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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4/23 21:34:28
Name 새님
Subject [일반] 곡우 지나 4월 21일




 4월 21일.





 곡우가 어제였다. 이십사절기의 여섯 번째 절기로 봄비가 내린다. 곡물들이 빗소리에 잠을 깨고 농부가 못자리를 마련한다. 올 한 해 백곡을 기름지게 하소서. 볍씨가 담긴 가마니는 아즉 솔가지로 덮여 있다. 서울 창 밖은 맑다. 오늘은 아니지만 내일 오후 즈음하여 비가 온다고 한다.


 아침부터 동생이 여자친구 생겼다며 자랑을 한다. 심드렁한 반응에 뭐 할 말 없냐고 졸라 대길래 솔직히 말을 해 주었다. 누구를 만나든 관심 없으니 피임만 잘 하렴. 오년 만에 첫 여자친구를 사귄 동생의 턱이 떡 하고 벌어진다. 제가 참 좋은 누나를 둔 것 같습니다. 나는 그걸 이제야 알았냐고 면박을 준다.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던 가수의 부고를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 오랜만에 그의 노래를 꺼내 들었다. 두 곡 밖에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여섯 곡 쯤 아는 것 같다. 오랜만에 하늘이 맑다. 벚꽃이 진 자리를 작은 연녹색 잎이 밀어 올린다. 화단에는 튤립과 양귀비가, 돌틈에는 제비꽃, 봄까치꽃, 쇠별꽃이 피었다. 태양이 드러난 목덜미를 은근하게 달궈온다. 내가 눈 감은 동안 세상이 이만치 변했다. 발을 잘게 구른다. 거리의 자동차 소리, 주말 오전 장사를 준비하는 시장 소리가 한 쪽 귀에, 요절한 청년의 목소리가 다른 귀에 꽂힌다. 저녁에 좋아하는 LP바에 가서 이 친구의 노래를 틀어달라고 해야겠다. 정신 팔다가 골목에서 오토바이와 부딪칠 뻔한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올해의 첫 판모밀을 개시하러 갔다. 부쩍 더워진 날씨에 줄이 제법 길다. 식당에는 앞문과 뒷문이 있는데, 앞문에 줄 선 것을 모르고 뒷문으로 들어와 앉는 손님이 많다. 그때마다 조선족 아주머니가 앞문으로 가라고 소리를 지른다. 뒷문을 닫으면 되지, 생각했는데 그쪽은 화장실 가는 길이란다. 기억을 배반하지 않는 맛을 곱씹으며 우리는 슬쩍 웃는다. 인생의 앞과 뒤, 그리고 그 사이에도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음을 깨닫고 즐거워한다. 그래서 메밀이야 모밀이야? 일단 이 집은 모밀이야. 몰라, 삶은 메밀과 모밀 사이 어디쯤에 있는 거야.


 커다란 서점을 가득 채운 책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간신히 책 한 권을 써도 출판 되기가 어렵고, 출판이 되어 서점에 들어오기는 더 어렵고, 여기서 누군가에게 선택받기란 더더욱 어렵다. 나는 그런 간절함 속에 태어난 책 몇 권을 집었다가, 후루룩 넘겨보고 다시 내려놓는다. 이 뛰어난 문장들과 사색 속에서 감히 내가 그렇게 한다. 독자는 편협하고 냉정하다. 이따 친구를 만나면 - 그녀는 십 년도 전부터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 어떤 책을 쓰고 싶으냐고 물어봐야겠다. 보통의 나는 겁이 많아서 그런 질문을 두려워하지만 오늘은 무슨 일로 용기가 난다.


 책을 사시면 장미꽃을 한 송이 드립니다, 하기에 책을 두 권 샀다. 무한한 우주와 우리 있는 찰나에 관한 책을 한 권 샀다. 반대쪽 손에는 꽃을 들었다. 다른 한 권은 분산전원의 배전에 대한 계통연계 설명서다. 그래도 공평하게 장미꽃을 주더라. 싱그러운 꽃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어제 밤 뒤뜰에 버린 꽃바구니가 생각난다. 이 장미꽃은 며칠이나 갈까? 꽃병에 꽂힌 장미는 산 것 일까, 죽은 것 일까? 그는 더 이상 뿌리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지 못한다. 물 몇 방울과 잿불처럼 남은 잎 몇 개로 식탁의 노란 전구 아래서 광합성을 계속하는 건 - 살아있는 것인가? 사지가 잘린 채 호흡기를 떼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죽어가는 너를 박제해 둔 것이나 다름없겠구나.

 서점을 나와 근처를 한바퀴 도는데 저만치 요란한 시위 소리가 빌딩 숲 가운데를 메아리친다. 오늘 저기 뭐 하는데? 친구에게 물으니 니가 생각하는 그런 시위를 하고 있단다. 굳이 가까이는 가지 말자고 한다. 나는 그러마 고개를 끄덕인다. 날이 맑아 저만치 경복궁과 청와대가 보인다. 그 뒤로 북악산이 보인다. 노란 천막의 빈자리는 흔적없이 메워졌다. 산자락에 발을 얹고 산 자들이 끝없이 광장을 외친다.

