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을 보고 왔습니다. 이창동 감독 영화 중 최고로 꼽고 싶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여러 생각들이 떠올라서 오랜만에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립니다.
스포일러가 많으니 영화 보지 않으신 분은 읽지 말아주세요.
1. 종수의 지쳐 있는 모습=젊은이들의 지친 모습
처음부터 지쳐있는 모습을 시종일관 유지합니다. 힘찬 모습은 거의 보여주지 않고 있죠. 이는 힘들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아인의 이 연기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약간 부어있는 듯한 눈두덩이부터, 빗속을 쳐진 어깨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 등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유아인의 인생작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2.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Blow up(한국제목:욕망)”
버닝을 다 보고 나서 떠오른 영화는 blow up이었습니다. 아마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 것 같습니다.
http://youtu.be/ItDmn40TvuI
blow up의 주인공 토마스는 사진작가입니다. 그의 직업으로 대변되는 그의 성향은 보이는 것을 믿는다(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이죠. 그런 그가 자신이 찍은 사진을 확대(blow up) 하던 중 살인 장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흥분해서 그 장소로 가서 시체를 확인하게 되죠. 자신이 눈으로 본 것으로 확신을 가진 후 집에 돌아오니 필름은 사라진 후였습니다. 친한 지인에게 이 사실을 얘기해보지만 마약에 취해있던 지인은 듣는 둥 마는 둥 합니다. 다음 날 다시 살인 현장을 방문했을땐 이미 시체는 사라진 후였습니다.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이 과연 진실이었나 헷갈리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오던 도중에 위의 장면이 나옵니다. 마임을 하는 무리들이 있지도 않은 공과 라켓을 가지고 테니스를 치죠. 그것을 유심히 보다가 마임 테니스를 치던 사람들에게 공을 좀 주워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는 공이 있을 법한 위치로 가서 그 공을 던져 줍니다. 그후부터 마임 테니스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테니스 치는 소리가 들리게되죠. 즉 눈으로 보는게 다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버닝에서 중요한 소재인 마임과 우물, 고양이 보일, 해미의 소재, 벤의 죽음은 이에 맞닿아 있습니다. 우물은 존재했을까요, 존재하지 않았을까요? 고양이 보일은 과연 존재했을까요? 주차장에서 종수에게 안긴 고양이는 과연 보일이 맞을까요?(해미집에서 그렇게 보일아 라고 불러도 안나오던 녀석이 한번 불렀다고 바로 종수에게 안기는게 정상적일까요?) 벤이 과연 실제로 죽었을까요, 아니면 종수의 소설 속에서 죽었을까요?
3. 소름끼쳤던 저수지 장면
벤의 뒤를 따라가던 종수가 벤의 모습을 발견한 곳은 한 저수지였습니다. 저수지에 포르쉐를 세워놓고 저수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벤과 그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종수를 롱샷으로 찍습니다. 배경이 너무 아름다웠죠. 늦가을 단풍이 물든 산이 저수지에 비칩니다.
벤은 마치 작품 감상하듯 지긋하게 저수지를 바라봅니다. 마치 자기가 만든 작품처럼 말이죠. 벤의 표정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아마 만족스런 미소를 띄고 있었겠죠.
자연이 만든 작품인 그 경치. 그 속에 잠든 자신의 작품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자신이 제물로 바친 그녀들이 그곳에 잠들어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만약에 거기에 그녀들이 있었다면 수장은 아닐 것이고 화장시킨 후 유골을 거기에 뿌렸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4. 체호프의 총
체호프의 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막에서 총이 나오면 3막에서는 반드시 발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삭제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작품에 총이 나오면 꼭 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수가 아버지 집에 가서 겪는 일 중 하나가 응답 없는 전화기 입니다. 그런데 이 전화기가 울릴때마다 종수는 다음 장면으로 전진을 이룹니다. 전화가 울려서 깬 후 북한 대남 방송을 일어나서 듣게 됩니다. 전화를 받은 후 차키를 발견하게 되고 차와 창고, 금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금고에서 칼을 발견하게 되죠.
두 가지 체호프의 총이 나오게 됩니다. 첫번째는 금고에서 발견된 칼이 언젠가는 쓰일 것이라는
것. 두번째는 응답없는 전화기가 언젠가는 응답이 있을 것.
5. 종수의 아버지의 폭력성
종수는 벤에게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분노조절장애가 있었고 그 때문에 어머니가 떠났다고 하죠.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재판때 꼭 참석을 합니다. 처음 재판 때는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분노의 결과물을 마치 남처럼 바라보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확신한 후 아버지의 최종선고때는 아버지의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고 그런 아버지를 일부라도 이해하게 됩니다.
폭력은 나쁜 것이지만 상대방에게 저항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폭력만이 유일한 해방일 수 있죠. 기성세대들의 무관심, 사회의 압박, 기득권들의 공고함을 깨뜨릴 방법이 없다면 마지막 남은 수단으로 저항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결과가 용산참사일지라도 말이죠.(벤의 가족이 식사하는 곳에 걸린 용산참사 그림을 종수가 쳐다보는 장면은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지만 위의 상황도 담겨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6. 바그다드 카페의 석양과 버닝의 석양
많은 사람들이 인상깊게 본 장면인 석양 속에서 해미가 춤추는 장면은 “바그다드 카페”가 생각이 나더군요. 황량한 네바다 사막의 모텔인 바그다드 카페. 문앞에 있는 의자. 그 분위기. 석양.
http://youtu.be/4R9Z1tm2gSQ
바그다드 카페에선 두 여인 및 여러 외로운 영혼들이 처음 만난 낯선 상황으로부터 점점 서로에게 가까워지고 서로의 영혼을 치유해주는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국의 지친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따뜻한 위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좋은 영화를 만들어준 이창동 감독과 열연하신 배우들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p.s. 마지막에 불탄 포르쉐는 좀 아깝더군요. 그 좋은 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