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05/18 13:56:04
Name Tigris
File #1 burning_01.jpg (24.2 KB), Download : 66
Subject [일반] [스포일러無] 『버닝』 감상이라기보다는 잡담 (수정됨)


 개봉일이었던 어제 저녁,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을 보고 왔습니다. 좀 길게 쓰다가, 스포일러 피하기가 어려워서 다 지웠네요. 간단히만 남겨봅니다.




1.
 2주 전쯤 예매를 해두었고, 어제 아침에 원작 『헛간을 태우다』를 다시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상징이 많고 심어둔 디테일도 많은 스타일이다보니 10대 후반에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읽히는 부분이 꽤 있었습니다. 다 읽고나서 '아마 『버닝』은 모티프와 설정, 인물구도 정도만 따온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겠구나'라는 예상을 해봤습니다. 서사의 대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인 이창동 감독께서 남의 서사로 영화를 만드는 상상이 잘 안되더라고요. 그 예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사실 별 의미가 없죠. 각자의 예상을 품고 직접 보셨으면 좋겠네요.

 제 생각에, 지금까지의 이창동 영화와는 좀 다릅니다. 적어도 제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 기대하는 부분이 이 작품에서는 성취되지 않았어요. 전문가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이지만, 저는 이 영화가 약간 아쉽습니다. 이 부분은 어떻게 돌려말해도 심각한 스포일러가 되니 넘어가지요. 어쨌든 이창동 영화를 좋아해온 분이라면 직접 확인해볼 정도의 가치는 분명 있습니다.




2.
 다른 곳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제가 관람한 영화관은 한산했습니다. 1/6 정도 찬 거 같았어요.




3.
 무대매체에 익숙하지 않은 분은 대사가 전체적으로 낯설게(또는 이른바 '오글거리게')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문어와 구어 사이의 위화감을 장치로 썼기 때문인데… 어느 날 갑자기 연극적 상상력이 충만해지는 것도 어려운 노릇이고 하니, 일단 '저런 사람이 어딨어'라는 식의 경계심을 좀 내려놓고 보는 편이 어떨까 하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꺼내봅니다.  내가 저런 인물을 주변에서 본 적이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4.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보는 게 나을지?' 제 의견은 no입니다. 대체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단독으로 충분히 자립하고 있습니다. 원작을 알 때 눈에 띄는 부분도 꽤 있긴 해요. 원작에 없던 상징, 원작과 명백히 다른 기능을 부여받은 몇몇 대사 같은 것 덕분에 조금 더 작의가 엿보입니다. 영화를 분석적으로 보는 취향이라면 좋을 수도요.

 한편 '영화를 본 후에 원작을 찾아볼 필요가 있을지?'에 대한 의견도 역시 no입니다. 하고자하는 이야기가 달라요.




5.
 연기 좋았습니다. 만장일치의 신들린 연기까지는 아닌 듯하지만, 아슬아슬한 현실성을 호연으로 잘 극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유아인 씨의 연기를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멋지더군요. 각각의 장면에서 영리한 연기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사의 전체에 설득력을 주는 종류의 디테일을 살리는 것이 좋았습니다. 스티븐 연 씨의 호연도 이 영화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절묘한 캐스팅이라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강동원 씨가 이 역을 맡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는데, 저는 지금이 좋게 느껴지네요. 이 영화에는 브레드 피트가 아니라 크리스천 베일이 필요하니까 말입니다. 전종서 씨의 연기 또한 좋았는데, 도입부에 한해서는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원작 대사가 거의 그대로 쓰이는 장면이 있는데, 언어외적인 표현과 어긋나는 바람에 마치 주워섬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입에 담는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허나 도입부 이후의 연기에는 큰 불만이 없습니다.




6.
 어떤 장르를 다른 장르로 다시 만드는 일에는 필연성이 있어야겠죠. 가령 만화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경우, 영화화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따라서 의미가 있을 때에만 영화화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연성이 없으면 진정성도 없고, 그게 심각해지면 만화 원작의 코스프레쇼 영화들이 되는 걸텐데, 음, 어… 아무튼 『버닝』은 흥미롭게도 1984년쯤에 발표된 단편소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런 오래된 이야기를 왜 1) 지금 2) 이곳에서 3) [이렇게] 재현*한 것일까요. 영화가 도날드 트럼프의 몽타주를 굳이 쓸 정도로 '지금'을 강조했으니, 그 의미 또한 '지금'을 중심으로 생각해봄직 하겠지요. 실은,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기대한 어떤 것이 끝내 이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았기에, 저는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게 갔을까, 라는 의문이 계속 남아있어요.


