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오니 내가 한게 과연 말인가 똥인가. 과연 나는 민주주의란게 뭔지 알고는 말했는가 스스로 의문이 들어 생각을 정리할겸 적어봅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달린 글인데다 조금 유럽 위주의 해석임을 양해해 주십시오.
농업 중심의 사회일 때 인간의 가치란 참으로 보잘것 없었습니다.
어떤 인간은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동시에 어떤 인간은 그 인간에게 지배받기위해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마치 소와 말과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만일 이 인간의 지배(인간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야생으로 달아난 소나 말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그랬기때문에 동시에 자연속에 어우러지는 삶은 속박을 벗어던진 삶으로 칭송받기도 했지요. 하지만 개인은 자연중심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어도 인간사회집단 전체가 그 삶을 추종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은 존중받은듯 하면서 동시에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만인은 평등하다"는 주장은 인류역사속에서 언제고 등장했지만 이내 "만인은 평등하지 못하다"는 현실에 파묻혀 항상 구호로만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 자본주의란 것이 등장했습니다. 이 자본주의는 생산의 단위로만 여겨졌던 '미천한' 인간들에게 '소비'대상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높으신 부자들은 이제 단순히 체면이나 폭동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일정 이상의 '시민'이 잘 살아줄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를 '중산층'이라 부릅니다. 이제 이들은 빈민과 지배층 사이에 존재해 혹시 만일의 경우, 폭동같은 충돌을 막아주는 방어막의 역할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처럼 요긴해보이는 자본주의에도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중산층들이 쓸데없이 높은 분들의 자리를 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높은 분들의 자리 중에 일부를 그들을 위한 자리로 비워둬야 했는데 높은 분들 입장에서 이는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중산층들을 위해 '하원'이라는 자리를 따로 만들었습니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절대다수를 대표한다면서 왕을 죽이거나 지배층을 없애버려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로 인해 대대적인 혁명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결론적으로 혁명이 끝나고 계급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높으신 분들은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돈을 모아 지출해야 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함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군대를 모으고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면 의외로 쌈박하게 군대가 모일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를 훌륭히 증명해 보였지요. 이른바 징병제, 국민개병제의 등장입니다.
이 군제의 등장은 높으신 분들 사이에 발상의 전환을 불러옵니다. 생각해보면 높으신 분들끼리의 특권이라는 것도 황제나 왕의 기분에 따라 언제든 쉽게 날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자본'과 '국민'이라는 두 무기가 생겼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은 도태되었고 소멸했습니다. 지배자들은 저마다 앞다퉈 자신이 곧 이 '국민'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수장임을 선포하였고 이제 군왕들은 빈말로라도 높으신 분들의 대표라고 쉽게 말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국가'의 이익은 곧 '국민'과 '민족'의 이익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실제로는 누구에게 많이 가는 이익이었든지 말이지요.
이제 전쟁이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경쟁은 치열해졌고, 이미 혁명을 경험한 높으신 분들(죽었던 편이든, 죽였던 편이든)은 좋든 싫든 간에 중산층을 일정 이상 끌어올리는 것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산층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졌고 그것은 그들이 가진 재산과 책임에 대한 당연한 대가로 여겨졌습니다.
식민지와 이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은 필연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단순히 자본이 원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높으신 분들은 '국민'들이 벌이는 싸움이 조금은 먼 곳에서 벌어지기를 원했고, 그들에게 주어야할 성과물들도 가급적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평등을 논하면서 갑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등을 말하는 아랫 것들에게 갑질할 대상을 만들어주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국민'들에게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야만과 싸우게 하였고 문명의 빛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본토에서 밀려난 '국민'들은 야만인들 앞에 서서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갑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조차도 하기 힘들었던 비참한 빈민들도 있었는데 그들을 위한 최후의 갑질거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얀 피부색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빈민들이었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빈민들이 존재했고 어설피 지급받은 감자를 사먹을 돈과 어설피 습득한 지식은 잠재적으로 언제든 모든 체제를 송두리째 뒤엎을 수 있는 위협이었습니다. 빈민들은 공장을 돌리기위해 군대를 유지하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었으나 동시에 골치아픈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베르사유 궁전을 약탈했으며, 이들이 높으신 분들의 마차를 습격했으며, 이들은 연약하고 힘없어 보이는 척 불쌍한 척 하고 있지만 언제든 등만 돌리면 주저없이 높으신 분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불평분자들을 위한 탈출구로서 미국과 식민지가 존재했습니다. 특히 많은 높으신 분들은 이러한 불만층들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보다 차라리 미국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불만을 품고있었으며, 몇몇 정신나간 놈들은 기껏 공부를 하더니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높으신 분들을 끌어내려야하는 그럴듯한 이론까지 만들어 빈민들을 선동하고 얼빠진 몇몇 높으신 자제와 중산층들마저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이제 국가에게 교육을 통제하는 일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됐습니다. 교육은 전쟁에 나갈 충성스런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국민교육과, 이들을 이끌고 다스리기 위한 높으신 분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으로 이분되었습니다. 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다양성은 소멸되어야만 했습니다. '국민'들을 위한 교육의 내용은 대개 이런 것이었습니다.
너는 국민이다. 그렇게 태어났으므로 너는 이 '국민교육'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배고프다고 폭동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일단 그 전에 일을 해라. 주어진 몫이 적다고 불평하지 말고 현재에 만족해라. 만일 만족할 수 없다면 더 열심히 일을 해라.
너는 이제 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소한의 셈도 못한다면 우리나 너네나 이 체제에서 살아갈 수 없다. 이제 작업반장이나 식육점 아저씨가 속여도 꼭꼭 받아낼 수 있게 되었다.
