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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1/15 16:04:35
Name Jace T MndSclptr
Subject [일반] [픽션] 나의 이름은. -上-
'삐비빅-삐비빅-삐비빅-삐비빅'

시끄러운 핸드폰 알람 소리에 달콤한 잠에서 깨어난다. 정확히 무슨 내용의 꿈을 꾸었는지는 벌써 가물가물하지만 왠지 아련하고 분위기 좋은 장면, 아마도 키스나 고백 비슷한 그런 장면이었던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왠지 모르게 아쉽다. 기계 문명의 발달은 좋은 점만이 있는것은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눈을 뜬다. 갓 잠에서 깨서 그런거? 눈의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럽다. 시간만 확인하고 여유가 있으면 좀 더 누워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게슴츠레 뜬 눈 앞에 비춰진 광경이 무릇 낯설다. 처음 보는 천장, 익숙치 않은 조명, 당황스러워 좌우를 살펴보니 평생 써본적 없는 작은 옷장과 역시나 만나본 적 없는 책상이 나를 반긴다. 뭐지? 여긴 어디지? 처음은 아니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곳에서 깨어나는 경험에 바짝 긴장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나 어제 달렸었나?'

-이변에 대한 의심과 분석은 항상 높은 가능성부터- 라는 26년간 살면서 터득한 지혜를 바탕으로 검토를 시작한다. 익숙치 못한 잠자리, 낯선 천장, 가장 큰 가능성은 단언컨대 주제넘은 달리기로 인한 필름의 절삭이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는 달린 기억이 없다. 집에서 폰으로 아는형님 보다가 잔거 같은데... 하지만 그것은 잠에서 깬지 얼마 안된 뇌가 생각해낸 기억이며 무엇보다도 기억은 불확실한것이지만 시신경은 확실한것이기 때문에, 달렸나 보다, 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슬슬 방의 인테리어가 신경쓰인다. 화장품이 잔뜩 널부러져 있는 화장대, 분홍빛이 감도는 레이스 커튼, 전신거울과 그 앞에 놓여 있는 강아지 모양 체중계. 이것은 누가봐도 여자방이다. 99%의 확률로 여자방이다. 만약 1% 확률로 이게 여자방이 아니라면? 그것은 여자방인것보다 더욱 심각한일일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등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힌다. 두려움에 떨며 상체를 살짝 들어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아마도 아까와 비슷한 확률로 여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팔이 보인다. 아주 잠깐의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쳐간뒤 이게 무슨일이냐하는 막막함이 밀려온다.

하지만 팔의 모양이 이상하다. 마치 꼭 질럿의 다리처럼, 반대 방향으로 뒤틀려 있는것 같다.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몽롱한 정신이 조금은 깨어나는듯한 느낌이 든다.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본다. 그리고 내가 팔을 움직이는 대로 여자의 팔이 움직이는것을 목격한다. 이불을 붙잡고 '10분만 더!'를 외치던 잠꾸러기 정신이 갓 입영한 훈련병이라도 된 양 벌떡 정신을 차린다. 아니 이거 뭐야 이거.



이불을 허리춤까지 내리고 나 스스로 -물론 이것은 아직 확실한 표현은 아니다- 를 관찰해본 결과, 나는 지금 작은 여자의 몸이 되어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된건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나는 군대도 현역으로 다녀오고, 그렇고 그런 일도 충분히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배고프다- 겪은 26세 남성일터이다, 즉 아무리 봐도 이 몸은 어제 잠들때까지의 나의 몸이 아니다. 눈으로 본 결과만이라면 믿지 않았을수도 있지만, 하반신의 어떤 미묘한 허전함? 같은것이 나의 생각이 맞았음을 증명해준다.

나는 사실 여성이 맞고, 남자가 되는 길고 생생한 꿈을 꾼것일까? 단지 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아 기억이 나지 않는것일까? 위에서 말했듯 기억은 불완전하고 시신경은 완전하니 시신경이 주는 정보를 믿어야 할까? 라는 실없는 생각도 해보지만, 이미 나는 이성을 찾았으며, 데카르트가 그랬듯 나의 이성과 그를 통한 성찰만큼은 그 어떤 경험보다도 우선시 해야할, 명백히 실존하는 것이다. 나는 여자가 아니다. 나는 서울 가양에 사는 이준영이다. 그것이 모든것을 의심하고도 남은 그 하나의 명백한 진실이다.