 * : 소설을 영화로 다시 만들었다는 의미 말고, 현실로 현실을 재현하는 리얼리즘 영화의 일반특성을 말하기 위해 재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7.
 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감상이 궁금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자전거도둑
18/05/18 14:12
수정 아이콘
(수정됨)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자꾸 생각나고 얘기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아직 안보신 분들은 혼자 보는거 추천합니다. 일반 관객들에게 장벽이 있는 영화라...
18/05/18 16:15
수정 아이콘
자꾸 생각나고 얘기하고 싶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도 근질거려서 그냥 스포일러 120% 글을 파서 본 사람들끼리 이야기 나누는 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흐흐.
자전거도둑
18/05/18 16:19
수정 아이콘
저도 기다리고있습니다
사슴왕 말로른
18/05/18 14:23
수정 아이콘
(수정됨) 한 쇼트의 우아함은 압도적이더군요. 이외에도 경이로운 장면들이 몇몇개 있어요. 영화적인 순간들.
라푼젤
18/05/18 15:55
수정 아이콘
주제는 너무 명확한데 비해 표현은 너무 도식적이고 쓸데없는 잡스러움이 좀 있는게 단점이긴 하더군요....뜬금없는 사장님처럼 유아인의 극중 캐릭터와 실제 스타 유아인의 캐릭터를 비교하게 하는 건 의도된 것이겠죠?....
18/05/18 16:39
수정 아이콘
그 명료한 주제, 정말로 그게 전부인가 싶은 의심이 계속 듭니다. 하루 지난 지금은, 어째선지 문성근 씨의 대사가 자꾸 신경쓰이네요.
유아린
18/05/18 15:56
수정 아이콘
(수정됨) 지루한데 지루하지 않은 영화였어요,
보고나서 영화 하나로 며칠동안 이야기 할 수 있을만큼 생각할것도 많고..
장벽도 있고 호불호도 굉장히 많이 갈릴꺼같습니다.
저는 180명정도되는 관에 여섯명이서 보고왔네요 흐흐 촌동네긴 하지만..
스포 포함된 버닝글이 올라왔으면 좋겠어요 크크 이해가 잘 안가는부분도 있어서..
돈키호테
18/05/18 16:06
수정 아이콘
유아인 연기력이야
사도에서 증명 되었듯
거대한 스크린에서 송강호와 투샷으로 반반 잘라먹고
송강호의 그 에너지와 내공에 안밀리는 젊은 배우는
남녀 안가리고 사실상 유아인뿐이더군요.
물리쟁이
18/05/18 16:09
수정 아이콘
영화관에서 데드풀2 보려다가 예고를 보게되었는데요.
예고를 보면서 느낀 딱 한가지는 유아인의 여친?주변인물이? 사라지고 스티브 연이 그런 사건과 관련된 인물이며 유아인이 사건을 헤쳐나가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맞나요? 제가 본 인상은 그런데 댓글들을 보면
되게 담담하게 영화가 진행되는거 같은데... 영화자체가
자극적이거나 웃음기없고 담백한가요? 누구랑 같이 보기에는 덜 적합한가요?
친절한이웃
18/05/18 17:14
수정 아이콘
몇 장면 정도만 살짝 피식거리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지루한데 몰입되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네요.
혼자 보거나 마음 맞는 친구랑 보기 좋은 영화입니다. 데이트용은 좀...
물리쟁이
18/05/18 17:16
수정 아이콘
친전하시군요 크크...
웬지 영화는 영화다가 떠오르는군요. 한빈 봐야겠네요
고맙습니다!
18/05/18 16:15
수정 아이콘
[곡성][함흥냉면]이라면 [버닝][평양냉면]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영화가 되게 슴슴한데 곱씹을수록 스며드는 맛이 있어요
친절한이웃
18/05/18 17:12
수정 아이콘
토착성과 드센 기운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유아인씨 연기 참 좋아요. 뜨거운 분노를 바로 발산하지 않고 차갑게 식히는데 공을 들이더군요,
전종서씨는 대사가 좀 어색한데 몸을 정말 잘 씁니다. 몇 몇 장면은 압도적이에요. 대사 치는 능력이 다운그레이드 된 문소리 배우 느낌 납니다.
20대가 보면 더 감정이입할 구석이 많습니다. 의외로 감각이 젊은 영화입니다.
candymove
18/05/18 17:17
수정 아이콘
유아인의 연기는 별로였다고까지 할 건 아니지만 특별히 훌륭하다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베테랑 사도에서 보여줬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기톤을 거의 그대로 반복한다고 느껴졌어요. 잘하긴 하는데 좀 질리는 느낌도 들더라구요. 특히 이번 역할은 꼭 그 톤으로 안해도 될거 같았는데도 또 그런 톤으로... 약간 풀린 눈 어눌한 말투..

