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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7/22 16:56:18
Name 케세라세라
Subject [일반] 2000년 여름 야구의 추억
일본에서 학교를 다닐때 저희학교 야구부는 여름 고시엔 지역예선 결승전에 올라갔습니다. 저희학교 야구부는 지역에서 그리 유명하지 않은, 멋진 야구 선배도 없는, 단지 야구를 좋아하는 학생들끼리 함께하는 동호회 수준이었기에 지역에서는 항상 C~D등급 평가를 받는 야구부였습니다. 이렇기에 고시엔을 나간다는 것은 먼 희망이었고, 지역예선 결승은 저희에겐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한여름 밤의 꿈이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 여름, 단체로 야구부원들이 약을 먹었는지, 비밀훈련을 했는지, 지역 예선 1라운드를 돌파하더니, 2라운드, 3라운드를 넘어서는 드디어 꿈 같았던 지역예선 결승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야구부 창단 최초로 고시엔 진출이라는 희망에 들떠있었고, 학교운영위원회, 졸업동문, 재학생들 모두가 드디어 고시엔에 가는구나라고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당시 재학생으로서 매우 들떠 있었던건 사실입니다.

결승상대는 전국에서 S급이라 불리던 학교였으며, 흔히 말해 전국 유망주들을 스카우트해오는, 슬램덩크로 말하자면 해남고교 또는 지학고교라 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상대였습니다. 저희 학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학교의 고시엔 진출을 낙관하고 있는 결과가 뻔히 보이는 게임이었습니다.

결승전 당일, 예상외로 팽팽한 투수전으로 흘러갔고, 8회초까지 0점 승부가 계속되는 그때, 투아웃 주자 1,3루를 남겨두고 저희 학교 투수가 던진 공은 폭투가 되어 포수 뒤로 빠지고 3루 주자는 홈인을 하고 홈에서 태그를 하는 순간 다시 공은 빠져 1대0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9회 초 저희 학교의 마지막 공격에서 투아웃 주자 2,3루에서 4번타자가 친 공은 플라이 아웃으로 외야수 글러브 안으로 빠져 들어가 저희 학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역예선 준우승을 하였습니다.

이때, 저 뿐만 아니라 응원단, 학교 관계자 모두가 울고, 특히 저희 학교 투수와 포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울었습니다. 이때 폭투가 아니었다면, 투수가 제대로 잡았다면, 고시엔에 갈 수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하기도 합니다. 당시 2학년이던 녀석은 (친한 친구죠) 야구를 그만두고 영업사원으로 지내고 있는데, 가끔 제가 일본을 방문하거나, 그 친구가 한국을 오면 그 당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가 우리 야구부의 전성기였고, 뜨거운 여름의 추억이었다고.

오늘 아오모리현 여름 고시엔 지역예선 결승에서 12회말까지 1대1로 팽팽하게 유지되던 승부가 투수의 폭투로 인해 1점이 헌납되는 경기를 보면서 문득 00년 저의 여름이 생각나더군요. 야구를 무척 좋아하고, 좋아하는 프로팀도 있고, 프로의 야구에 많은 재미를 느끼고 있지만, 열정하나 만큼은 고교야구의 또다른 매력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2015년 여름 고시엔 지역예선이 슬슬 마무리에 접어두고 있는 상태에서, 올해 저희 학교는 역시 1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 그래도 야구를 좋아하는 후배들이 있다는게 매우 부럽고 자랑스럽습니다.

2015년 여름에는 과연 어떤 명승부가 펼쳐질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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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22 17:02
수정 아이콘
저희 학교는 제가 3기 졸업생인 신설 학교인데다 외고라 운동부가 아예 없었습니다.
다른 외고들이랑 연합 체육대회를 한 추억이 있긴 한데... 그래도 고시엔이라니 뭔가 멋있네요!
천하제일 야구대회의 문턱까지 가다니!
지나가다...
15/07/22 17:03
수정 아이콘
어린 선수들을 갈아넣는다는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그게 고시엔의 매력이며 일본의 프로야구를 지탱하는 근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야구부가 있는 학교 4,000개가 사실 허수라 하더라도 야구를 하는 학생들(과 응원하는 학생들)의 고시엔을 향한 꿈과 열정은 레알이니까요. 심지어 그 학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바다 건너에서 티비로 시청하는 사람까지 눈물을 흘리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죠.
그래서 저는 고시엔을 비판하면서도 고시엔을 사랑합니다.
15/07/22 17:0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어느 현 사셨나요? 약팀의 지역예선 결승 진출이라.....대단한 사건이었네요. 강팀에게 1점차로 졌다니 너무 아까우셨겠습니다.