너는 이제 국가를 배우고 국민으로서의 자세를 배운다. 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태어났으며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치는 일이야 말로 가장 값진 일이 될 것이다. 아? 여자?... 어.... 여자는 이러한 남자들을 건강하게 낳고 키우는 역할을 맡은 중요한 존재이다. 그래서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하지만 결국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높으신 분들의 치킨게임은 결국 종지부를 찍었고 자본가들을 이용해왔다고 생각한 제일 지체높으신 분들은 일개 평민이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높으신 분들은 허겁지겁 '다정한 여러분의 친구', '높은 자리에 있지만 할 일은 하는 사람' 행세를 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승전국도 예외없었습니다. 노블리스오블리제라는 개념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미 높으신 분들이 되었지만 제일 윗선을 날렸다고 자본가라고 평안할 일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다가오는 위협속에서 새로운 생산과 소비의 주체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안정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결국 빈민들을 '형식상'으로도 전부 껴안기로 합니다. 여기에 '여성'들까지 포함하게 됩니다. 전쟁 중에 보여준 그녀들의 생산능력도 눈여겨볼만 했지만 예로부터 높이 평가받아온 '여성들의 소비능력'은 새로운 자본의 동력으로서 주목받을만 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들의 소비는 분명 더 각광받을 수 있는 측면이 많았습니다. 노예해방이 그렇듯 여성해방 역시 경제적인 측면이 고려된 결과입니다. 이것이 일시적이며 단발적인 흐름으로 멈추지 않고 그 권리를 이어오다 '유리천장' 개념까지 오게된것은 그들이 가진 투표권, 사회에서 갖는 그들의 비중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중산층은 그 자체로 훌륭한 소비와 생산 유닛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부층 이하 모든 가정이 중산층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하 구간의 가정에서는 충분히 안정을 희구하고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여성노동력의 범위가 단순히 집안에 한정되서는 안됐습니다. 초기, 그들이 생산으로서의 측면에만 맞춰져 있었을 때는 그래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들에게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들은 좀 더 소비해야 했습니다. 즉 서민(구 빈민)들은 부부의 수입과 지출이 합쳐져야 비로소 어느 정도 안정된 소비유닛개체로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일시적인 생산 증가와 사회하위층 일자리부족 해결은 덤입니다.
모든 쓰임에 공짜는 없습니다. 결국 기존 중산층 이하의 구간, 기존 여성의 역할에 생산 역할까지 여성들이 맡게되면서 이제 서민남성들은 마지막 남은 갑질거리마저 뺏기고 만 것입니다. 맙소사. 흑인과 장애인에게도 못하게된 처지에 말이죠. 거기에 여성교육이 고등교육까지 확대되고 전문직 여성이 등장하면서 이제 결혼연령은 늦어졌습니다. 여성이 남성의 도움없이 단독으로 경제력을 발휘할 수 있게되면서 피해를 본 측은 상대적으로 하위 구간의 남성들입니다. 여성해방이 완료된다면 이건 이것대로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그 쪽에서는 더 이상의 소비를 창출하기 어렵게 되거든요. 이제 또다른 누군가를 해방해야 되는데 자... 이젠 누구를 해방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영원히 완료되지 않는 쪽을 택할까요.
생각해보면 좌파적 사고란 소위 말하는 진보란 결국 자본주의없이 존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노예도, 빈민도, 여성도, 동성애도, 동물도.... 결국 자본주의적인 필요에 따라 권리(?)를 하나씩 획득한 것에 가깝다고 보니까요. 이제 더 이상 확장할 대상이 없다고 여긴다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 아닐지. 높으신 분들께서 다음 탈출구를 찾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물론 데탕트도, 중국개방도, 한일협정도, 처칠의 노벨상도, IS가 파는 석유도 또다른 의미로 확장이긴 하지요. 기회가 되고 정신이 되면 증오의 대상을 계속 생산해냄으로서 성장동력을 얻는 인류의 과정도 이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두들겨보고 싶네요.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1의 생산동력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1이냐면 소비 1은 항상 기본으로 먹어주는 상수계층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백성이, 빈민이, 식민지가, 여성이, 제 3 세계가 그 생산 동력으로서 존재해왔지만 이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음. 마지막 문단은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놔둬 보겠습니다. 이대로 전부 떠든건 아니고 대략적인 내용은 이랬는데 치다보니 살이 엄청 많이 붙었네요. 하핫;;; 얼치기 학부생 글 같은거라고 생각하고 봐주십시오. 다시보니 이것저것 마구 뒤섞인것 같은 글이 됐네요. 인권의 확장 개념 같은거.... 사실관계가 틀린 것은 가차없이 지적해주세요.
요새 그림으로 세계를 표현하는 일에 자신이 없어진 후로 생각하는 일마저 종종 게을리하곤 합니다. 이렇게라도 정리해놓지 않으면 제 딴에는 깊게 사고하는 일을 일상에 치여 멈출것만 같네요. 글을 너무 오래붙을고 있으면 이마저도 다시 안할것같아 이쯤에서 끊습니다. 비문투성이일게 뻔한 정신없는 긴 글 봐주신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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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글은 저렇지만요. 허헛.
다만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그러니까 인간의 욕망에 기반해 발전해왔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싶은게지요.
사회는 누군가는 많이 갖고 누군가는 적게가진 상태로 유지될 수 밖에 없는데, 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는 그 빈부차를 '납득'시키기위해 고안된 사회이념이다. 뭐 이런 것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