논의는 문제, 경제 시절까지 이어지는 화두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유방의 조치가 그리 착오적이었다고 보긴 힘들 듯 합니다.





2. 파병(罷兵)의 조서


五月, 兵皆罷歸家. 諸侯子在關中者復之十二歲, 其歸者復之六歲, 食之一歲. 

5월, 병사들은 모두 해산해 귀가했다. 제후의 자제로서 관중에 남아 있는 자에게는 12년간 부역을 면제해주고, 봉국으로 돌아간 자에게는 6년간의 부역 면제와 아울러 1년간 조정에서 부양해주기로 했다. ─ 고조본기





초한전쟁이 끝난 후, 유방은 그동안 마구잡이로 끌어모았던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을 파병(罷兵)의 조서 하나로 모조리 혁파 해서 집으로 돌려 보내게 했습니다. 



사기 고조본기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언급할 뿐이라, 정확한 유방의 지시를 알 수는 없습니다. 대신, 한서 고제기에 해당 기록이 남아 이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諸侯子在關中者,復之十二歲,其歸者半之。民前或相聚保山澤,不書名數,今天下已定,令各歸其縣,復故爵田宅,吏以文法教訓辨告,勿笞辱。民以飢餓自賣為人奴婢者,皆免為庶人。軍吏卒會赦,其亡罪而亡爵及不滿大夫者,皆賜爵為大夫。故大夫以上賜爵各一級,其七大夫以上,皆令食邑,非七大夫以下,皆復其身及戶,勿事。」又曰:「七大夫、公乘以上,皆高爵也。諸侯子及從軍歸者,甚多高爵,吾數詔吏先與田宅,及所當求於吏者,亟與。爵或人君,上所尊禮,久立吏前,曾不為決,甚亡謂也。異日秦民爵公大夫以上,令丞與亢禮。今吾於爵非輕也,吏獨安取此!且法以有功勞行田宅,今小吏未嘗從軍者多滿,而有功者顧不得,背公立私,守尉長吏教訓甚不善。其令諸吏善遇高爵,稱吾意。且廉問,有不如吾詔者,以重論之。」


"제후의 자식으로 관중에 있는 이는 12년간 요역을 면하게 하고, 돌아간 자는 그 반만 면하게 하라. 백성들이 이전에 난을 피해 혹 산이나 못에 모여 살며 목숨을 보존하다 호적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제 천하는 이미 안정되었으니, 영을 내려 각자 제가 살던 현(縣)으로 돌아가게 하고, 옛 작위(爵)와 전택(田宅)을 돌려주며, 관리들은 법조문으로 그들을 깨우쳐 알려주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백성들이 굶주림 때문에 스스로를 팔아 남의 노비가 된 자는 모두 면(免)하여 서인으로 삼아라."


"부대의 관리나 사병 가운데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작위가 없는 자나 제5급인 대부 작위가 없는 자에게는 일률적으로 대부 작위를 하사한다. 원래 대부 작위를 가진 자나 이보다 더 높은 작위를 가진 자에게는 일률적으로 원래 작위보다 한등급 높은 작위를 하사한다. 또 7급인 공대부 작위를 가지는 자는 일률적으로 식량 및 토지를 받는 대우를 누릴 수 있다. 공대부 이하의 작위를 가지는 자와 친척은 모두 요역에 복무하지 않을 특권을 누릴 수 있다.


 "공대부와 8급인 공승 이상의 작위는 모두 고급 작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나를 따라서 천하를 탈취한 사람은 고급 작위를 가질 수 있다. 나는 수차례 휘하의 관리들에게 우선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토지와 가옥을 나눠 줘야 한다고 명령했다. 고급 군작과 식량 및 봉록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은 사실 우리의 존중과 예우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많은 관리들은 그들에게 누려야 할 대우를 해주지 않고 있다. 이는 참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진나라가 통치하고 있었을때, 공대부 이상의 작위를 가졌던 사람은 현령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다." ─ 한서 고제기



그 아래는 이 조치를 명백하게 실시할 것에 대한 유방의 당부 등의 내용이 더 있지만 생략하겠습니다. 내친김에 자치통감의 기록도 보겠습니다.


