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같은 시국에 사랑이 웬말이냐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찌질한 사랑에 관해 글을 적고 싶습니다.
아.. 글을 적으려고 보니 글자 수 제한이 있군요.
여러편에 걸쳐서 글을 써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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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금사빠
입니다. 명백한 사실부터 인정하겠습니다.
시월이 시작되던 날. 알고 지낸 지는 4년 가까이 된 그녀의 손을 나도 모르게 잡게 되었습니다.
알고 지낸 4년 동안 그녀도 연애를 했었고, 저 또한 연애를 했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보기에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따듯하게 반길 줄 아는 사람이었고, 음악에 몸을 맡기며 연주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쾌활하게 웃는 사람이었고, 쾌활하게 웃는 만큼이나 저와 같은 광대의 한 면이 보였습니다.
술에 아무렇게나 취한 모습을 편하게 보여주기도 하였고, 그런 그녀를 못내 안타까워하는 나였습니다.
그리고 이내 곧 잊어버리곤 하는 나였습니다.
저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니깐요. 그저 아는 사람일 뿐. 아는 후배일 뿐. 아는 동생일 뿐.
그런데 그 날 이후로 내 마음에는 배가 하나 톡 하고 떨어졌습니다.
동아리 모임에서 서로 술에 취했을 때, 이런저런 지나간 얘기를 할 때,
나도 모르게 나의 팔뚝을 장난스레 치던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녀와 12시간 가까이 곁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피자와 스파게티를 먹었고, 커피를 마셨으며,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뜻밖에 정말 재미있었고, 얘기를 더 하고 싶어진 저는
그날 미리 봐둔 고양이가 있는 맥줏집을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말하며 맥주를 한잔 하자고 했습니다.
아니, 길거리 어딘가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때부터 속으로 맥주 한잔 하자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곤히 잠든 고양이를 바라보며 그녀와 맥주를 마셨습니다.
저는 술이 약해 맥주 두 잔에 이미 온몸에 오한이 올 정도로 취해 있었습니다.
평소의 저였다면 술자리에서 엎드려 자고 있었을 저입니다.
하지만 그 날만은 정신이 또렷했고, 경주법주 200mL를 따끈하게 데워 마신 지금도 정신이 또렷합니다.
또 하지만 정신이 또렷했는데도 불구하고 화장실을 다녀온 저는 무슨 용기에선지 그녀의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손을 잡았습니다. 아마 정신이 또렷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누구든 사랑에 취하면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용기를 내어 손을 잡은 뒤로는 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손을 꼭 잡고 길거리를 걷던 그 밤이 생각납니다.
넬의 고양이라는 노래를 처음 듣던 그 노래방이 생각납니다.
동아리 모임에서 몇 번 그녀와 함께 노래방을 간 적이 있지만, 그때만큼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울지 못해 웃는 건 이제 싫은데
깔끔하고 시원하고 아름답게 가성을 처리를 하던 그녀에게 풍덩 빠져버렸습니다.
제 마음속에 배가 툭 하고 떨어진 순간입니다.
근처 카페에서 첫차가 오길 기다리며 서로 별다른 말없이 기대고 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그녀는 첫차를 타고 떠나갔고, 그때부터 우리는 자연스레 매일 카톡을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매일 보고 싶어졌고, 아무 이유 없이 생물관 벤치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한 번 더 그녀와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에 땀이 찰 때까지 꼭 잡은 두 손을 놓지 않은 채 영화를 보았습니다.
세 번째 마디 손등에 나보다 더 털이 많던 그녀.
작고 몽실몽실한 손을 가진 그녀.
이번에도 맥주 한잔 하며 그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벌써 고백은 이르겠지? 그래 술 먹고 하는 고백은 최악이야.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는 내 마음을 좀 더 전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그녀와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오늘 해야만 하는 과제가 있다며 버스를 타고 떠났습니다.
최첨단 GPS 시스템을 통해 버스의 도착 시각을 알리는 버스 계기판과
투철한 직업 정신을 가진 버스기사가 야속해지는 날이었습니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는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그녀와 두세 번 정도 더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떨리는 순간들이었습니다.
너무 떨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순간들.
하는 수 없이 그저 그런 재미없는 질문들을 던지던 나.
왜 재밌는 이야기도 할 줄 모르며, 재치있게 그녀의 말을 받아주지 못하는 걸까 하는 나였습니다.
그리고 용기 있게 주말에 시간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세 번의 질문과 세 번의 답변과 세번의 주말이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어제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다던 영화를 함께 보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역시나 돌아오는 뻔한 대답.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뻔한 대답을 하는 나.
그리고 이런 저를 술안주로 삼아 고등학교 불알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토요일 밤.
결국,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인생 최대 흑역사를 쓰고 말았네요.
술에 취해 장난삼아
전화나 해볼까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제 폰을 빼앗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버린 친구들.
다시 폰을 뺏어 전화를 끊자 이내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
그리고 어리바리하게 어떡하지 으아 하다 이내 끊긴 전화.
그리고 또다시 전화를 거는 친구의 손.
여보세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여보세요 아 전화를 잘못 걸었어. 미안해
네
떠들썩한 술집의 주변 분위기.
떠들썩한 친구들의 말.
반대로 전혀 떠들썩하지 않은 나의 목소리.
멍청한 목소리. 찌질한 목소리.
이런 소리가 그녀에게 분명히 전달되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아... 를 반복하며 이미 취했지만 더 취하고자 술잔을 기울이던 내가 있습니다.
끝입니다.
올해 이적 콘서트는 사랑하는 사람과 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으로 가고자 굳게 마음먹은 콘서트.
역시나 혼자 가게 되겠지요.
어쩌면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느지막하게 티켓을 예매해보려 인터파크에 들어가 보며 좋은 자리가 없다며.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이적의 부산 콘서트.
매일 매일 접속하던 인터파크의 티켓 공지.
버스정류장에서 그녀를 데려다주며
같이 보러 갈래
생각해볼게요
지나가는 대화.
말 그대로 지나간 것이겠지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여전히 찌질합니다.
글을 쓰는 목적이 뻔하거든요.
동정을 받고 싶다. 관심을 받고 싶다.
세상에 여자는 많아요.
안타깝습니다.
죽창을 내려놓습니다.
관종이다
세줄요약좀
봄날이 올 거예요
힘내세요
그러나 정말로 기다리는 것은 그녀의 클릭 또는 터치.
압니다. 그녀가 이 글을 보더라도 저에게 연락을 주지 않을 거란 사실을.
십 년이, 이십 년이 지나면 그때 그랬었지 하며 추억할 저란 걸 압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저를 끌어당기는 소설책입니다.
사랑은 오해라는 글귀가 이 책에서 비롯됨을 알고 선택한 책입니다.
그리고 이내 이 책을 읽으며 슬퍼졌습니다.
나는 '그녀'처럼 못생기지도 않았습니다.
상처가 있지만 '그녀'만큼의 상처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녀'만큼 어둠이 존재하지만 '요한'처럼 밝게 지내려 애씁니다.
실제로도 밝은 편입니다. 오히려 실없는 소리를 자주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슬퍼졌습니다.
그녀에게 공감할 수 있었고, 책의 화자에게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삶'을 살고 싶지만ㅡ 사랑이 없어 '생활'을 하는 책의 화자.
알고 보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곡은
제가 즐겨 듣던 acoustic cafe의 'For Your Memories' 앨범 수록곡 pavane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개가 전혀 관련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옛사랑인 것만 같습니다.
언젠가는 우연히 그녀와 만날 것을 압니다.
그때 파반느가 생각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노래가 생각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