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KF-21 초도 비행 기념 T-50/FA-50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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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T-50/FA-50 이야기 2편 - 개발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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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T-50/FA-50 이야기 3편 - (개발사2) 탐색 개발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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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T-50/FA-50 이야기 4편 - (개발사3) 초음속 훈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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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상 본문은 반말체임을 양해 부탁 드립니다.
[T-50 홍보]
몇 년 후 이지만 T-50 체계 개발이 진행 되기 위해서는 일단 이 사업 자체를 홍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전박사는 한국에 돌아갈 일이 있을 때 마다 국방부 관계자들을 만나 이 사업의 당위성과 중요성을 홍보하고 다녔다. 이런 노력 덕인지 국방부 내에서는 T-50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인사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는 몰라도 94년 10월에는 기자단이 미국에 위치한 설계 사무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T-50 체계 개발이 진행 되면서 가끔씩 기사가 나갔고 일반인들의 관심도 조금씩 높아지던 때였다. 하지만 전 박사는 크게 긴장이 되었다. 기자단이 좋은 기사를 써 준다면 일반인들에게도 여론을 환기시켜 사업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만의 하나 안 좋은 기사를 쓴다면 그야말로 큰 낭패였기 때문이다.
전 박사는 12명의 기자단을 맞아 열과 성을 다해 브리핑과 홍보를 했다. 다행히 기자들은 호의적이었으며 한 기자가 전 박사가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편지가 국방부의 고위 관계자들을 감동 시켜 국방부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귀 뜸 해 주었다. 사실 전 박사는 일면식도 없는 국방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매우 두려웠지만 용기을 내어 편지를 썼는데, 다행히도 그 편지가 긍정적 효과를 낸 모양이었다. 편지를 받기 전까지 장관은 T-50 사업에 대하여 보고를 받은 적이 없어서 T-50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T-50에 관한 기사들이 나오면서 일반인들도 T-50 사업에 대하여 조금씩 알게 되었다.
[공군참모총장 김홍래 장군 방문 - 94년 12월 1일]
전박사는 94년 8월 경 신임 공군참모 총장인 김홍래 장군에게 편지를 써서 미국에 있는 설계 사무실을 방문 해 주실 것을 부탁 드렸다. 총장은 미국에서 열리는 KFP 출고 기념식에 참석할 때 설계 사무실에 방문하겠다고 알려왔다.
지난 조근해 공군참모총장 때도 그랬지만 소요군인 공군이 이 사업을 강력히 지지해 주지 않으면, 청와대고 국방부고 그 어디도 설득이 불가능 했기에 공군참모총장에게 이 사업을 중요성을 납득 시키는 것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전 박사는 설계 사무실을 방문한 총장에게 T-50 사업의 중요성과 밝은 시장 전망 등을 역설한 후 공군의 확고한 개발 의지 표명을 건의 했다.
총장은 훌륭하다는 말씀과 함께 이 사업은 체계 개발이 꼭 되어야 겠는데 공군이 개발비를 감당 할 수 없어 큰 문제라고 하였다.
"총장님, T-50은 반드시 개발 되어야 함을 공군에서 먼저 공식화 해 주십시오. 그리고 공군은 재원이 없으니 정부에서 지원을 해 주어야 한다고 대정부 활동을 집중적으로 하시면 됩니다."
사실 감히 총장에게 하기엔 어찌 보면 건방진 말이었지만, 전 박사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총장은 "허허" 웃을 뿐이었다.
이어 이어진 록히드 경영진과의 면담에서도 전박사가 부탁한대로 록히드 경영진은 록히드 사의 투자 의지와 사업의 장래성을 강조했다.
록히드 경영진과 면담이 끝난 뒤 총장은
"전 박사. 정말 고생이 많네.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 자네 같은 사람이 보상을 받고 진급도 되어야 하는데….."