「民前或相聚保山澤,不書名數。今天下已定,令各歸其縣,復故爵、田宅;吏以文法教訓辨告,勿笞辱軍吏卒;爵及七大夫以上,皆令食邑,非七大夫已下,皆復其身及戶,勿事。」


"백성들은 전에 혹은 산이나 못에서 서로 모여서 보호하면서 이름과 숫자를 써 놓지 않았다. 이제는 천하가 이미 안정되었으니, 각자로 하여금 그의 현으로 돌아가서 옛날의 작위와 전택을 회복하게 하라. 관리는 그들에게 글과 법을 가지고 가르치고 분별하여 알려주며, 군대의 이졸에게는 태장을 쳐서 욕보이지 말 것이며, 작위가 7대부 이상에 이른 사람은 모두 채읍에서 나는 것을 먹게 하고, 7대부가 아닌 그 이하는 모두 그 자신과 호를 면제시켜 일을 시키지 말 것이다." ─ 자치통감






이제 이 부분을 살펴본다고 하면,유방을 도운 제후들의 자식들에 대한 부분은 넘어간다쳐도, 백성들에 대한 조치는 살펴 볼만 합니다. 



 초한쟁패기의 대혼란 동안 백성들은 살던 터전을 벗어나 여러 산이나 계곡 등에서 모여 무리를 지으면서 서로를 보호하고 국가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는데, 유방을 이들을 귀환하여 본래의 터전으로 되돌아오게 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 과정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이전의 논밭, 저택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법을 모르는 주민들이 불상사를 겪지 않도록 이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 대혼란기 동안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어 남의 노비로 몸을 판 자는 전원 일괄적으로 사면을 시켜 양민으로 만들었는데, 물론 이렇게 해야 조세 수입원이 늘어나는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양민들에 대한 조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조치는 초한쟁패기 동안 징집되었던 병사들을 해산시키면서 내리는 조서 입니다. 따라서 병사들에 대한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유방의 부대로 종군한 병사들 중 죄를 지은 적이 없던 병사들은 전원 대부가 되었습니다. 


본래 대부 이상이었던 사람들은 별개로 한등급씩 올라갔는데, 이렇게 되어서 만일 올라간 작위가 공대부 이상인 사람의 경우에는 식량과 토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게 어느정도의 대우냐고 한다면, 본래 제후들이 받는 특혜라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한 대우인 셈입니다. 만일 대부로 승격하고 올라가고도 직위가 공대부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도 특혜는 마련되어 있습니다. 공대부 이하인 병사들은 본인 + 친척들이 모두 '요역 면제' 라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만일 그 지위가 공대부도 넘어가는 정도의 인물들이라면 유방의 병사들 중에서도 적어도 삼진평정 이전에 들어온 병사들일텐데, 이런 한나라의 고참병에 대해서는 유방이 특별히 "응당 받아야 할 대우" 에 대해 발언하면서까지 주의를 주었습니다. 전후에 이런 참전용사들에 대한 혜택이 열악해서 사회 문제가 되는 경우가 동서고금에 꽤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유방은 꽤나 통 크게 잘 챙겨줬다고 할법합니다.







 3. 조세의 감면


 해산된 병사들에 대한 요역 감소도 여기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겠지만, 유방은 적극적으로 조세를 감소했습니다.


上於是約法省禁,輕田租,十五而稅一,量吏祿,度官用,以賦於民。

 고조는 법령을 간략하고 하고 금제를 줄였으며, 전조를 15분의 1로 경감했으며, 관리의 녹봉을 추량하고 관아의 비용을 헤아려서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였다. ─ 한서 식화지


 법령을 간략하게 했다는것은 그 유명한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말하는 일일텐데, 물론 그 이후에 구장률(九章律)이 나타나고 여기에 대해서도 또 말이 많지만 어찌되었건 당시의 약범삼장의 캐치프라이즈로 유방은 득을 보았습니다. 유방은 전조를 15분의 1로 감소 시켰는데, BC 196년 2월의 경우에는 조서를 반포해 지방 정부가 중앙 정부에 바치는 공물의 양도 규정했습니다.


「欲省賦甚。今獻未有程,吏或多賦以為獻,而諸侯王尤多,民疾之。令諸侯王、通侯常以十月朝獻,及郡各以其口數率,人歲六十三錢,以給獻費。」

"나는 조세를 줄이기를 원한다. 해마다 중앙에 바치는 공물의 양은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많은 지방의 관리들은 항상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해 중앙에 바치고 있다. 또 제후왕들은 더 많이 징수하고 있다. 이에 백성들이 불만을 품고 있다. 이제 내가 확실하게 규정한다. 제후왕과 열후들은 해마다 10월에 딱 한 번만 공물을 바치도록 한다. 각 지방 정부 역시 백성들 한 사람당 1년에 63전 이상을 징수하는 것을 금지한다." ─ 한서 고제기



 이렇게 하여 유방은 개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관리들이나 제후왕들이 백성들을 지나치게 수탈하는 일을 법으로 금지했습니다. 





