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은 여기입니다.
http://www.nytimes.com/2016/07/03/opinion/sunday/the-myth-of-cosmopolitanism.html?_r=2
나름 매끄럽게 번역한다고 의역을 좀 할 텐데, 틀린 부분 지적해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세계 시민 사상은 '나는 특정 국가나 민족, 인종 등에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인류다. 세계는 나의 집!' 라는 이념이죠. 여기에 무슨 토를 달 여지가 있나 싶은, 매우 좋은 사상입니다. 저도 낮은 수준에서 (즉, 이 이념보다 더 중요한 핵심 가치들은 따로 있습니다) 이 이념에 동의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이념이라는 것이, 정작 살기 바쁜 사람들한테는 뜬구름 잡는 소리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등 따습고 배부른 사람들' 이 일종의 지적 허영심에서 논하는 사상일 수 있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사상의 확장력이 의외로 약하고, 저소득층으로부터는 '웃기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라는 비웃음을, 민족주의자나 인종주의자들로부터는 '말은 좋지. 근데 그게 되겠냐?' 라는 비웃음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은 그런 비판을 좀 더 심도 있게 하는 글인데, 상당히 잘 읽은 글입니다. 지난 7월에 올라온 글이라, 트럼프가 당선되기 이전 시점입니다.
이하 원문 및 번역:
제목: 세계 시민 사상이라는 신화
저자: Ross Douthat
[주석: Douthat 은 뉴욕 타임즈에서 사상의 다양성을 위해서 일부러 일부 채용한, 보수적인 목소리를 내는 컬럼니스트입니다]
NOW that populist rebellions are taking Britain out of the European Union and the Republican Party out of contention for the presidency, perhaps we should speak no more of left and right, liberals and conservatives. From now on the great political battles will be fought between nationalists and internationalists, nativists and globalists. From now on the loyalties that matter will be narrowly tribal — Make America Great Again, this blessed plot, this earth, this realm, this England — or multicultural and cosmopolitan.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영국에서는 브렉시트를 성공시키고 미국 공화당 또한 접수한 시점이니, 이제 우리는 좌/우 이념 논쟁이나 리버럴/보수 논쟁을 잠시 접을 필요가 있다. 미래의 정치 투쟁은 국가주의자들 vs 국제주의자들, 그리고 반이민주의자들 vs 개방주의자들 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다문화주의자나 세계 시민 사상가들은 '우리 부족 vs 쟤네 부족' 으로 선 긋기 좋아하는 사람들 - 예를 들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이 축복받은 나라, 이 땅, 우리 영국 등을 외치는 - 과 경쟁해야 할 것이다.
Well, maybe. But describing the division this way has one great flaw. It gives the elite side of the debate (the side that does most of the describing) too much credit for being truly cosmopolitan.
음, 그럴지도. 근데 사실 위에서 말한 묘사는 중대한 결점이 있다. 저런 묘사는 세계 시민 사상을 지지하는 엘리트 집단 (이 사람들이 보통 언론을 통해 저런 묘사들을 출판하곤 하지) 에 대해 너무 관대하기 때문이다.
Genuine cosmopolitanism is a rare thing. It requires comfort with real difference, with forms of life that are truly exotic relative to one’s own. It takes its cue from a Roman playwright’s line that “nothing human is alien to me,” and goes outward ready to be transformed by what it finds.
진정한 의미의 세계 시민 사상은 사실 구현하기 매우 힘든 것이다. 진정한 세계 시민 사상가라면 자신이 자란 문화권의 시각에서 볼 때 너무나도 이상해 보이는 문화나 가치관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야 하니까. 옛날 로마 희곡에 나오는 '인간적인 것이라면 그 무엇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 정도 마음가짐을 진실로 체화한 뒤 모든 이질적인 문화를 접하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어야 진짜 세계 시민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The people who consider themselves “cosmopolitan” in today’s West, by contrast, are part of a meritocratic order that transforms difference into similarity, by plucking the best and brightest from everywhere and homogenizing them into the peculiar species that we call “global citizens.”
현대 서방 세계에서 세계 시민 사상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미안한 얘기지만, 이질적인 문화를 접하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능력 좀 있다는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스스로를 '세계 시민' 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엘리트 부족에 불과하다.