하고 말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군인의 꽃 별을 달 수 있다는 얘기에 참으로 기쁜 얘기였지만, 전 박사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전박사는 진급 하게 되면 일선 개발에서 손을 때고 공군으로 돌아가 사업관리나 2년 정도 하다가 전역 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었다.
"총장님, 저는 진급보다도 이 사업이 체계 개발 되기만을 바랍니다. 제 꿈은 엔지니어로서 이 비행기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진급은 다른 공군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총장님. 이 사업이 꼭 진행 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전 박사는 정말 이 사업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군. 나도 이 사업이 잘 되도록 노력함세".
신임 총장 역시 이 사업에 강한 의지를 보여 전박사는 정말 기뻤다. 재경원, 국회, 대통령 재가 등 갈 길은 멀고 멀지만 일단 무엇보다 중요한 공군의 의지가 확인 되었으므로 전 박사에게는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T-50 사업 기획단 구성 - 94년 12월]
공군 참모 총장의 방문 이후 공군의 개발 의지는 더욱 확고 해 졌으며 국방부에도 이런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국방부에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T-50 사업 기획단(T-50 PPO: Program Planning Office)"가 구성 되었다. 사실 이 조직의 책임자는 전 박사가 가장 적절했고 국방부도 전박사에게 사업단장 자리를 제의했지만 전박사는 거절했다.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은 사업 관리가 아니라, 엔지니어로서 비행기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탐색 개발은 1년 후인 95년에 끝나기 때문에 가능하면 이듬해인 96년 부터 체계 개발이 시작되어야 했다. 사업단의 역할은 체계 개발을 위한 대정부 홍보 활동과 더불어 체계 개발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사업단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체계 개발을 국과연 주도로 할 것인지 업체 주도로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민감한 문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국과연 주도 vs 업체 주도]
사실 우리나라의 국방과학연구소는 많은 다른 나라에서 벤치 마킹하는 대단히 훌륭한 성공 사례이며, 오늘날 방산 강국 대한민국을 만든 일등 공신이라 하겠다.
국방 과학 연구소(국과연)는 대한민국에 이렇다 할 산업 기반이 없던 1970년대 부터 영세한 산업체를 대신 해 국가 주도로 첨단 무기들을 연구, 설계, 개발 해 왔다. 특히나 초기에는 대부분의 탐색 개발 및 체계 개발까지 모두 담당했으며 무기 체계를 완전히 개발 해서 설계도와 기술을 업체에 전수 해 무기를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당시에는 국내에 변변한 방산 업체가 없거나 있어도 수준이 너무 낮았다. 또 첨단 무기 체계를 개발 할 만한 연구비를 조달 할 능력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방식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정책이나 기관도 명과 암이 있듯 이러한 방식도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무기 체계가 첨단화 되고 고가의 장비가 되어 가면서 국내군의 소요만으로는 경제성이 없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었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과연과 달리 업체들은 이윤을 남겨야만 고용을 유지하고 재투자를 할 수 있으므로 해외 수출이 날이 갈수록 중요해 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외 수출을 하려면 업체로서는 여러 해외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 대한 기민한 대처가 중요한데, 핵심 기술에 대한 권리가 업체가 아닌 국과연에 있기에 여러 문제가 파생 되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있다고 해서 간단히 이런 기술 권리를 함부로 업체에 넘길 수 없다. 첫번째 이유로는 첨단 군사 기술에 대한 보안 문제가 있고, 두번째로는 국민의 피땀 어린 세금으로 개발한 소중한 기술을 사기업에 넘기는 것은 일종의 특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과연과 업체의 협업 체계는 무기 개발과 생산에는 좋지만 비즈니스 측면에서 단순히 처리 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나라의 경우 2000년대 이 후 방위사업청(방사청)이 출범하면서 방사청에서 이런 문제를 어느 정도 적절히 관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업체들의 능력이 신장 되면서 국과연은 주로 5, 10년 짜리 장기 프로젝트나 선도, 핵심 기술 개발을 맏고, 기술의 상용화나 체계 개발 등은 점점 업체 쪽으로 넘어가는 추세이다.