 4. 여타 요역 면제 조치


 유방은 상당히 많은 이유로 요역을 면제해주었는데, 게중에는 이러한 경우도 있습니다.


 民產子,復勿事二歲。

 아이를 낳은 백성은, 2년간 요역을 면제해 준다. ─ 한서 고제기


 다른 무엇이 아무것도 없어도, 그냥 아이를 낳기만 해도 요역을 2년간 면제해준다는 부분 입니다. 요역을 줄임과 동시에 인구 증가를 노린 정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여러 조서에서 공훈을 세운 병사들이나 여타 백성들에 대한 요역 금지를 계속해서 당부하는 유방의 말이(사기 보다 한서의 경우) 상당히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소하와의 미양궁 일화에서도 보이듯 유방은 최대한 요역을 자제하려고 했고, 이러한 기조는 혜제 때도 계속 이어져 6년 동안 장성을 구축하면서도 요역은 단 두번만 발동되거나, 요역은 한번에 30일만 하게 한 것, 농한기인 가을에 하게 한 것 등의 부분이 자리 잡았습니다.



 5. 대사면령


 유방은 꽤나 자주 사면령을 내렸는데, 초한전쟁 중의 사면은 병사들의 숫자를 불리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해도 그 이후의 사면 조치는 인구수를 불리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유방이 황제에 즉위한 이후 사면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BC 202년 정월의 사면 - 「兵不得休八年,萬民與苦甚,今天下事畢,其赦天下殊死以下。」

BC 201년 12월의 사면 - 「天下既安,豪桀有功者封侯,新立,未能盡圖其功。身居軍九年,或未習法令,或以其故犯法,大者死刑,吾甚憐之。其赦天下。」

BC 199년 8월의 사면 - 秋八月,吏有罪未發覺者,赦之。

BC 198년 정월의 사면 - 丙寅,前有罪殊死以下,皆赦之。

BC 197년 7월의 사면 - 夏五月,太上皇后崩。秋七月癸卯,太上皇崩,葬萬年。赦櫟陽囚死罪以下。

BC 196년 7월의 사면 - 上赦天下死罪以下,皆令從軍;徵諸侯兵,上自將以擊布。


보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8년 동안 유방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해를 제외한 거의 모든 해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혼란으로 줄어든 인구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보이는 부분 입니다. 



 6. 법률 완화의 캐치프라이즈


漢興,高祖初入關,約法三章曰:「殺人者死,傷人及盜抵罪。」蠲削煩苛,兆民大說。其後四夷未附,兵革未息,三章之法不足以御奸,於是相國蕭何捃摭秦法,取其宜於時者,作律九章。

진나라가 훙기하고 고조가 처음 관중에 입성하였을때, 백성들에게 약법삼장을 약속했다. 그것은 "살인자는 사형, 사람을 항해한 자 및 도둑질한 자는 각각 그 죄에 해당 한다." 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의 번잡하고 가혹한 법률조문을 삭제하게 되었고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 후 사방의 이적들은 여전히 내부하지 않았고 전쟁도 종식되지 않은 상태여서 삼장의 법은 사악한 행위를 방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이에 재상인 소하는 진나라 법 가운데 시의에 적절한 것을 모아서 구장률을 만들었다. ─ 한서 형법지



 약법삼장이 유명하긴 하나 기록에서 보이듯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어서 더 강력한, 혹은 진나라 법과 거의 비슷할 수 있는구장률이 등장하고, 그 구장률도 진의에 대해 여러 말들이 있는만큼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긴 하나, 적어도 엄격한 법치를 드러내놓고 내세운 진나라에 비해 유방은 (실제로는 어떻든 간에) 약법삼장으로 대표되는 이미지를 통해 법률의 완화를 이야기했고, 이는 당대 백성들에게 이미지 상으로 꽤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乃以秦王屬吏, 遂西入咸陽. 欲止宮休舍, 樊噲、張良諫, 乃封秦重寶財物府庫, 還軍霸上.