This species is racially diverse (within limits) and eager to assimilate the fun-seeming bits of foreign cultures — food, a touch of exotic spirituality. But no less than Brexit-voting Cornish villagers, our global citizens think and act as members of a tribe.
이 부족은 인종적으로는 다양하며 (물론 일정 % 를 넘게 수용하진 않는다), 다양한 문화권의 '재미있는 요소' 들을 빨아들이는 데 열정적이다. 예를 들어서 음식이라든지 아니면 동방의 신비한 영적 수련같은 것들 말이지. 근데 정작 '우리 부족 vs 너네 부족' 이라는 선 긋기에 대해서는 이 집단 역시 상당한 수준의 부족 의식을 보인다.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영국 시골 농부 못지않지.
They have their own distinctive worldview (basically liberal Christianity without Christ), their own common educational experience, their own shared values and assumptions (social psychologists call these WEIRD — for 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and Democratic), and of course their own outgroups (evangelicals, Little Englanders) to fear, pity and despise. And like any tribal cohort they seek comfort and familiarity: From London to Paris to New York, each Western “global city” (like each “global university”) is increasingly interchangeable, so that wherever the citizen of the world travels he already feels at home.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한번 열거해볼까? 이 집단은 자신들의 주류 세계관이 있고 (종교적인 색채가 매우 옅은 리버럴 기독교가 주류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공유하는 가치관이 있고 (서구 민주주의, 고학력, 산업화, 중산층 이상, 민주당 지지), 특정 부족을 싫어하거나 혐오한다 (복음주의자들이나 영국의 분리주의자들). 또한 다른 부족들이 그렇듯이 이 집단도 자신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환경이 정해져 있는데, 런던이나 파리, 뉴욕 같은 서구의 '국제 도시' 혹은 '국제화된 대학교' 에서만 이 집단을 볼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여행을 할 때에도 이런 지역으로 주로 돌아다닌다.
Indeed elite tribalism is actively encouraged by the technologies of globalization, the ease of travel and communication. Distance and separation force encounter and immersion, which is why the age of empire made cosmopolitans as well as chauvinists — sometimes out of the same people. (There is more genuine cosmopolitanism in Rudyard Kipling and T. E. Lawrence and Richard Francis Burton than in a hundred Davos sessions.)
세계 시민 사상이라는 가면을 쓴 엘리트 부족주의는 세계화 시대를 맞이해서 크게 흥했다. 그 전에 분리되어 있던 지역들은 세계화라는 기치 아래 강압적으로 합쳐졌는데, 그러다 보니 제국주의 시대에는 세계 시민 사상가들과 애국주의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지 (웃기는 것은, 동일한 인물이 상황 따라서 두 캠프를 오간 적도 많았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볼까? 루디야드 키플링이나 (정글북의 저자) TE 로렌스 (아랍 독립운동에 헌신한 영국 장교) 혹은 리차드 버튼 (메카와 메디나 순례기의 저자) 정도 되어야 진정한 세계 시민 사상가이고, 다보스 포럼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진짜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It is still possible to disappear into someone else’s culture, to leave the global-citizen bubble behind. But in my experience the people who do are exceptional or eccentric or natural outsiders to begin with — like a young writer I knew who had traveled Africa and Asia more or less on foot for years, not for a book but just because, or the daughter of evangelical missionaries who grew up in South Asia and lived in Washington, D.C., as a way station before moving her own family to the Middle East. They are not the people who ascend to power, who become the insiders against whom populists revolt.
물론 요즘도 다른 문화를 접한 뒤 그것에 크게 감명받아 그 문화권에 눌러앉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사람들을 몇 아는데, 예를 들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몇 년 동안 도보로 여행한 작가가 생각나고 (책을 쓰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어서), 복음주의 선교사의 딸로 태어나서 동남아시아에서 자란 뒤 워싱턴에서 살다가 결국 중동으로 이민을 간 여자도 기억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이고, 애초에 자기 문화권에서는 삶의 답을 찾지 못했기에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엘리트 부족이란, 이런 사람들처럼 '새로운 문화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권력 이너서클을 형성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In my own case — to speak as an insider for a moment — my cosmopolitanism probably peaked when I was about 11 years old, when I was simultaneously attending tongues-speaking Pentecostalist worship services, playing Little League in a working-class neighborhood, eating alongside aging hippies in macrobiotic restaurants on weekends, all the while attending a liberal Episcopalian parochial school. (It’s a long story.)