그러나 이 당시는 1995년이었기에 방사청도 존재하지 않았고, 아직은 업체 주도 개발이 드물던 시기였다. 또한 T-50은 당시로서는 단군 이래 최대의 무기 개발 사업이었기에 더욱 더 민감한 문제였다.
국과연 주도냐 업체 주도냐의 문제는 잠재 된 커다란 화약고와 같았다.
[록히드의 투자 조건]
드디어 록히드가 투자 의향서를 보내면서 투자 조건을 통보 해 왔다. 다른 몇 가지 조건이 있었으나 가장 중시 한 조건은 바로 개발 시 한국 측 파트너는 국과연이 아니라 업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록히드 입장에서 이 사업에 투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장사를 하겠다는 것, 즉 돈을 벌겠다는 것이었으므로 비즈니스 마인드가 없는 연구소와는 같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군수 산업 역시 민간 경쟁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었기에, 록히드는 국과연 중심의 한국 개발 체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전술한 것 처럼 당시에는 방사청 등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비즈니스 상에 관련 된 문제를 조율 해 줄 정부 기관도 없었다.
비즈니스를 중시하는 록히드의 입장에서 고객의 요구에 따라 개조를 할 수도, 판매 후 문제가 생겼을 시 책임 소재도 불분명 할 수 밖에 없는 '국과연 설계 + 업체 제조'의 한국 방식은 문제 투성이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이 투자 의향서를 받은 전 박사는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전 박사 역시 국과연 소속이었고, 지금까지 피 땀 흘려 가며 개발 해 온 결과물을 모두 업체에 넘기라는 소리였기에 쉽게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만에 하나 전 박사가 받아 들인다고 해도 국과연 조직 전체가 발칵 뒤집어 질 만한 일이었다.
밤 새운 고민 끝에 전 박사는 어찌 되던 사업이 성공하는 정도를 가기로 결심한다. 무엇이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해 전 박사는 해외의 각종 사례를 수집 하고 그 결과 대부분의 경우는 결국 업체 주도의 개발, 즉 설계자와 제작자가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전 박사는 업체 주도 개발이 정도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앞이 캄캄했다. 국과연을 설득 하려니 얼마나 많은 오해를 받을지 뻔히 예상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 왔듯 정도라면 정면 돌파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조직의 배신자]
사실 전박사는 전투기 자체 개발의 꿈을 가진 이후로 계속해서 국과연에서 몸 담아 왔고 조직에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판단 해 보건데 국과연 내에서도 소장을 비롯 해 많은 사람들이 전 박사를 인정하고 좋게 보았을 것으로 보인다. 예산 배정 시 퇴짜를 놓은 상관들도 사실 전 박사의 요구가 관례에 비하면 상식 초월이기도 한 데다가 전 박사 요구대로 다 했다가는 아예 사업이 엎어질 것을 걱정해서 결제를 안 해주었다고 보는게 맞다고 본다. 또 한 전 박사의 열정과 능력을 지지하고 인정하는 동료들도 많았으며, 국방부 등을 설득할 때 연구 소장을 비롯 많은 이들의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전제 조건이 있었는데, 전 박사는 같은 국과연 동료고, T-50 사업은 국과연 사업, 즉 우리 사업이라는 것이다. T-50은 누가 보아도 무리해 보였지만 반대 급부로 사업이 진행 될 수록 거대 사업이었기에 국과연의 일감도 커졌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전제 조건 자체가 깨질 판이었다. 아니 깨진다기 보다 180도 방향을 바꾸어서 우리 사업을 남한테 거저 넘기는 도둑놈 같아 보이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전 박사는 95년 5월 귀국하여 3본부(항공 무기 체계 개발 본부)에서 설명회를 열고 지금까지의 상황을 브리핑하며 업체 주도 개발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묵묵부답이었다.(아마 전박사가 상급자여서 아무 말도 못 했을 것이다.). 모 박사가 강하게 항의를 했다. 본부장 역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박사는 미국으로 돌아와 같이 일하고 있던 연구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죽 쒀서 개 주냐'는 것이었다.