진왕을 관리에게 맡기고 마침내 서쪽으로 함양에 입성했다. 궁중에 머물며 편히 쉬려고 하자 번쾌와 장량이 충고했다. 이에 진의 보물과 재물 창고를 봉쇄한 다음 군을 패상으로 돌렸다. - 고조 본기



蕭丞相營作未央宮, 立東闕、北闕、前殿、武庫、太倉. 高祖還, 見宮闕壯甚, 怒, 謂蕭何曰:「天下匈匈苦戰數歲, 成敗未可知, 是何治宮室過度也?」 

소승상(蕭丞相)이 미앙궁(未央宮)을 축조해 동궐(東闕), 북궐(北闕), 전전(前殿), 무고(武庫), 태창(太倉)을 지었다. 고조가 돌아와서 궁궐이 매우 웅장한을 보고 노하여 소하에게 이르기를 “천하가 혼란스러워 수년간 고전하면서도 아직 그 성패를 알 수 없건만, 어찌해 지나치게 화려한 궁실을 지었는가?”라고 물었다. ─ 고조본기




유방은 분명 욕망이 큰 사람이긴 했지만, 앞뒤 분간을 못하진 않고, '멈춰야 할 때' 를 적절하게 알고 있었다는 게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사구팽으로 대표되는 탐욕의 이미지가 크지만, 정작 그 부하들이 온갖 고생을 다하며 유방을 따른 이유에 대해 "폐하는 사람됨이 거칠고 마구 욕을 하며 무시한다. 다만, 그래도 항우와는 달리 나눌 때는 분명히 나눠준다." 는 아주 계산적인 '이득' 에 관한 부분이었다는 점을 보면, 오히려 챙겨줄 떄 확실히 챙겨주는 면이 장점이었다고 할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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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레브
15/08/1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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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데미갓인듯
우주모함
15/08/13 18:48
수정 아이콘
가장 이상적인 리더죠. 리더십의 극한이라고 봅니다.
저 신경쓰여요
15/08/13 18:45
수정 아이콘
소를 타고 다니는 이름난 장수... 길시언 바이서스!?
우주모함
15/08/13 18:47
수정 아이콘
유방이 한것중에 필요없는 일은 거의 없었죠.토사구팽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또 이런 다스림을 보더라도 무능하다는 이미지는 도대체 왜 생긴건지 모르겠음요.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관중에 들어갔을 때 유방이 진나라사람들을 모아놓고 했던 연설을 봐도 그렇고,
이후 황제가 되고나서도 소하가 대규모 공사를 벌여서 궁을 크게지어 황제의 위엄을 세우자고 건의하자
유방은 오히려 언짢아 하기도 했죠.
15/08/1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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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우리나라에 초한지를 알린 가장 큰 매체중 하나가 고우영 화백의 초한지다보니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하죠.
고우영 화백의 삼국지나 초한지를 보면 삼국지연의나 초한연의에서 보였던 인자한 유씨 군주들에 대한 반동같은 느낌의 재해석이 들어가 있어서....
Claude Monet
15/08/1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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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이 필요했다는 설명을 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한신을 예로 들면 정말로 종전 후 교만해져서 반역을 일으킬 여지가 있었기 때문인가요?
우주모함
15/08/1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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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죠. 토사구팽으로 처형된 대표적 인물들중에 진짜 억울한건 팽월 정도 뿐입니다.

한신이나 장도같은 애들은 그냥 죽을만 해서 죽은겁니다.
반역을 일으킬 여지가 있었던게 아니라 정말로 진희와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조까지 했었습니다

장도는 그걸 행동으로 옮겼다가 죽었고
경포역시 마찬가집니다.

단지 한신은 특유의 우유부단함으로 반란을 일으킬 타이밍을 잡지못하고 계속 우물쭈물하고있었는데
그러다 잡혀 죽은거죠.
15/08/14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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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팽월의 경우도 칭병하고 조례에 참석하지않았으니 아주 억울하다고만 할수는 없을것 같기도 합니다~
우주모함
15/08/13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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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당한 인물들중에 유방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쳤던 이들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천수를 누렸죠.

