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부터 노래방에 들어가는 돈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노래방이 아니면 다른 놀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어떤 놀이도 고등학생들에게 시끄럽고 방방 뛰는 즐거움을 제공하지 못했다. 커뮤니티 모임을 해도 일단 노래방에서 긁어주고 힘이 빠지고 나서야 차분하게 대화의 창을 열었다. 노래 못하는 사람에겐 고역이었을 그 풍습(...)은 사실 나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노래방을 싫어한 건 아니었지만, 노래방을 5명이 가면 꼭 나보다 잘 부르는 사람 한 명이 있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은 고음 잘 올라가는게 노래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 수준의 노래실력에서 고음이란 가창력과 일맥 상통이었다. 그 약간 음 더 올라가는 차이로 그 사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의 가짓수가 달라진다. 그것이 노래방에서 그 사람에게 '다양한 레퍼토리' 라는 무시무시한 무기와 자신감을 준다. 단순히 노래를 많이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재능. 고음병이라고 아무리 뭐라고 해도, 일단 걸려 보고 면역이 생기든 뭐든 하고 싶었다.
내 주위에 아이들은 이 즈음 세 가지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한가지는 평범하게 노래방을 가던말던하는 일반인 한가지는 락과 메탈에 환장한 스피릿 한가지는 얽어맨 가사가 주는 언어의 마법에 취한 범프오브치킨 노래방에 갈 때마다 A tale that wasn't right 아니면 K는 꼭 하나씩은 지겹도록 들렸다. 그것은 그 사람이 부르는 노래의 종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특히 Emerald Sword를 위시한 소위 멜스메라고 불렸던 메탈놈들이 수시로 창궐하였다. 내가 포함된 애니송 파벌 역시 그러한 경향이 있었다. 다만 애니송 파벌은 범프오브치킨의 노래를 한 8개쯤은 기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컬 특유의 콧소리 섞인 목소리를 따라하는 친구들의 목소리를 8곡씩 들어주는 것도 약간은 고역이었다. 가끔 그들 중에 목에 핵탄두를 달아놓은 녀석들도 있었는데 노래방 밖에서도 그 울림이 멈추지 않는 위력적인 보이스가 노래방의 꽉 막힌 칸막이에서 요동을 쳤다.
그리고 그 노래방에서 나는 경쟁력을 갖기 위해 무던 애를 썼다. 첫째는 창법이었는데, 잘부르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이 빨리 쉬지 않는 것, 그리고 어떤 노래에도 어울릴 것. 가장 강력한 무기는 레퍼토리였는데, 어떤 커뮤니티를 가도 거기에 적응해서 노래를 뽑아낼 필요성이 있었다. 다만 그러면서도 나는 좀 튀고 싶어서, 남들이 안부르는 노래를 고집스럽게 찾아냈다. 어떤 노래를 부르고 난 뒤에는 목이 풀리는 느낌이 있어서, 그런 노래도 찾아냈다. 그렇게 노래방을 다니고 나니, 내 노랫소리는 내 목소리와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난 이제 나이 30에 내 소리를 찾으려고 또 노래방을 간다.
목풀기
풀리면 좋고, 안풀리면 그 날 하루 종일 노래가 똥이 되는 도박.
고음역병이 방에 창궐할 때 부르는 노래
노래방에 중2병이 돌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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