한 편 감독관으로 파견 된 공군 인원들은 전 박사의 논리를 이해했기에 전적으로 업체 주도 개발에 동의 했다.
전 박사는 업체 주도로 가더라도 현재의 국과연 요원들이 그대로 참여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사실 어떤 연구원이 안정된 국가 연구소에서 사기업으로 이직을 하겠는가?
95년 10월에 미국에서 설계 점검 회의가 열렸고 여기에 국과연 전문가들과 3 본부장, 그리고 부소장이 참여했다. 설계 회의가 끝나고 국과연 인원들끼리 토론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전 박사는 업체 주도 개발로 가야하는 이유를 온갖 당위성을 들어 설명을 했다. 그러나 국과연 사람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물론 지금 와서 보면 전 박사의 말은 당연히 정론이지만, 아마 내가 연구원이었어도 건국 이래 최대의 프로젝트라는 사명감에 열심히 달려왔는데 하루 아침에 남에게 그 성과를 넘기자는 말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연구원들 보고 사기업으로 옮기라는 것도 사실 말이 안 되고….
토론이 계속 되었지만 분위기는 험악해 지기만 했고 연구원들은 이제 인격적 모욕을 주는 말도 서슴이 없었다. 모 실장은 "국과연이 싫으면 떠나면 될게 아니냐?"고 말하기 까지 했다. 새벽 2시 30분에 이르기까지 다른 연구원들은 똘똘 뭉쳐 전 박사를 공격할 뿐이었다.
[연대서명 파동 - 94년 10월 21일]
다음날은 본부장과 숙소에서 따로 면담이 있었는데 본부장은 전 박사에게 호통을 쳤다. 이전에 다른 연구원들과의 면담이 있었는데 거기서 당연히 전 박사에 대한 안 좋은 피드백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말하길
"T-50 사업을 국과연에서 해야 하는데 너는 왜 업체에서 해야 한다고 그러느냐. 미국에 있는 국과연 연구 요원들이 나한테 연대 서명장을 들고 왔어"
하는 것이었다.
전 박사는 연대 서명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수 밖에 없었다.
본부장이 귀국한 후, 전 박사는 연대 서명에 관한 내용을 확인 해 보았다. 연대 서명은 현재 설계팀에서 6명, 이번에 한국에서 방문한 인원 중 4명으로 총 10명이 했으며, 그 내용은 대략 국과연에서 곧 전 박사를 징계 할 것이며 연대 서명에 참여한 2명의 수석 엔지니어가 업무를 이어 받을 것이란 것이었다.
문제는 이 연대 서명을 본부장에게만 보고한 것이 아니라 사방 팔방 퍼트려 록히드 측 연구원 들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록히드 측에서는 깜짝 놀라 이 사태를 묵과 할 수 없으며 지휘 계통을 통하여 한국 국과연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겠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 연대서명 파동은 사팡 팔방에 알려져 걷잡을 수 없이 큰 이슈가 되었다.
분노한 전 박사는 이 일을 해결할 생각에 본부장에게 전화를 했으나 돌아오는 본부장의 대답은 네가 일부러 일을 키우려고 여기 저기 퍼트렸다는 질책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전 박사는 미국측 인원들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서면으로 작성해서 보내 달라 부탁하고 이를 보고하기 위해 국과연으로 귀국한다. (94.10.29 ~ 11.18)
그러나 국과연에 돌아와 보니 연대서명이 여기서도 진행 되고 있었다. 분노한 전 박사는 본부장을 찾아가 항명 주동자 2명을 한국으로 귀국 조치 할 것을 건의 했으나, 본부장은 되려 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질책 할 뿐이었다. 전박사는 분노와 서글픔만을 안은 채 미국으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던 공군 사업관리단의 고 모 중령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개하며 공군에 보고 했고, 이 내용은 공군 참모 총장과 기무 사령관을 통해 국방부 장관에게까지 보고 되었다.