일단은 상황이 어떻게 된지 파악하기 위해 몸을 옆으로 눕혀 침대에서 내려간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하였으니 지금의 내가 어떤 상태인지 확실하게 아는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이 몸에 익숙해져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거울을 봐야 한다. 그렇게 침대에서 반쯤 내려가 발을 거울쪽으로 옮기려는데, 다리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으윽."

몸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당연한 결과였다. 걷는것은 몸을 옆으로 뉘이는것과는 차원이 다른 복잡한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 애초에 나는 그러한 문제 때문에 거울을 보려던것이 아니었나? 기어간다는 선택지를 냅두고 굳이 낯선 두 발로 일어서려 한 나 자신이 한심스럽다. 몸이 바뀌니 머리도 안 좋아진것 같다. 아마 이 몸의 주인은 나만큼 두뇌 활동을 자주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나보다. 느낌탓인지 아니면 여성의 몸이라 그런것인지 평소의 타박상보다 훨씬 더 아픈것 같은 이마를 부여잡고 바닥을 기어 거울앞에 도착한다.

"아"

거울을 쳐다보자 대충 산발한 머리로 이마를 반쯤 가리고 네발로 기어다니는, 아마도 나보다는 조금 어려보이는 여성이 그리 고가로 보이지 않는, 아마 UNIXXO 비슷한 가격대의 브랜드로 추정되는 늘어지는 잠옷을 입은채, 한심스럽게 입을 벌리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아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충분히 생각했음에도, 눈으로 직접 그 광경을 명확하게 확인하니 이게 무슨 기뉴 특전대도 아니고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것인가? 하고 또 다시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물론 이미 일어난 일이고 부정한다고 다시 가양으로, 남자로 돌아갈 수 있는것이 아니라면, 빨리 해결책을 찾아야 하기에 마음을 다 잡는다. 우선 해야 할것은 역시.

"으아... 으어... 크아갸거겨... 영어이 비아 호에바 호에버... 응... 아 이바 바음이 잘 앙에!'

아까부터 신체중에 가장, -정확히는 두번째로-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던 입을 움직여본다. 내가 예상한 소리와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달라서, 그리고 입의 구조와 크기가 달라서 원하는 대로의 발음을 할수가 없다. 최대한 익숙해지기 위해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내본다. 처음엔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했는데, 여성의 목소리가 나오는것에 신기해서인가 자연스레 내용이 여성스러워 진다.

'앙영? 앙녕? 앙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빠 안녕하세요~ 날 사랑할수 있나요 그대에게 부족한 나인데 '

신기함에 취해 평소 불러보고 싶었던 애창곡의 여자파트를 불러보고 오~ 하며 감탄한다. 아마도 노래 실력은 몸이 아니라 뇌에 저장되는것인가보다, 아니면 이 사람도 노래를 잘 부르는걸까? 잠깐의 도취를 즐긴뒤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일단 다리를 앞으로 끌어 당기고- 팔자로 편히 앉은뒤 다리를 좌우로 움직여보고, 당겨보고, 국민체조 동작으로 발목을 풀어준다. 교통사고가 나서 오래 깁스한 경험이 있어서인가 생각보다 감각이 금방 익숙해진다. 슬슬 자신감이 붙어 땅을 두 손으로 짚고, 조심스레 일어나 본다.

"아 키가 작으면 일어나는게 편하구나~, 이래서 태양 이민우가 춤을 잘 추는구나"

내 의지대로 나오는 여자 목소리가 재밌어서 속으로 해도 될 생각을 일부러 밖으로 내뱉는다. 키가 작다. 여자니까 작은건지 아니면 정말 키가 작은 여성인지는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애초에 가구-침대 모두 처음 보는것이기에 유의미하게 키를 비교할만한 대상이 없으니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분명한것은 원래의 나의 키보다는 훨씬 작다.

대충 좌우로 팔 다리를 움직여보고 스트레칭을 한다. 뭔가 짧아진것이 느껴진다. 주려던것보다 힘이 덜 들어가고- 그 덜 들어간 힘으로도 팔 다리가 생각만큼 움직이는 것은 정말 기묘한 경험이다. 그래도 어느정도 원하는대로 움직일 수 있는걸 보아하니 몸에는 좀 익숙해진것 같다.  

이제는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생각해보자, 지금 나에게 급한 문제는 두가지이다.

