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출한 일상 푸념 글입니다.
---------
1. 이달 초 또 한 번의 출장을 다녀 왔습니다. 자주라면 자주이고 가끔이라면 가끔 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애매한 주기이지만, 아무튼 또 한 번의 출장이었습니다. 쌓여가는 비행기 마일리지만 저를 위로해 주네요.
지금 하는 프로젝트의 고객사는 중동에 있습니다. 그 나라로 가는 직항편이 없어서 두바이에서 경유를 합니다. 작년에 갈 때만 하여도 입국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한국인은 저와 같이 간 매니저만 있었으나, 올해 들어 사업차 오는 분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번에는 단체 관광을 온 분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반바지를 입고 기다리고 계시더군요. 그걸 본 몇몇 분들이 그 나라에서 반바지는 불가이므로 미리 갈아입으라 권유를 하였고, 그분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갈아입으러 가시더군요.
그걸 보자니 작년에 모 회사 분들과 초록색 병에 얽힌 소문이 떠올랐습니다. 짐 가방 속에 몰래 들고 가다가 입국 심사 후 최종 검색대에서 적발되어 추방을 당하였다는 전설과도 같은 풍문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습니다. 작년 말에 제가 들어갈 때 엄청 철저하게, 가방 다 열어보고 검사를 받은 일이 있어 더 잘 기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객사 분들이나 이전 고객사 분들께서 오시면 저희는 그분들의 문화를 어지간하면 맞추어 드립니다. 그분들의 취식이 가능한 식당을 미리 확인하여 예약하고, 기도 가능한 공간도 미리 확보해 두고, 불편해할 경우 여성 배석자는 회의에서 배제하는 등.
무엇이 맞는 걸까요? 문화의 상대성이 엄연히 존재하고, 그들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하며 민감한 부분이므로 존중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맞는 상황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 이런 인식이 모여 사람들의 머릿속에 역차별이라는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이러한 그림 조각이 모이고 모여 인종 차별적 극우 세력의 대두라는 모자이크를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망상도 살짝 하였지요.
2. 세계는 둥글고 하나로 얽혀 있습니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 처음 찾아간 그곳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고 평온하였습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습니다. 제가 듣고 보고 생각한 것은 기우일 테니 제발 현실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피지알에서 본 글 (
https://pgr21.com/?b=8&n=69414)은 그 생각이 기우가 아닌 가능성이 존재하는 발생 가능한 위험 요소라는 확신을 갖게 하였습니다. 부디 제 일을 위해, 아니 제 일은 중요치 않으니 그곳에 사는 많은 사람을 위해 지금의 온기가 가시지 않으면 합니다. 그곳의 정부와 지도자들은 몰라도 그곳의 사람들은 따뜻하고 다정하니까요.
3. 돌아오는 귀국 길은 전에 없이 힘들었습니다. 4일간의 일정 간 합쳐서 비행기를 7번 탔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제가 너무 민감하여 그랬던 것 같습니다.
출국 심사대 앞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슬람 세계의 고질적인 문제이겠지만, 직원은 많으나 문을 연 창구는 드물고 개개인의 처리 속도는 몹시 느립니다. 자연스레 창구마다 줄은 길어지고요.
외국인 전용 칸은 두 곳이 있었습니다. 옆줄에 서 계셨던 몇몇 분이 갑자기 제 앞에 선 분에게로 달려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옆의 줄이 빠지는 속도가 느리다며 너무나도 큰 목소리로 당당하게 떠드십니다. 그곳에서의 새치기는 늘 있는 일이므로 항상 익숙하였지만, 그 당당함에 질릴 정도였습니다.
그중 한 분은 정말로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이래서 후진국은 안 된다고, 빨리 출국 심사를 하고 내부 면세점의 매출을 올리게 해야지 생각과 개념이 없다면서 큰 몸짓과 우렁찬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셨습니다. 그러한 '마인드'가 없으니 이러한 꼴이라고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가 최고라는 자화자찬도 하더군요. 옆의 일행들도 맞장구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벌점이 두려우므로 차마 글로 옮기지는 않겠습니다. 참고로 비행기 이륙 한 시간 반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더군요. 인천과는 다르게 면세점과 탑승구 사이에 검색대가 있습니다. 검색대의 수가 몹시 적어 줄이 정말 긴 편입니다.
이십 분 남짓 기다렸고, 곧 들어갈 차례가 되었을 때 짙은 초록 여권을 들고 계신 한 분께서 멀리서 다가오더니 아주 자연스레 일행인 양 제 뒤로 끼어드시더군요. 간단하게 한마디를 하려 하였으나,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출장 시 모르는 한국 사람과는 말을 섞지 않는 개인적인 습관 때문일 수도 있고, 환승 포함 12시간이 넘는 시간을 같이할 것이므로 불편한 상황을 만들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모든 것은 핑계였겠죠. 참고로 비행기 이륙 사십여 분 전이었습니다.
모든 한국인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더 심한 행동을 하는 외국인도 많습니다. 하지만, 한국어와 특유의 외향으로 인하여 제 눈에 더 잘 보이고 그래서 부끄러움을 더 크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저를 민망함으로 이끌까요. 이런 상황을 틀림으로 인식하고 못마땅해하는 저의 속마음일까요, 아니면 너무나도 당당하게 자기 일만 중요하게 보는 그분들일까요, 아니면 뒤의 사람들에게 사과나 양해 한 마디도 없고 오히려 목소리를 더 높이던 그분들의 기백일까요.
문득 청문회를 보다 당당하게 모르쇠를 시전하는 그들을 보니 그 일이 머리 속에 얽혀 재차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