이에 국방부 장관은 특검을 지시, 기무 사령부에서 사건 조사를 위해 미국으로 날아왔다. 조사를 맡은 성 모 중령은 전 박사를 비롯 연구원들, 록히드 및 공군, 업체의 연구원들을 모두 만나 사건을 조사 했으며 결국 전 박사의 생각이 옳고 잘못이 없는 것으로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국방부 장관은 국과연 소장과 본부장을 불러 "전 박사는 T-50 사업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때 장관의 비호가 없었다면 전 박사는 아마 국과연에서 면직 당했을 것이다.
이 후 본부장은 전 박사의 전화 통화 내역까지 조사, 보고토록 했고 전 박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전 박사는 항명 주동자인 수석 엔지니어 2명을 귀국 시킬 것을 요청했지만 본부장은 거부했고 이 2명은 계속 남아서 연구실의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본부장은 전 박사의 일에 하나하나 간섭하며 거부를 했기 때문에, 전 박사는 말이 책임자이지 허울 뿐인 상태였다. 전 박사는 이 상태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괴롭기만 했다.
[연구소장 및 본부장 교체]
이러던 차에 국방부 장관이 국과연 소장의 연임을 거부하여 연구 소장이 교체 되었고 이에 따라 3 본부장도 교체했다.
이 3 본부장이 교체 될 때 신임 연구 소장은 공군참모총장을 방문하여 추천을 받았는데 총장은 전 박사를 추천했다. 또한 공군의 요직에 있는 다른 장성들도 대부분 전 박사를 추천했고 항사 단장은 특히나 3 본부장은 반드시 공군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국방부 장관에 전할 것을 명하고 출장을 떠났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장관에게 전달 되지 못 했고, 연구소장은 전 박사를 2순위로 추천했기에 1순위로 추천 된 다른 인사가 3 본부장이 되었다.
전 박사는 이 교체 후일담을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되었는데, 어차피 본인은 개발 외에는 다른 업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본부장 보직을 받았어도 거부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소장과 본부장이 교체 되었지만 전 박사는 여전히 국과연의 미운 오리 새끼, 아니 공공의 적이었다.
[체계 개발 방식 선정 - 95년 6월]
국방부 T-50 사업 기획단(PPO)에서는 95년 2월까지 국과연과 삼성 항공에 체계 개발 방안을 제출하도록 지시했다.
당연히 국과연은 체계 개발을 따 내기 위해 결사적이었으나 반대로 삼성 항공은 미온적이었다. 사실 삼성 항공은 한 번도 스스로 비행기를 개발 해 본 적이 없었고 업체 주도로 개발하다가 만의 하나 일이 잘못 되기라도 하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까딱 잘못 하면 회사가 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반대로 국과연이 개발을 하게 되면 자신들은 개발 실패에 대한 책임 없이 국과연이 주는 설계도 대로 생산만 하면 되기에 훨씬 부담이 없었다. 따라서 삼성 항공은 사실 국과연 주도를 선호하고 있었다.
이에 전 박사는 업체의 장래를 위해서도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도 이 사업은 업체 주도로 가는 것이 정석이며 지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2,30년은 자생력을 키울 기회가 없을 거라고 설득했다. 또한 록히드가 투자 하기 때문에 록히드 역시 투자금을 회수 하기 위해 반드시 사업을 성공 시킬 것이라 설득했다. 이런 설득 덕분에 삼성 항공 쪽에도 업체 주도로 해 보자는 분위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삼성 항공도 체계 개발안을 제출 했고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국방부 PPO는 전박사의 논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공군 입장에서도 업체에 맡기면 업체에서는 망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업을 성공 시키려 할 것이란 계산이 있었다. 설사 만의 하나 실패 하더라도 업체에 배상금을 물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전박사의 설득으로 장래 항공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이것이 정도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1995년 6월 국방부 PPO는 체계 개발 사업을 업체 주도로 진행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