먼저 이 몸은 대체 누구이며, 여긴 어디인지 알아내야 한다. 당장 일어날 수 있는 이변에 자연스레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급선무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중요할 수 있는것은 진짜의 나는 지금 어떤 상황인가? 하는것이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시크릿가든이나 기뉴특전대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 사람의 정신이 지금 내 몸에 들어가 있을 확률이 높겠지? 그렇다면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때를 대비해 그 사람을 제어하는것이 사실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두가지 급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답안은 내가 방금까지 누워있던 침대 내 머리맡에 있던, 나를 깨워준 바로 그 친구- 핸드폰만이 가지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나에게 -이준영에게- 전화를 걸면, 아마도 내 몸에 들어가 있는 이 몸의 주인이 받을것이다. 안 받을리가 없다. 그 친구도 정신이 없겠지만, 최소한 자기 번호로 걸려온 전화는 받을것이다. 만약 받게 되면 급한 불은 해결이다. 그 친구에게 그 친구의 신상정보를 듣고, 나의 신상 정보 대해 이야기해주고 행동 지침에 대해 서로 간단히 설명한뒤 적당한 장소를 잡아 만나서 상의하면 된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이 초자연적 현상이 해결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선에서는 최선의 대처이다.

그럼 이제 남은것은 기도뿐이다. 침대로 돌아가 핸드폰을 손에 든다. 정확히 무슨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갤럭시 S 시리즈 구 기종인것 같다. 제법 낡은 폰을 쓰네, 라고 생각하며 제발 잠금패턴아 없어라! 라는 기도와 함께 액정을 켠다. 초등학교때 잠깐 교회를 다닌 덕인지 다행히도 잠금 패턴이 없다. 다른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통화 앱을 실행한다. 내 전화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니 다행이 신호가 간다. 살면서 이렇게 전화통화에 간절히 긴장해 본적이 몇번이나 있었던가? 어쩌면 꽤 많았던것 같기도,

"여보세요~"

익숙한듯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린다. 역시 남이 듣는 내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내 목소리는 원래 좀 더 멋있을줄 알았는데... 하던 처음 경험했을떄의 실망감이 떠오른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이 사람, 목소리가 평화롭다. 연기력이 좋은 사람일까? 자기 번호로 온 전화인데 굳이 연기를 할 이유가 있나?

"아 저기~ 혹시 그... 누구세요?"

멘트가 이상하지만 아무런들 어떠랴, 내 몸에 누가 들어갔다는 이 비일상적인 상황에는 비일상적인 멘트가 걸맞을것이다.

"누구시라뇨? 누군지도 모르고 전화 거신거에요? 전 이준영이라는 사람인데, 혹시 그쪽은 누구세요?"

너무나도 태연하고 한적한 대답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진다. 이게 무슨 소리야,만에 하나를 가장한 연기? 연기치고는 너무 뛰어난데, 여배우의 몸과 집이라기엔 둘다 평범했다. 무언가 잘못된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아 저기 그러니까 본인이 이준영씨 본인 맞으세요?"

"네? 무슨 소리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 저 본인 맞아요. 저 지금 출근 지하철이라 별 용건 없으시면 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수화기에서 귀를 떼고 핸드폰 액정에 떠 있는 시계를 본다. 11월 25일 화요일, 7시 40분, 어제 폰 하다 잠든 내가 딱 알람으로 일어나 헐레벌떡 출근할 시간이다. 맙소사 세상에.

"대답 없으시니까 끊습니다~ 용건 있으면 다시 전화주세요~"

아무일도 없는듯 태연한 목소리, 9호선 급행 사람으로 미어터지는 출근길, 쓰잘데기 없이 친절한 통화 종료 멘트. 모든 정황이 가리키는 사실은 하나다. 이 사람은 명백한 이준영, 나 자신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자의 몸에 들어가 있는 나는 대체 누구란말인가? 그리고 이 몸의 주인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남의 방을 뒤지는 습관은 없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며 조심스레 방을 뒤진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침대에 떨어져 있던 지갑에 들어있던 민증이 말해준 이 몸의 주인의 이름은 장서연, 나이는 94년생 24세였다. 나보다 어릴거라는 예감은 적중한셈이다. 나이차가 그렇게 많지는 않음을 고려해보면 상당히 쉽지 않은 추측이었는데 몸은 바뀌었어도 감은 바뀌지 않았다. 방의 상태, 크기, 인테리어, 그리고 창밖으로 비춰지는 평범한 주택가 풍경을 봤을때, 그렇게 부유한 집 같지는 않았는데, 실제로 지갑에도 체크카드 몇장과 만원짜리 한장 천원짜리 몇장, 그리고 이상하게 올드한 감각의 금속 열쇠밖에 든게 없었다. 내 지갑에도 잔뜩 쌓여있는 흔한 커피 전문점 쿠폰조차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책상을 보니 대부분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책이고, 9급 어쩌고가 쓰여 있는 책과 7급 어쩌고가 써있는 책이 둘 다 있는것을 보니 아마 내 몇몇 친구들처럼 9-7급 시험을 동시에 준비하는 공시생인것 같았다. 다만 책상에 최근에 공부한 흔적이 많지는 않았던것을 보면, 공부를 아마 도서관이나 독서실에서 하는 모양이다. 어찌되었건 학생/직장인은 아닌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당장 출근이나 등교를 해야하는 상황은 아니니까.