정작 오늘 열렸던 아오모리현 결승은 케세라세라님의 상황과 완벽히 반대였네요. 와일드피치로 져버린 팀은 해남-지학고 이상의 초강팀이었고 이긴 팀은 지역예선에서도 2,3회전 탈락만 반복하는 동네 공립고교였으니 북산보다도 약간 나은 정도였으려나요.
케세라세라
15/07/22 17:24
수정 아이콘
나라현에 살았었습니다. 아버지 업무로 인해 2년 있었는데 참 좋았었습니다.
15/07/22 17:30
수정 아이콘
2000년 나라현 대표라면 코오리야마 고교네요. 지금이야 영 아니지만 그땐 무지 강했죠.
근데 검색해보니 고시엔 본선에서는 이 학교도 1회전에서 0:12로 초전박살. 아아 전국의 벽은 높아요.......
15/07/22 17:04
수정 아이콘
지역예선 준결승이 아니라 준우승이 아닌가 싶어요.
야구에서 은근히 뒤로 빠뜨리는 경우가 결승점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범호 선수를 뒤로 빼는데....
마술사얀
15/07/22 17:10
수정 아이콘
네. 중간에 준결승이라고 해서 글이 제대로 안읽혔습니다. 수정해주시면 다른 분들이 읽기 편하실것 같아요.
케세라세라
15/07/22 17:18
수정 아이콘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15/07/22 17:08
수정 아이콘
일드 '약해도 이길수 있습니다'를 연상 시키는 글이네요.
좋은 추억, 행복한 추억을 가지고 계시군요. 일생에 뜨거웠던 여름이 한번이라도 있었다는 건, (앞으로 또 많이 생기시겠지만)
축복이 아닐까요. 멋집니다.
부평의K
15/07/22 17:13
수정 아이콘
뭔가 고시엔은 특별한것이 느껴지기는 합니다. 기존과는 다른 야구소년들의 꿈의 무대라는 느낌이 제대로 오는...
사구삼진
15/07/22 18:07
수정 아이콘
제가 하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케세라세라님의 학교 야구부는 동호회 수준이라 하셨고, 상대는 직업 선수를 목표로 하는, 지역 예선 결승까지 올 수준의 팀인데, 팽팽한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전국 S급에 스카우트가 올 정도면 프로급의 선수도 있을테고, 고교 야구에서 그 정도 선수가 있는 팀과 없는 팀이 경기를 한다면, 서로의 수준이 아예 달라질 텐데요...

일본 고교 야구는 직업 선수를 목표라 하는 팀과 그렇지 않은 팀과의 차이가 매우 큰 편은 아닌 건가요?

케세라세라님 모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신기해서 여러 분들께 여쭈어 봅니다.
Dr.Pepper
15/07/22 20:07
수정 아이콘
야구는 리그에서 꼴찌도 3~4할정도의 승률을 기록하는 스포츠입니다.
타자도 10번 중에 3번만 치면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스포츠이기도 해서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 소위 말하는 기적이 자주 일어나는 편입니다.

우리나라도 2006 WBC였나 세계 올스타급 미국팀을 상대로도 이기기도 했었구요.
물론 당시 우리나라 선수들도 잘 했지만, 그렇게 이기리라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전력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동호인 수준이라곤 해도 매일 방과후 연습하는 팀들이 어이없는 실책을 하거나 하는 정도의 수준도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구삼진
15/07/22 20:18
수정 아이콘
기본기가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저는 사회인 리그 3,4부 급이라 생각했네요.

답변 감사합니다.
15/07/22 20:58
수정 아이콘
야구는 팀 경기이기도 하지만, 피처의 원맨 경기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약한 팀이라도 상대팀 타자들을 압도하는 강한 투수 한명만 있으면 지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도 8회까지 0:0으로 투수전이었다고 한 것 같은데요.
사구삼진
15/07/22 22:01
수정 아이콘
동호회 수준의 팀이라고 하셔서 전국구 팀의 타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투수가 없을 거라는 편견을 제가 가지고 있었네요ㅜㅜ

훌륭한 투수가 있다면 비슷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면왕 김수면
15/07/23 06:23
수정 아이콘
고시엔 진출이 최초인, 모두가 바라는 여름이라. 뭔가 <터치>스러운 느낌입니다. 혹시 야구부 에이스가 실은 쌍둥이었다든지, 학교에 체조부가 있었다든지...
케세라세라
15/07/23 10:36
수정 아이콘
하하, 아쉽게도 그런 만화 같은 인물은 없었고, 당시 그 투수 선배가 정말 뛰어났다는 것만 기억납니다. 지금은 뭐하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15/07/23 11:08
수정 아이콘
그런데 다니시던 고등학교가 [2000년 여름 나라현대회 준우승]을 거둔 것이 맞나요?

그 해 여름 나라현 지역대회 결승은 코오리야마 고교 vs 치벤 학원이었는데,
1) 코오리야마는 1:0이 아니라 5:3으로 이겼고,
2) 코오리야마에게 패한 치벤 학원은 그때나 지금이나 프로선수를 밥먹듯이 배출하는 명문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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