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게에 [내가 게임을 못해도 게임을 하는 이유.] 의 본문과 댓글을 보고 갑자기 옛생각이 나서 이렇게 글을 써 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운알못. 축알못이였습니다.
평균보다 작은 키. 작은 몸무게 때문에 초등학교 때 키순으로 번호를 매기면 항상 3~6번을 도맡아 했었죠. 제 자리도 맨 앞자리. 아니면 두번째 자리..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동네 형들과 부대끼며 노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급우 관계는 꽤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쉬는시간. 점심시간마다 반 친구들이 축구를 하러 나가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항상 따라 나갔었죠.
수영을 조금 했었기 때문에 지구력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빼빼 마른 키작은 아이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수비수..를 했었죠.
어렸을 땐 잘하는 애들은 공격수. 못하는 애들은 수비수였으니까.. 문제는 수비수가 공격수 공을 못 뺐는다는것...
초등 저학년 때야 그냥 같이 뛰면서 공을 건드리면 되지만 고학년이 될수록 공격수들의 수준은 축구부 수준 . 공을 저처럼 축알못이 어떻게 뺏겠습니까.. 그냥 마킹만 하다 끝나는 겁니다. 뛰긴 드럽게 뛰는데 공은 못뺏고.. 흐흐
여하튼 그래도 재미있게 축구를 했던 기억이 있는데 문제는 가끔 아이스크림같은 가벼운 내기를 둔 경기를 할 때였습니다.
운동 잘하는 아이들은 그만큼 승부욕도 강했기 때문에 팀구성부터 열을 올릴수밖에 없었고 저 포함한 전문 수비수들은 눈치를 살펴야 했죠.
리더쉽 있는, 운동신경 꽤 있는 아이들 두명이서 각자의 팀 구성을 가위바위보로 합니다.
드래프트에 참가한 기분이 이런 것일까요.. 친구들은 계속 선택되서 나갑니다. 지명자와 하이파이브는 기본. 장미빛 미래를 나눕니다.
이윽고 전문 수비수들 두어명만 남았습니다. 저도 당당히... 그 자리에 섰있었구요.
단짝 친구지만 승부욕이 강한 제 친구이자 지명권자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도토리도 각자 크기가 다르듯 머리속으로 각 수비수들의 실력을 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이좋게 저를 제외한 두 명의 수비수들이 선택되고... 전 혼자 남았습니다.
너 해. 아냐 너네팀이 좀 약하니까 뛰게해... ㅜ 어렸을 때였고 물론 다 친한 친구들이 재미로 뛰노는 거였지만 뭔지모를 서러움이 가슴속에서 밀려옵니다.
전 깍두기가 되었습니다. 어느팀에 들어가도 무방한. 별 상관없는..
그래도 재미있게 뛰었습니다. 예상외로 경기가 치열하고 깍두기의 활약이 쩜오 이상 하자 상대팀은 당황하기 시작하면서 깍두기의 존재에 대한 불합리성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가볍게 무시하고 우리는 한시간 뒤 맛있게 학교 앞 문방구의 아이스크림을 다량 섭취할 수 있었구요.
깍두기의 기억은 축구할 때 한두번. 야구할 때 한번.. 몇번 안되는 기억이었지만 항상 서러움을 머금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나름대로의 배려도 느낄 수 있었지만요.
가만 생각해보니 가해자 입장(?)에서의 기억도 나는군요.
운동은 별로 못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다소 빠른 집 안 컴퓨터의 존재로 인해 게임은 좀 자신 있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스타 붐이 일어난 이후로 저는 항상 스타계의 주류로 우뚝 섰습니다. 방과후 축구를 하러 운동장에 남았을 때보다 학교 앞 피시방에서 모이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저의 존재감은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저보다 잘하는 반 친구들도 있었지만 로템에서 붙으면 종족빨..로 핑계를 댈 수 있을 정도의 호각세였죠.
우루루 몰려가면 당연 팀플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친구들 중에서도 열의는 넘치지만 게임 실력이 받춰주질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죠.
그 친구들은 자연스레 깍두기 비스무리한게 되었고.. 팀을 정하다보면 그 친구들의 거취가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었기에 가위바위보라는 후진 드래프트 방식 대신 신자유주의의 특권! 담합..을 했습니다. 넌 못하니까 저 팀 가서 밸런스를 맞추면 되겠다. 넌 기본은 하니까 내말만 들으면 돼~ 이런 식으로.
가만 생각해보면 그 깍두기 친구들은 몇 해 전 제 기분을 오롯이 몸으로 받아낸 체 게임을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겜에서 이기면 나(혹은 정말 잘한 친구) 쩔지 않냐? 지면 아 팀이 좀 좋았어도...
우리는 서로 배려한답시고 항상 같이 게임을 했었지만 혹여나 내 행동과 말이 그 친구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는지..
요즘은 또 동창회를 하면 당구장에서 깍두기의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참 웃기죠?? 흐흐흐흐흐
마무리가 안되네요. 여하튼 이세상 모든 깍두기들 힘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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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저 어릴때 생각나고 그러네요.
웨이트나 수영같은 맨몸운동은 정말 좋아하고 즐기는 편인데 동그란 물체로 하는 모든 구기 종목은 제가 잼병입니다. 원채 구기쪽을 싫어하기도 하구요(야구빼고....) 그래서 군시절 짬밥 없을 땐 물당번 아니면 깍두기였습니다. 그나마 깍두기로 들어 갔다가도 계속 맨땅에 헤딩만 해대니 화난 선임들에게 욕만 진탕 먹고 밖으로 쫒겨 나가기 일수였구요.
저는 시골에서 살면서 동네에 연령층이 참.. 다양했습니다.
숫자도 안맞고 나이도 안맞아서.. 또 친한 애들은 묶어줘야 하고.. 특히 여자애들..
막내는 보살필수 있는 누나가 있는 쪽으로 보내고..
비석까기, 자치기, 한발두발, 숨바꼭질, 뚝으로 수영하러 가고, 돗자리 하나 들고 소풍 아닌 소풍도 가고..
해가 지고 각자의 부모님들이 돌아오실때까지 같이 있었죠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소중한 기억이고 추억이네요
중3때 이사만 안했어도^^;;
깍두기는 나름의 서운함이 있었겠지만 요새 기준으로 생각하면 참 아름다웠던 문화 아닌가 싶습니다. 적어도 함께 하니까요. 그리고 말씀해주셨던 경우처럼 깍두기가 의외로 크랙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죠 크크 그럴 때의 쾌감은 비단 깍두기만의 것이 아닌 깍두기의 혜택을 본 팀의 것이기도 했죠. ("야 깍두기 쩔어 깍두기땜에 이겼어 크크")
여러모로 좋은 문화였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