일단은 더 은밀한 곳 -핸드폰의 문자나 통화 내역, 앱등을 말한것이다. 다른 상상을 했다면 반성할 시간이다- 을 조사해보면 더 자세한 정보를 알 수도 있겠지만, 몸의 주인인 서연씨께 예의가 아닌거 같아 관두었다.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몸을 한두시간 써서 그런지 왠지 모르는 동질감-일체감이 느껴져서 별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 상황이 계속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수 밖에 없겠지만, 당장은 더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고 싶다는 호승심이 생긴다.

일단 어떻게 일을 해결할지 생각하기 위해선 밖으로 나가야 한다. 방에 컴퓨터도 없고, 폰으로 뭔가를 찾는것도 한계가 있고, 무엇보다 여기가 어딘지를 파악하는게 급선무니까. 만약 기적적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면 최악의 경우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이 되어줄-아마 몸이 없이 정신만으로도 말이다- 나의 가족에게 도움을 청할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걱정거리가 있어 망설일수밖에 없다. 집에 가족이 있으면 어떡하지, 자연스럽게 그냥 인사하고 나가면 될까? 이상하게 보이진 않겠지? 그리고 옷은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한참을 우왕좌왕한다.

'뚜뚜-뚜뚜뚜-뚜'

익숙한 안드로이드 폰 특유의 기본 문자 메시지 소리가 핸드폰에서 울린다. 문자는 보지 말아야 겠지? 하지만 내 몸에게서 온 문자라면? 어쩌면 문제를 쉽게 해결 할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문자일수도 있는데, 과연 무작정 안 보는것이 맞는걸까?

잠깐의 갈등 끝에 결론을 내린다. 실눈뜨고 조금만 보자, 보고 나와 상관없는 문자 메시지면 액정을 끄자, 그렇게 실눈을 뜨고 액정을 열고 미리보기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발신자 '엄마♥' 를 보고 나도 모르게 나쁜 손을 움직여 문자를 확인한다.

"사랑하는 우리 딸 일어났니? 엄마 일찍 일하러 나왔어. 혹시 시험 결과 안 좋아도 엄마는 우리 딸만 건강하면 돼. 시험은 내년에 봐도 되고 다른 일 알아봐도 되니까 결과 안 좋아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우리 같이 힘내자. 화이팅!"

보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는 죄책감 때문인지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진다. 아주머니에게 사랑하는 딸을 돌려드리기 위해서라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고 걱정해줄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내 몸에 있는 나에겐 조금 미안한 얘기만 나는 역시 돌아가야만 한다. 작은 몸에 의지가 차오르는것을 느낀다.



"휴~ 죽겠다"

머리를 감을 수 없어 깊게 눌러 쓴 모자를 대충 벗어 던지고 침대에 드러눕는다. 하루종일 세수 말고는 제대로 씻지 못해 몸이 찝찝하다. 이렇게 안 씻는것도 몸 주인한테 좋은 일은 아닐텐데- 하는 악마의 속삭임을 하루정도는 괜찮다며 억누른다. 그 악마가 원래 이렇게 쉽게 억눌러지는 친구가 아닌데, 몸이 바뀐 영향이 있나보다.

오늘 있었던 사소한 행운이라면, 현관 문이 키패드 도어락이 아닌 아닌 자물쇠였다는것이다. 만약 도어락이었으면 꼼짝 없이 외출 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테지만, 다행히 지갑에 들어있던 열쇠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물쇠식이었기에, 외출 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현관에 도달에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행운의 사소함에 비교했을때 매우 컸던 불운은 여기가 충청도 대전이라는것이다. 애석하게도 가족을 직접 만나 내가 정신만은 이준영임을 증명하고, 몰래 도움을 받는다는 계획은 힘들어졌다. 대전은 어릴적 아주 잠깐 고모댁에 몇번 들른것이 전부였고, 터미널 위치조차 일일히 검색해서 가야 하는 데다가, 무엇보다 당일치기로 가서 상황을 다 설명하고 시간안에 돌아오는것은 전력질주조차 할 수 없는 이 몸으로는 명백히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돈도 부족하고 말이다.

