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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13 18:47
유방이 한것중에 필요없는 일은 거의 없었죠.토사구팽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또 이런 다스림을 보더라도 무능하다는 이미지는 도대체 왜 생긴건지 모르겠음요.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관중에 들어갔을 때 유방이 진나라사람들을 모아놓고 했던 연설을 봐도 그렇고, 이후 황제가 되고나서도 소하가 대규모 공사를 벌여서 궁을 크게지어 황제의 위엄을 세우자고 건의하자 유방은 오히려 언짢아 하기도 했죠.
15/08/13 19:00
아무래도 우리나라에 초한지를 알린 가장 큰 매체중 하나가 고우영 화백의 초한지다보니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하죠.
고우영 화백의 삼국지나 초한지를 보면 삼국지연의나 초한연의에서 보였던 인자한 유씨 군주들에 대한 반동같은 느낌의 재해석이 들어가 있어서....
15/08/13 20:06
토사구팽이 필요했다는 설명을 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한신을 예로 들면 정말로 종전 후 교만해져서 반역을 일으킬 여지가 있었기 때문인가요?
15/08/13 20:35
당연하죠. 토사구팽으로 처형된 대표적 인물들중에 진짜 억울한건 팽월 정도 뿐입니다.
한신이나 장도같은 애들은 그냥 죽을만 해서 죽은겁니다. 반역을 일으킬 여지가 있었던게 아니라 정말로 진희와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조까지 했었습니다 장도는 그걸 행동으로 옮겼다가 죽었고 경포역시 마찬가집니다. 단지 한신은 특유의 우유부단함으로 반란을 일으킬 타이밍을 잡지못하고 계속 우물쭈물하고있었는데 그러다 잡혀 죽은거죠.
15/08/13 20:49
숙청당한 인물들중에 유방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쳤던 이들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천수를 누렸죠. 소하만 해도 유방이 최전방에서 항우와 싸울 때 혼자서 옛 진나라땅 전부를 통치했던 인물입니다. 오히려 한신보다도 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반역하지 않았구요. 덕분에 통일 후에도 계속해서 재상으로서 유방과 함께 나라를 다스렸고 유방이 죽고나서도 상국으로 있었습니다. 한번은 유방에게 소하가 반역을 꾀한다는 헛소문이 흘러들어가서 소하를 잡아가둔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신하가 유방에게 "소하가 정말로 반역을 꾀하려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기회가 많았을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폐하께서 항우를 힘겹게 막아내고 있던 때에도 혼자서 관중을 맡아서 통치하면서 충성을 바친 소하인데 뭐하러 지금 갑자기 반역을 하겠습니까? " 라고 얘기하자 유방은 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소하를 풀어준뒤에 맨발로 소하를 맞으러 나가서는 사과합니다. 내가 걸주와 같은 폭군이다. 미안하다. 라고요. 하지만 한신은 어땠나요? 초한쟁패기 종반부에 전쟁에 지친 쌍방이 서로의 경계를 정하고 항우가 자신의 땅으로 돌아갔었죠? 하지만 그때 장량과 진평이 이대로 항우를 놓아보내서는 안된다며 뒤통수를 쳐서 항우를 완전히 멸하자고 했고 이것을 옳다고 여긴 유방은 사방의 제후들을 불러모아 같이 항우를 포위공격하자고 합니다. 이때 가장 큰 군권을 가지고있었던 한신이나 팽월도 역시 불렀으나 둘다 응하지 않았고 덕분에 혼자 항우와 싸우다가 유방은 패합니다. 이것 뿐만이 아니라 예전에 제나라 왕시켜달라면서 징징대다가 유방의 어그로를 끈적도 있고요. 한신은 별로 충성스러운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야심가였죠.
15/08/13 21:24
토사구팽이라는 말 하면 유방이 많이 연상되는 고로
유방이 무슨 통일하고난뒤 공신들 앞뒤안가리고 다 쳐죽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15/08/13 23:06
좋은 설명 감사드립니다. 대충 알기로 토사구팽이라는, 이용해 먹고 버리는 이미지만 생각했었는데 군주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였군요
15/08/13 23:39
약간 첨언하자면...
친족도 얼마든지 반역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더구나 자신이 바로 이전의 왕조를 뒤엎고 창업을 한 군주라는 점에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뭐니뭐니해도 "군권을 잡은 신하"였을 겁니다. 무엇보다 창업군주 그 자신이 바로 군권을 잡은 신하 아니겠습니까(말단 백성인 케이스도 있었습니다만). 그런 만큼 그런 "군권을 잡은 신하", 그것도 무력이 뛰어나거나 머리가 좋아서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만한 구석이 있으면 아무리 그 신하가 충성을 맹세해도 창업군주 입장에서는 "저놈이 언제 내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게 어쩌면 당연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신하의 군권을 빼앗는 것은 창업군주에게 있어서 특히 절대적인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겠죠. 그게 피의 숙청 없이 제대로 먹혀서 미담으로 남은 것이 후한 광무제 유수와 송태조 조광윤의 케이스고, 보통의 경우가 유방의 케이스, 그리고 이게 완전히 개판으로 흘러간 게 위진남북조시대나 오대십국시대죠("창업군주"가 군권을 빼앗은 것은 아닙니다만, 일찍 죽는다던지 등의 이유로 인해 군권을 잡은 신하가 득세하고 황제를 갈아치우는 패턴이 반복되었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15/08/13 19:15
상대적으로 항우가 정치적 무능의 끝판왕이라는 점은 마이너스 인지 플러스 인지 모르겠네요. 덩달아 유방도 허허실실이미지가 생겼으니...