 한적한 맥주 가게에 앉아 어린 고양이 새끼와 육아, 그리고 냉동 난자와 수정란 냉동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당장 낳기 힘든 상황이면 난자나 정자를 냉동시켜. 수정란 냉동이 더 확률은 높대. 생각보다 돈도 얼마 안 해. 1년 보관료가 이삼십만 원? 문득 궁금해진다. 누군가 죽고 나서 몇백 년 후 그 세포를 활용해 아이가 태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이건 쥬라기 공원류의 복제물과는 이야기가 다르다. 시간을 뛰어넘어 부모 없이, 부모 모르게, 세상과의 접점조차 없는 아이가 태어난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그는 우리와 같은 종種인가? 누가 그 아이의 행복을 빌어줄까? 이 우주에서 그는 행복할까?

 명동 성당 뒷마당에 앉아 크리스마스에 그 곳이 얼마나 붐비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기 오면 방송사 종류별로 다 만날 수 있어. 날도 추운데 아나운서들 예쁘더라.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한 친구가 떠올랐다. 그는 최저 임금 받고 아나운서 하다가 때려치우고 그보다 못한 최저 임금 받고 작가질을 하고 있다. 그녀의 빈한한 지갑과 출판은 커녕 쓰레기통에 처박힌 원고들이 떠올라 우울해지려는 찰나, 신부님이 전례복 자락을 휘날리며 경쾌하게 뛰어가신다. 스테인드 글라스가 보고 싶어 그를 따라 들어가 앉았더니 미사가 시작되고 찬송이 울려퍼졌다. 우리는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신이 그곳에 계시든 계시지 않든, 아멘.

 성당 앞마당에 매어진 자전거 잠금쇠를 끌르다가 옷에 새똥을 맞았다.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보자 참새만한 새 무리가 이 가지 저 가지를 넘나 들며 요란스레 재주를 부린다. 야, 너 집에 가는 길에 로또 사라. 이런 일에도 웃는 낯으로 격려해주는 이 친구를 참 좋아한다. 네가 며칠 전에 읽다 재미있다며 보여준 책 페이지가 떠오른다. 어떤 여자에 대한 묘사였는데, 개중 앞 부분이 꼭 네 이야기다. 부인은 아양보양하고 앙실방실하고 오밀조밀하여 알뜰살뜰한 프랑스 부인 중에….

 돌아오는 길 배를 뒤집고 죽은 쥐를 보았다. 왜 죽은 짐승들은 허연 배를 뒤집고 물 위에 떠오르는 것 일까. 위장에 남은 음식물의 부패로 인한 가스 발생이 원인이다, 라고 어느 책에서 읽었다. 한때는 넘치는 인류애와 삶의 덧없음에 시신 및 장기 기증을 고려한 적도 있다. 하지만 신선함을 위해 수술실에서 빠르게 해체되고 실려나갈 내 몸뚱이를 바라볼 가족들을 생각하면 망설여진다. 그렇게 장기 기증을 하면 염은 못 하겠지, 하는 헛된 생각이 자꾸 든다.

 아까 사려다 만 얇은 에세이 집을 마저 읽으러 도서관에 들렀다. 몇 달도 전에 지하철에서 앞 사람이 읽던 것을 어깨너머로 탐내왔더랬다. 백 쪽도 안 되는 얇은 책이다. 작가와 작가의 연인은 죽은지 오래지만 절절히 고백하는 문장은 수십 년이 지나도 활자 속에서 여전하다. ...당신은 곧 여든 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아내와 동반자살했다. 그러니 서로를 염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문득 두 사람의 묘비명이 궁금해졌다. 도서관에서 나오는 길, 부딪힌 어린 학생의 가방에 노란 리본이 달려 있다.

 아끼는 술집이 하나 있는데 낮 시간부터 문이 열려 있기에 고개를 빠끔 기울여본다. 오늘 저녁에 장사 안 해요? 물어보니 그렇단다. 의자를 다 들어내고 있기에 언제까지 쉬세요, 물었다. 원체 손님이 적은 가게라 미안한데 장사 접어요, 하는 대답만 아니길 바랐다. 다행히 다음 주말 즈음부터 다시 한단다. 다음 주에 친구 데려와서 한 턱 쏘려고 했는데 아깝네요, 사장님. 떠나려는 나를 붙잡고 사장님이 인테리어 한 번만 봐주고 가란다. 여기다 이 등을 놓으려는 데 어떻냐고, 아니, 사실은 자랑하고 싶으니까 내 자랑 좀 들어달라고. 예기치 못한 귀여움에 나는 그러고마 약속한다. 다시 오면 신청곡 받아주실 거죠?