또 하나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안 좋은 소식은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한 조사가 그 어떤 성과도 없었다는 점이다. PC방에서 자료를 조사해보려 했지만 애초에 사실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네이버 지식인에 나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듯한 누군가가 "자고 이러나니 몸이 바뀌어써요! 어떠케해요?" 라는 질문을 올려놓긴 했지만, 그에 대한 댓글은 음담패설들과 제발 만화 드라마 좀 작작 보라는것들이 전부였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수확 없는 하루를 머리속으로 정리하고 있다보니 익숙치 않은 여성의 몸으로 종일 밖에서 시간을 보낸 후유증인지 금방 피로가 몰려온다. 어쩌면 모든것이 잠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니 만큼, 잠을 잔다면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아니면 이것이 하나의 길고 생생한 꿈일수도- 잠을 잠으로써 그에서 깨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피로가 정신을 몽롱케 하니 곧 모든게 아무렇지도 않게 잘 풀릴거라는 기대감이 든다. 그래. 일단 잠이나 자자.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옷을 제대로 벗지도 않은 채 그렇게 잠이 들기 시작한다. 내일은 부디 아무일 없는, 이준영으로서의 아침이 되기를-



"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진짜 잠에서 깰 수밖에 없는 알람소리' 라는 앱의 이름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보통같으면 알람 소리가 듣기 싫었겠지만 뭔가 굉장히 곤란하고 난처한 꿈을 꾸고 있었던것 같은 느낌 남아 '깨서 다행이야' 라는 감각을 느낀다. 상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느낌만으로 알람소리에 감사의 예를 조심스레 표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음, 간만에 깔끔한 하루였어.'

회식도 야근도 없는 칼퇴근 이후,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보낸 다음날 아침은 이 얼마나 평화로운가! 방에 있는 작은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와 면도를 마친뒤, 옷을 입으며 출근 준비를 한다. 옷장을 여니 오늘은 유니섹슈얼한 핑크색 와이셔츠가 나를 이상하리만큼 강렬하게 유혹해오지만, 부장님과 옆자리 직원의 놀림이 순간 떠올라 외면하고 평범한 흰색 와이셔츠로 손을 움직인다. 미안해 핑키야, 너는 와이셔츠지만 회사에는 평생 못 입고 갈  것 같아.

더 이상 본인은 출근 때문에 씨름 할 일 없다고 아들의 패션과 일 사이에서의 갈등도 모르고 곤히 주무시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조금 더 고맙게 느껴지는 어머니의 얼굴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자기발견을 위한 기나긴 휴학을 즐기는 중인, 아마도 게임하느라 밤을 샌듯한 동생을 모르는척 외면 해준뒤 집 밖으로 나선다. 등 뒤로 "형 조심해서 잘 갔다와~" 라는 동생의 말이 기분좋게 등을 떠밀어주어 발걸음이 가볍다.

'직장이 동작 근처가 아니라 여의도만 되어도 좋을텐데'

숨쉬지 못할만큼 꽉꽉 눌러담은 정도는 아니지만, 결코 거동이 편하지는 않은 지하철에서 매일 지겹게 반복하는 -이번주만 해도 벌써 두번째인- 그 불평을 또다시 마음속으로 되뇌이는데,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010으로 시작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번호인데, 친구들 번호를 꼬박꼬박 저장하는 습관이 없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받을 수 밖에 없다. 옆 사람에게 닿지 않게 기묘하게 신체를 움직여 귀에 수화기를 가져다 댄다. 이어폰을 가져올걸 그랬다.

"여보세요~"

"아 저기~ 혹시 그... 누구세요?"


-上-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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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셔도 아시겠지만 너의 이름은을 보고 영감을 받은 이야기입니다만 애니메이션과의 유사점은 사실 쓰다보니 거의 전혀라고 할 정도로 없어졌습니다. 뭔가 복합 짬뽕 SF 같아졌는데 일단 분명히 너의 이름은을 보고 영감을 받았음을 확실히 해둡니다.

짧게 두편으로 끝내고 싶은데 분량 관리가 잘 될지를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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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바트론
17/01/15 17:21
수정 아이콘
재밌으니 추천합니다.
사실 경기도 안양의 이준영이 아니라서 추천 안 드리려고 했는데...-ㅛ-
휴머니어
17/01/16 08:28
수정 아이콘
재밌네요. 얼른 후속편을 내놓으시길 바랍니다.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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