15/08/13 19:41
같은 통일을 했지만 진은 고작 15년 만에 망했고 한나라는 동한 서한 합쳐서 400년을 갔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혹한 법률과 토목공사로 백성을 쥐어짜낸 정권치고 오래 가는 것을 보지 못했구요. 물론 여후 이후의 문경지치도 한나라의 수명을 크게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겠습니다만 문경지치도 한 고조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으면 애초에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봅니다.
읽다 보니 본문의 내용과는 좀 거리가 있긴 하지만 두 가지 의문이 드는군요. 첫 번째로, 자치통감이나 사기에 나오는 "萬"이라는 글자를 해석할 때, 군사 수처럼 몇십만 이런 게 아니라 단순히 '米斛萬錢' 부분처럼 그냥 "萬"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해석할 때는 그냥 "많다" 정도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로 쌀 한 섬에 일만 전이 들었다가는 남아나는 백성이 없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컨대 자치통감의 '米斛萬錢'이라 되어 있는 부분은 "양곡의 가격이 매우 올랐으며"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거 아닌가 싶습니다. 국내에 권중달 교수님이 자치통감 번역본을 내놓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부분에서 어떻게 번역하셨는지 좀 궁금하네요. 두 번째로 글 마지막의 소하의 건은, 물론 고조의 노력을 말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만, 소하가 일부러 저지른 일이 아니었나 하는 겁니다. 자기 평판이 높아지는 걸 고조가 경계할 테니 적당히 해라 하고 충고를 들어서 고리대금업에 일부러 돈 빌려서 안 갚는 등 적당히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을 했다던 소하인데 그 때 그 일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15/08/13 20:30
1. 본문에 언급한 자치통감의 번역은, 말씀하신 권중달 교수님의 번역을 옮긴 부분입니다. "1만 전의 구매력이 어떠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기정의에 언급되기로는 1만 전은 황금 1근의 가치다." 라는 주석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저기서는 안 쓴 부분이지만, 쌀이 한 섬에 일만 전이 들었다는 기록 바로 다음의 기록이, "백성들을 촉한으로 이주시켜 밥을 먹게 하였다." 는 부분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남아나는 백성이 없을 지경' 의 곤경이라, 당시 유방도 이대로면 안되겠다 싶어 관중 백성들을 촉한으로 이주시켜 곤경을 피하게 했습니다. 2. 마지막 소하에 대한 부분은 소하의 그 일화가 중점이 아니라, 소하의 미앙궁 축조와 호사스러운 궁궐을 짓는데 반감을 드러낸 유방의 일화입니다. 혼동 하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15/08/13 20:51
1. 아예 촉한으로 이주시킬 정도면 정말로 답이 없었네요. 그렇다면 1만 전이 들었다는 말이 결코 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2. 그렇다면 서로 아예 다른 이야기가 되겠군요. 소하의 행동에 뭔가 뜻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유방에게 한 소리 들을 삽질이었나봅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15/08/13 20:54
소하 본인은 "일단 이렇게 크게 만들어야 권위가 살고, 이렇게 크게 만들어놓으면, 앞으로 후대의 임금들은 이보다 더 크게 만들어놓지는 않을 거다." 라고 말했고, 유방도 납득을 하긴 합니다.
다만 자치통감의 사마광은 평론에서 건축 크게 해서 권위를 세우려는 이 행동을 비판하긴 하더군요.
15/08/13 20:47
흥미로운 점이라면, 초한쟁패기는 그 파괴력과 참상에도 불구하고 기간 자체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시황의 죽음이 기원전 210년, 진승-오광의 난이 발발한 것이 기원전 209년, 거록 전투가 기원전 207년, 한군이 삼진을 타파하고 장한을 참한 것이 기원전 205년, 수수 전투도 기원전 205년, 항우가 해하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한 것이 기원전 202년입니다. 즉 아무리 길게 잡아도 8년에 불과했던 셈입니다. 본격적인 초한충돌로 기간을 한정하면 고작 4년 남짓입니다. 그런데 삼국시대는 길게 잡으면 황건란부터 오나라의 멸망까지 약 100년, 짧게 잡아도 적벽대전부터 오나라의 멸망까지 70년 가량이 소요되었습니다.
15/08/14 00:37
중국 최고의 낭만?의 시대라는 삼국시대는 사실 득실로만 놓고 보자면 중국이 가장 흑역사로 묻어두고 싶은 시대중 하나라고하는 삼국지 연구가의 의견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그 긴 기간을 전쟁과 다툼으로 보냈고 죽쑤어서 이민족들이...
15/08/14 08:18
정작 삼국지 시대에는 중국의 혼란과 내전에도 불구하고 이민족들을 자근자근 밟아줬죠. 문제는 이어지는 진나라 시절에는 내분은 내분대로 일으키면서 이민족을 밟지도 못해서 휩쓸렸다는게...
15/08/14 20:32
좋은글에 부연을 하자면,
한나라 시대엔 일반백성들도 작위가 있어서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작위가 오르거나 죄를 지으면 작위를 박탈당하거나 강등되기도 했습니다. 또 세습도 되고 어떤 경우엔 사고 팔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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