소하만 해도 유방이 최전방에서 항우와 싸울 때 혼자서 옛 진나라땅 전부를 통치했던 인물입니다.
오히려 한신보다도 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반역하지 않았구요.
덕분에 통일 후에도 계속해서 재상으로서 유방과 함께 나라를 다스렸고 유방이 죽고나서도 상국으로 있었습니다.
한번은 유방에게 소하가 반역을 꾀한다는 헛소문이 흘러들어가서 소하를 잡아가둔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신하가 유방에게
"소하가 정말로 반역을 꾀하려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기회가 많았을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폐하께서 항우를 힘겹게 막아내고 있던 때에도 혼자서 관중을 맡아서 통치하면서 충성을 바친 소하인데
뭐하러 지금 갑자기 반역을 하겠습니까? "
라고 얘기하자 유방은 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소하를 풀어준뒤에
맨발로 소하를 맞으러 나가서는 사과합니다. 내가 걸주와 같은 폭군이다. 미안하다. 라고요.


하지만 한신은 어땠나요?
초한쟁패기 종반부에 전쟁에 지친 쌍방이 서로의 경계를 정하고 항우가 자신의 땅으로 돌아갔었죠?
하지만 그때 장량과 진평이 이대로 항우를 놓아보내서는 안된다며 뒤통수를 쳐서 항우를 완전히 멸하자고 했고
이것을 옳다고 여긴 유방은 사방의 제후들을 불러모아 같이 항우를 포위공격하자고 합니다.
이때 가장 큰 군권을 가지고있었던 한신이나 팽월도 역시 불렀으나 둘다 응하지 않았고
덕분에 혼자 항우와 싸우다가 유방은 패합니다.

이것 뿐만이 아니라 예전에 제나라 왕시켜달라면서 징징대다가 유방의 어그로를 끈적도 있고요.

한신은 별로 충성스러운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야심가였죠.
우주모함
15/08/13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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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이라는 말 하면 유방이 많이 연상되는 고로
유방이 무슨 통일하고난뒤 공신들 앞뒤안가리고 다 쳐죽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Claude Monet
15/08/13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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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설명 감사드립니다. 대충 알기로 토사구팽이라는, 이용해 먹고 버리는 이미지만 생각했었는데 군주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였군요
이치죠 호타루
15/08/13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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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첨언하자면...
친족도 얼마든지 반역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더구나 자신이 바로 이전의 왕조를 뒤엎고 창업을 한 군주라는 점에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뭐니뭐니해도 "군권을 잡은 신하"였을 겁니다. 무엇보다 창업군주 그 자신이 바로 군권을 잡은 신하 아니겠습니까(말단 백성인 케이스도 있었습니다만). 그런 만큼 그런 "군권을 잡은 신하", 그것도 무력이 뛰어나거나 머리가 좋아서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만한 구석이 있으면 아무리 그 신하가 충성을 맹세해도 창업군주 입장에서는 "저놈이 언제 내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게 어쩌면 당연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신하의 군권을 빼앗는 것은 창업군주에게 있어서 특히 절대적인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겠죠. 그게 피의 숙청 없이 제대로 먹혀서 미담으로 남은 것이 후한 광무제 유수와 송태조 조광윤의 케이스고, 보통의 경우가 유방의 케이스, 그리고 이게 완전히 개판으로 흘러간 게 위진남북조시대나 오대십국시대죠("창업군주"가 군권을 빼앗은 것은 아닙니다만, 일찍 죽는다던지 등의 이유로 인해 군권을 잡은 신하가 득세하고 황제를 갈아치우는 패턴이 반복되었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카롱카롱
15/08/13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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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항우가 정치적 무능의 끝판왕이라는 점은 마이너스 인지 플러스 인지 모르겠네요. 덩달아 유방도 허허실실이미지가 생겼으니...
이치죠 호타루
15/08/13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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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통일을 했지만 진은 고작 15년 만에 망했고 한나라는 동한 서한 합쳐서 400년을 갔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혹한 법률과 토목공사로 백성을 쥐어짜낸 정권치고 오래 가는 것을 보지 못했구요. 물론 여후 이후의 문경지치도 한나라의 수명을 크게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겠습니다만 문경지치도 한 고조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으면 애초에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봅니다.