내 개인 경험담 - 나도 저런 이너서클에 속한 셈이니까 - 을 좀 이야기해보자면, 나의 (순수한 의미에서의) 다문화 체험은 11살 때 정점을 찍었었다. 이 당시의 나는 성령을 체험하며 방언을 쏟아내는 교인들이 많았던 복음주의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육체 노동자들이 사는 마을의 야구부에서 운동을 했고, 주말에는 히피들이 가득한 유기농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고, 성공회 소속의 리버럴한 기독교 계열 학교에서 공부를 했었다.
Whereas once I began attending a global university, living in global cities, working and traveling and socializing with my fellow global citizens, my experience of genuine cultural difference became far more superficial.
그러다가 위에서 언급한 국제 대학교
[주: 이 사람은 하버드에서 최우수 졸업한 사람입니다] 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같이 공부를 하던 학생들은 전부 위에서 말하는 '세계 시민' 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 때 경험한 다문화는 매우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던 기억이 난다.
[주: 즉, 하버드에서 경험한 세계 시민 사상가들은 위에서 말한 엘리트 부족이라는 이야기]
Not that there’s necessarily anything wrong with this. Human beings seek community, and permanent openness is hard to sustain.
그게 뭐 꼭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이라면 커뮤니티를 필요로 하고, 인생을 통틀어서 계속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But it’s a problem that our tribe of self-styled cosmopolitans doesn’t see itself clearly as a tribe: because that means our leaders can’t see themselves the way the Brexiteers and Trumpistas and Marine Le Pen voters see them.
내가 비판하는 것은, 이 '자칭 세계 시민사상가들' 이 자신들 또한 하나의 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브렉시트 지지자들이나 트럼프 지지자들, 마린 르 펜 (프랑스) 지지자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이야기니까.
They can’t see that what feels diverse on the inside can still seem like an aristocracy to the excluded, who look at cities like London and see, as Peter Mandler wrote for Dissent after the Brexit vote, “a nearly hereditary professional caste of lawyers, journalists, publicists, and intellectuals, an increasingly hereditary caste of politicians, tight coteries of cultural movers-and-shakers richly sponsored by multinational corporations.”
그들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다문화를 즐기는 자신들의 모습이 바깥에서 보기에는 귀족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모른다. 이너서클에 속하지 못한 보통 사람들이 런던같은 도시를 볼 때에는 '오 위대한 다문화의 도시군' 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인종만 다양한) 엘리트 부족이 법조, 언론, 학술, 정치에서 연예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독식하며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모습을 본다. 멤버만 바뀌었을 뿐, 새로운 세습이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They can’t see that paeans to multicultural openness can sound like self-serving cant coming from open-borders Londoners who love Afghan restaurants but would never live near an immigrant housing project, or American liberals who hail the end of whiteness while doing everything possible to keep their kids out of majority-minority schools.
이 엘리트 부족은 주말에는 아프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지만 이민자들이 모여있는 동네에서 살지는 않는다. 미국의 모든 문제는 백인 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욕을 하지만, 본인의 자녀 학교에 아시안이 많아지면 학교를 옮긴다. 그러면서 다문화에 대한 개방성을 아무리 주장해봤자, 서클 바깥에서 보기에는 설득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They can’t see that their vision of history’s arc bending inexorably away from tribe and creed and nation-state looks to outsiders like something familiar from eras past: A powerful caste’s self-serving explanation for why it alone deserves to rule the world.
그들은 '인류의 부족성을 멈추고 국가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라고 외치지만, 그런 외침 역시 바깥에서 보기에는 수천 년 동안 들어온 소리의 반복일 뿐이다. 새로 등장한 힘 있는 집단이 '우리야말로 세계를 통치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집단입니다' 라고 말하는 그런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