 닭의 유정란은 생명일까? 어릴 때 계란집 놀러가서 많이 먹었던 것 같은데. 집으로 돌아와 물었다. 몇 세포기부터 생명이라고 생각해? 4세포, 8세포, 16세포기는 너무 작잖아. 몇 번째 난할부터 생명인 것 일까? 포배기 정도가 되면?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 배아에 대한 연구는 윤리적인 문제로 높은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식물이나 여타의 단세포 생물 연구와 달리 단계마다 배아의 분열을 멈추고 가르거나 투시하여 상태를 관찰하는 연구 방식 자체가 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시 장미의 상태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상자는 열렸는데, 어린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럼 한 병을 혼자 다 먹어치우고 있다며 짝궁이 나무란다. 그러든 말든 오백씨씨 맥주 잔 가득 얼음과 술을 담고 쪼그려 앉아 아껴둔 영화를 튼다. 영화를 보기 위해 티비를 막 트는데, 기분이 묘하다. 마침 나오고 있는 영화가 둘이었는데, 두 편 다 요절한 배우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둘 다 아끼는 배우다. 나는 모르는 척 티비 입력을 바꾼다. 이 쓴 맛을 덮기엔 술에 얼음을 너무 많이 넣었나 보다.

 영화의 줄거리는 진부하기 짝이 없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가 사랑과 세상에 절망한 젊은이를 치유한다. 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도 같은 이야기도 없다고 나는 한 장면을 돌리고 또 돌려가며 본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성당에 놀러 갔다가 신부님의 서랍에서 만나 한 개를 훔친다. 하반신이 마비된 채 지쳐 누운 청년의 침대 머리 맡으로 쪼르르 달려가서는, 나 한 입, 아저씨 한 입 하자며 먹다 남은 조각을 입에 들이민다. 청년이 묻는다. 너 지금 뭘 하는 거니? 내 영혼을 구원해주려는 거야? 너 나를 구원하려는 거야? Are you trying to save me? Are you trying to save me? 이 대사가 애드립이라니. 나는 맥주잔을 꼭 쥐고 둘의 고통스런 고백을 끝까지 지켜본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네가 누구일지라도, 나무 아미타불.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하룻날 거짓말처럼 스러진 한 영화 배우부터 제주도, 잊지 못할 바다, 꽃 같았던 청년들까지 부서진 꿈들이 많아 슬픔이 차고 넘치게 밀려 든다. 먹먹함이 목구멍을 짓눌러 말을 할 수가 없다. 서점에 새로운 책이 한 권 두 권 들어오고 재생목록에 한 곡 한 곡 더해질 때마다 세상 어딘가에서는 하나씩 하나씩 잊혀지고 덜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새로운 연인이 맺어지면 한 부부가 죽어야 하는 법이고, 봄볕 밑에 숨은 쥐굴에 새끼 쥐가 태어날 때 어느 늙은 쥐가 죽는 것이 시간의 섭리일진대, 나는 낮에도 밤에도 어느 앞뒤 문으로도 나가지 못하고 우두커니 필름에 박제된 장미만 바라보고 있다. 신을 불러도 대답이 없는 건 그도 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일 거다.

 좋아하지도 않았던 노래의 가사가 비 새는 우산 구멍처럼 신경이 쓰인다. 전자음 섞인 목소리가 쾌활하게 울린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말하셨다. 천둥 속에 폭우가 쏟아지고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를 때 별들 위로 너의 이름을 새겨둘게. 네가 기억할 인생을 살려무나. 언젠가 세상을 남겨두고 떠나게 될 테니.

 고작 스물 여덟에 죽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가사를 썼는지는 모른다. 그 아비 되는 이가 어떤 심정으로 이 노래를 기억할지 모른다. 나는 가급적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젖은 땅에 새 싹이 돋을 것이라는 것만 안다. 비가 그쳤나 못내 궁금하지만 창을 열어보지 않는다. 삭아버릴 운명을 한탄하며 무릎 위에 턱을 얹고 앉아 가만히 흰 종이 위를 내려다 본다.

 글을 쓸 시간이다.


















***






뻘글입니다. 비가 그쳤으면 안 올렸을 텐데 계속 비가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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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백수
18/04/23 21:38
수정 아이콘
글잘쓰시네요..쩐드아...
소린이
18/04/23 21:53
수정 아이콘
비가 계속 와서 다행입니다. 글에 푹 빠졌다 갑니다.
벌써1년
18/04/24 04:55
수정 아이콘
사색에 젖게 하는 글, 고맙습니다. 새벽 감성에 취해 더욱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제랄드
18/04/24 07:09
수정 아이콘
멍하니 읽다 추천;
태엽감는새
18/04/24 22:11
수정 아이콘
사실 그거, 제 똥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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