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운아였다. 그게 언제부터 시작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랬었던거 같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5살까지 낮에는 외할머니 집에서, 밤에는 부모님이 키워주셨다. 남들은 부모님의 사랑만 받고 자라지만
난 거기에 외할머니 이모 외삼촌의 사랑까지 받으며 컷으니 그 얼마나 사랑을 듬뿍 받았겠는가. 하지만 너무 여러명의 사랑을
받아서 그런지 어릴 땐 주의가 산만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곤 했다.
나는 행운아였다. 부모님은 내게 초등학교때까지 공부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공부를 잘못했던거 같다.
아니 사실 잘 못했다. 하지만 잘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항상 나보고 잘한다고만 하셨으니까..
80년대말 90년대 초에도 열심히 하는 애들은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래서인지 시험기간엔 놀이터에 친구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난 시험기간이 제일 싫었다
때론 공부를 잘했던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였을까... 담임선생님이 너무 좋았다. 당시로선 꽤 열린 선생님이었다.
주로 발표와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수업을 하는 선생님이셨고, 성적 외에도 발표나 다른 것들로 상을 주었다. 난 수업을 참 열심히
참여했고, 시험공부를 한번도 한적이 없음에도 시험에서 12개만 틀리는 내 초딩인생에 최고의 성적을 내었다. 물론 그 후에 내 성적은
손가락 발가락을 모두 합친 것의 곱하기 2를 하다가 셈을 포기할 정도였다.
아.. 맞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내 생각에 어릴 땐 그래도 괜찮게 생긴거 같았다. 공부를 그렇게 못했음에도 인기투표
순위권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반장 선거를 하게 되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친구들 몇명이 나를 추천하고 또 선동까지 해 주었다.
아마 걔들은 반쯤은 장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웠고 선생님은 잠깐 나보고 복도에 나가 있으라고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반장선거는 장난이 아니라고 했었다고 한다. 아마도 내가 공부를 못해서 그랬었지 싶다. 결국 그럼에도
나는 아~주 높은 득표율로 반장이 되었다. 역시 나는 행운아였다.
나는 행운아였다. 왜냐하면 내가 공부를 못했지만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학교가 되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날 중간고사 성적표라는 것이 나왔다. 초등학교때에는 수우미양가만 나왔었는데, 이 성적표에는 등수라는게 적혀 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는데.... 거기엔 약 50명중에 38등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래도 중간은 할 줄 알았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공부라는 것을 시작했다. 학원을 다니고, 독서실을 다니고 열심히 한 결과 중3때는 정말로 50명중 15등 정도를 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은 정말 재밌었다. 친구들과 시험기간에 일찍 하교를 하면 열심히 당구를 쳤다. 당구를 아주 잘치는 편은 아니었으나
꾸준히 친 결과 졸업즈음에는 약한200정도 쳤던거 같다. 농구와 축구를 열심히 했었고, 고3때에는 학년 농구대회에서 반 대표로 나가서
15개반 중 우승을 당당히 차지하였다. 다행히 스타크래프트가 유행했던 고3시절에 스타를 안하고 당구만 친건 정말 행운이었다.
스타를 안해서인지 고3때는 내 인생에서 공부를 가장 잘했던 시기였고, 나름 강남의 모 고등학교에서 반 50명중 10등정도를 했던거같다.
나에겐 남들보다 많은 행운이 있었던거 같다. 그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쭈욱 이어졌는데 남들은 1번 보는 수능을 나는 3번이나
본 것이다. 재수를 결심하고 강남에 있는 종로학원을 등록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재수의 메카 종로학원이구나... 라고 새로운 세계에
접어들 때 쯤.. 나는 교실에 있지 않고, 당구장 pc방 그리고 경기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학교와는 달리 내가 선택한 이
자유로운 시간을 나는 더욱 활용하고 싶어서, 부모님 몰래 친구 통장으로 학원비 3개월 선불 중 2달치를 환불했다. 이젠 시간에 돈 까지
생겼으니 너무 너무 행복했다. 당구는 250을 넘어서고 있었고, 스타는 정확히 등수는 기억 안나지만 래더 1000등안에 자주 들었던거 같다.
동네 pc방에서는 거의 스타를 손에 꼽힐정도로 했던거 같다. 그렇게 놀다 밤에 들어가면 아버지는 내게 수고했다며 맥주 한잔 하자고
종종 하셨고, 마치 나는 공부 열심히 하다 들어온 것 처럼 하고는 아버지와 맥주를 같이 마시곤 했다.
재수할 때 정말 원 없이 놀아서일까.. 진짜로 태어나서 공부를 한번 열심히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재수가 끝나고 아버지랑 둘이 산에 올라가
내 뜻을 비추었다. 아버지는 늘 나를 믿어주셨다. 태어나면서 3수를 결심하는 그 순간에도 말이다. 넌 항상 할 수 있다는 말만 하셨다. 어느날
내가 아버지께 "왜 나는 잘할 수 있어요? " 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내게 "그건 내 아들이니까" 라고 자주 하셨던거 같다.
그렇게 시작된 3수는 그때까지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행운이 따라오지 않았던 시기였다. 나는 정말로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이전에는
아무리 공부해도 오르지 않던 성적히 희한하게 계속 오르고 있었다. 3월 모의고사에서 360점 정도를 받았던거 같다. 점수가 너무 많이 나와서
퍼센티지를 보니 전국 상위 4%정도의 성적이었다. 이상하게 공부에 집중이 되고 수능이 가까워지자 9월 10월엔 380점까지도 나왔던거 같다.
물론 2000년에 모의고사 점수가 전체적으로 많이 오른 탓도 있었지만 거의 1~2%대의 전국석차도 나와보았고, 못해도 3~4%정도가 나왔던거
같다.
그렇게 큰 기대를 앉고 본 2001년 수능에선 평소대로 점수를 잘 받았다. 근데 나만 잘 받은것이 아니라 모두가 점수를 잘 받았다. 천재들이
많이 나온해였는지 만점자도 40명이 넘는다고 뉴스에서 떠들어대곤 했고. 나의 인생에서 행운은 거기까지 였던걸까... 정말로 원하지 않는
대학에 나 대신 어머니가 특차로 원서를 내셨고, 아무런 경쟁도 없이 합격하게 되었다. 그 학교는 중구 필동에 위치하고 있었나보다.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하는 내 인생의 전반부인거 같네요. 후반부에도 참 많은 행운이 따라왔는데.. 길어질 거 같아서 다음에 또 써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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