스티븐 연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유명한 배우라고 하던데 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 아무런 선입견 없이 봐서 그런지 더 좋게 보였어요. 놀면서 돈 많은 젊은 사람을 잘 묘사한거 같아요.

전종서는 좀 어색하더라구요. 특히 초반부에서 대사 치는게 눈에 띄게 어색해서 약간 놀랐어요.

본문이 스포없음이니 댓글에서 내용을 말하면 안되는거겠죠? 에둘러 얘기하면 재미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재밌다고 하기도 좀.. 평론가들이나 영화를 헤비하게 보시는 분들이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 정도 영화인지 잘 모르겠네요. 은유로 가득차있다고는 하는데.... 일단 형식으로 압도해놓고 내용을 얘기해야하는 것 아닌지... 두루뭉술 찝찝하게 만든다음 알아서 선해해라는 식의 평단용 예술영화라는 평을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박하사탕이나 먹고싶네요.. 극 내내 긴장감 하나는 나름 좋았습니다!
윌로우
18/05/19 00:14
수정 아이콘
여러가지로 하루끼가 좋아할수밖에 없는 영화더군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7025 [일반] 운전 좋아하세요? [60] 장바구니12105 18/05/19 12105 3
77023 [일반] Google Ledger [11] makka8255 18/05/19 8255 1
77022 [일반] 파르마의 세리에A 복귀, 그야말로 영화와 같은 일이 벌어졌네요. [32] 히나즈키 카요13262 18/05/19 13262 17
77021 [일반] 염천교 리턴즈가 종영되었습니다 [164] BIFROST23835 18/05/19 23835 1
77020 [일반] 밑의 대리모 논란을 보고, 몇 가지 기본적인 정보전달. [10] 사업드래군7521 18/05/19 7521 32
77019 [일반] (스포)”버닝”에 대한 여러 생각들 [2] Neo7489 18/05/19 7489 4
77018 [일반] [강력스포] 버닝 리뷰 [26] roobiya13468 18/05/18 13468 3
77016 [일반] 컴퓨터 구매 후기 [19] 삭제됨10842 18/05/18 10842 3
77014 [일반] 법원 "인공수정해 얻은 자녀, 낳아준 대리모가 친어머니" [133] 군디츠마라15363 18/05/18 15363 0
77013 [일반] 일본야구 직관 후기 (feat. 파울볼 주운 썰.txt) [33] BIFROST11766 18/05/18 11766 5
77012 [일반] 초등생 고속道 휴게소 방치 교사 후속담. 벌금 800만원 선고 [130] 사악군21387 18/05/18 21387 2
77011 [일반] [스포일러無] 『버닝』 감상이라기보다는 잡담 [15] Tigris8204 18/05/18 8204 6
77010 [일반] 오스카 연기상을 받지못한 최고의 남자배우 TOP10 [57] 기관총16119 18/05/17 16119 26
77009 [일반] (스포)나의 아저씨. 오랜만에 참 재미난 드라마를 봣네요 [40] 등산매니아10510 18/05/17 10510 8
77008 [일반] Daily song - 먹구름 of 헤이즈,나플라 [3] 틈새시장4584 18/05/17 4584 2
77007 [일반] 해외여행 중 침수된 핸드폰 여행자보험으로 보상받은 이야기 [8] 쿠라17674 18/05/17 17674 3
77006 [일반] 5.22일 한미정상회담이 분기점이 될 거 같네요 [57] aurelius12403 18/05/17 12403 1
77005 [일반] 아픈 아이 하루 돌보기 [23] 글곰8131 18/05/17 8131 26
77002 [일반] 담배를 바꾼지 한달 (후기) [48] Janzisuka17453 18/05/17 17453 0
77001 [일반] ??? : "홍대몰카 경찰수사 신속?...여성이 신고했을 때는 늑장" [258] 동굴곰21189 18/05/17 21189 10
77000 [일반]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콜세지가 우상으로 모시는 일본인 감독 [36] 기관총16317 18/05/16 16317 12
76999 [일반] 못 하겠다, 도저히 못 하겠다 [75] 글곰13159 18/05/17 13159 15
76998 [일반] 한끼의 식사 (스압) [65] 비싼치킨11108 18/05/17 11108 4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