읽다 보니 본문의 내용과는 좀 거리가 있긴 하지만 두 가지 의문이 드는군요.
첫 번째로, 자치통감이나 사기에 나오는 "萬"이라는 글자를 해석할 때, 군사 수처럼 몇십만 이런 게 아니라 단순히 '米斛萬錢' 부분처럼 그냥 "萬"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해석할 때는 그냥 "많다" 정도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로 쌀 한 섬에 일만 전이 들었다가는 남아나는 백성이 없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컨대 자치통감의 '米斛萬錢'이라 되어 있는 부분은 "양곡의 가격이 매우 올랐으며"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거 아닌가 싶습니다. 국내에 권중달 교수님이 자치통감 번역본을 내놓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부분에서 어떻게 번역하셨는지 좀 궁금하네요.
두 번째로 글 마지막의 소하의 건은, 물론 고조의 노력을 말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만, 소하가 일부러 저지른 일이 아니었나 하는 겁니다. 자기 평판이 높아지는 걸 고조가 경계할 테니 적당히 해라 하고 충고를 들어서 고리대금업에 일부러 돈 빌려서 안 갚는 등 적당히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을 했다던 소하인데 그 때 그 일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신불해
15/08/13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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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에 언급한 자치통감의 번역은, 말씀하신 권중달 교수님의 번역을 옮긴 부분입니다. "1만 전의 구매력이 어떠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기정의에 언급되기로는 1만 전은 황금 1근의 가치다." 라는 주석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저기서는 안 쓴 부분이지만, 쌀이 한 섬에 일만 전이 들었다는 기록 바로 다음의 기록이, "백성들을 촉한으로 이주시켜 밥을 먹게 하였다." 는 부분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남아나는 백성이 없을 지경' 의 곤경이라, 당시 유방도 이대로면 안되겠다 싶어 관중 백성들을 촉한으로 이주시켜 곤경을 피하게 했습니다.


2. 마지막 소하에 대한 부분은 소하의 그 일화가 중점이 아니라, 소하의 미앙궁 축조와 호사스러운 궁궐을 짓는데 반감을 드러낸 유방의 일화입니다. 혼동 하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치죠 호타루
15/08/13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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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예 촉한으로 이주시킬 정도면 정말로 답이 없었네요. 그렇다면 1만 전이 들었다는 말이 결코 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2. 그렇다면 서로 아예 다른 이야기가 되겠군요. 소하의 행동에 뭔가 뜻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유방에게 한 소리 들을 삽질이었나봅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신불해
15/08/13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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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 본인은 "일단 이렇게 크게 만들어야 권위가 살고, 이렇게 크게 만들어놓으면, 앞으로 후대의 임금들은 이보다 더 크게 만들어놓지는 않을 거다." 라고 말했고, 유방도 납득을 하긴 합니다.

다만 자치통감의 사마광은 평론에서 건축 크게 해서 권위를 세우려는 이 행동을 비판하긴 하더군요.
15/08/1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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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좋은 글 감사합니다

평소에 알던 한고조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짐을 느낍니다.
15/08/13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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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이라면, 초한쟁패기는 그 파괴력과 참상에도 불구하고 기간 자체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시황의 죽음이 기원전 210년,
진승-오광의 난이 발발한 것이 기원전 209년,
거록 전투가 기원전 207년,
한군이 삼진을 타파하고 장한을 참한 것이 기원전 205년,
수수 전투도 기원전 205년,
항우가 해하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한 것이 기원전 202년입니다.

즉 아무리 길게 잡아도 8년에 불과했던 셈입니다. 본격적인 초한충돌로 기간을 한정하면 고작 4년 남짓입니다.
그런데 삼국시대는 길게 잡으면 황건란부터 오나라의 멸망까지 약 100년, 짧게 잡아도 적벽대전부터 오나라의 멸망까지 70년 가량이 소요되었습니다.
아름다운저그
15/08/14 00:37
수정 아이콘
중국 최고의 낭만?의 시대라는 삼국시대는 사실 득실로만 놓고 보자면 중국이 가장 흑역사로 묻어두고 싶은 시대중 하나라고하는 삼국지 연구가의 의견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그 긴 기간을 전쟁과 다툼으로 보냈고 죽쑤어서 이민족들이...
無識論者
15/08/14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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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삼국지 시대에는 중국의 혼란과 내전에도 불구하고 이민족들을 자근자근 밟아줬죠. 문제는 이어지는 진나라 시절에는 내분은 내분대로 일으키면서 이민족을 밟지도 못해서 휩쓸렸다는게...
15/08/14 20:32
수정 아이콘
좋은글에 부연을 하자면,

한나라 시대엔 일반백성들도 작위가 있어서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작위가 오르거나 죄를 지으면 작위를 박탈당하거나 강등되기도 했습니다. 또 세습도 되고 어떤 경우엔 사고 팔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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