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최고의 팀이 가려지는 경기이자, 한국야구 최고의 축제. 바로 KBO 한국시리즈 입니다. 오늘 두산 베어스와 NC 다이노스가 올해 최강의 자리와 우승 트로피를 놓고 진검승부를 펼치게 되는데요, 여기서 질문하나 드릴께요. 1982년부터 있었던 이 한국시리즈 이전에도 통합 우승이라는 개념의 대회가 있었을까요? 정답은...있다 입니다. 바로 실업야구의 결승전인 코리안 시리즈가 현재의 한국시리즈의 전신으로도 볼수 있는 통합 결승전입니다. 1977년 일본 퍼시픽리그가 사용한 전후기제도를 도입하면서 통합우승을 가리는 경기를 만든 것인데, 이번 한국시리즈를 맞아 그때의 경기들을 한번 보고자 합니다.
- 점수표 하단에 기록된 경기내용은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 신문기사의 출처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이며 일부 내용은 1999년에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편찬한 한국야구사, 나무위키를 참고했습니다.
#0. 1977년 이전의 실업야구.
1904년, 선교사 질레트가 한국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을 만들면서 이 땅에 야구라는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했고, 그 씨앗은 점점 자라나 1920년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1] 개최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927년 9월에는 신산은행, 체신부, 용산 철도청, 경성전기 소속의 야구팀들이 모여 한국야구사 최초로 결성된 실업연맹인 "경성실업연맹"이 창설되었고, 경성실업연맹이 주최한 경성실업야구연맹전은 1940년 춘계대회까지 지속되었고 한반도 최초의 야구중계도 이때 이루어집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 문부성의 야구통제령[2]이 시행되며 한반도에서 야구가 금지됨에 따라, 암흑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해방을 맞이하며 다시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해방 1년후인 1946년, 한성실업연맹이 창설되면서 본격적인 실업야구가 시작되었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1960년대 중반에는 14개에 달하는 실업야구팀이 존재하는 등 부흥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듯 팀이 늘어나자 1964년부터 페넌트레이스제도를 도입하게 되는데 그후 여러 팀들이 해체와 창단을 거듭한 실업야구리그는 1975년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롯데 그룹의 참가였습니다.
1969년, 일본프로야구 도쿄 오리온즈에 네이밍 스폰서로 참여한 롯데는 1971년 구단을 인수하는데 성공하며 본격적인 야구판에 뛰어 듭니다. 그리고 4년후인 1975년 3월 11일 롯데제과측에서 대한야구협회에 실업야구팀 창단을 신청하게 되는데 이때 팀명이 바로 롯데 자이언츠(Lotte Giants)였습니다. 이 것이 왜 새로운 전환기였냐면 그전까지 대부분 시청야구팀 또는 금융권 팀들이 대부분이던 실업야구팀에 한 기업이 상당한 규모로 실업야구팀을 준비해서 만든 것은 롯데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죠. 롯데의 참가 이후 기업들의 참가가 활발해 집니다. 1년후인 1976년에는 한국화장품이 야구단을 창단했고 1977년에는 포항제철에서 야구단을 창단하게 되었죠.
1977년, 기업들의 참가로 11개팀으로 이루어 지자, 실업야구연맹에서는 춘계-하계-춘계리그로 진행되던 기존의 운영을 버리고 새로운 리그 운영방식을 발표합니다.[3] 당시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에서 도입한 전후기제도를 차용해 실업야구 또한 전후기 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단일리그에서 실업팀과 금융팀간의 양대리그로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전기리그 종합우승팀과 후기리그 종합우승팀은 3판 2선승제의 "코리안시리즈"를 치르게 되며 이 우승자가 그해 최고의 실업야구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정은 한국 야구사 최초 통합결승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1. 1977년 : 육군 야구단, 첫번째 코리안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다.
1977년에 도입된 실업야구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양대리그로 분리. 금융권 팀으로 묶은 금융리그(5개팀), 그외 팀으로 묶은 실업리그(6개팀) -금융리그 : 한일은행, 기업은행, 상업은행, 제일은행, 농협 -실업리그 : 롯데, 한국화장품, 한국전력, 철도청, 육군, 성무[4] ② 전기리그는 전기 1차리그, 전기 2차리그로, 후기리그는 후기 1차리그, 후기 2차리그로 나뉜다. ③ 전기 1차리그를 마친후 금융리그 1위, 실업리그 1위팀끼리 3판 2선승제의 결승 3연전(=플레이오프)을 치른후 그 우승팀이 전기 1차리그 종합 우승팀이다. 전기 2차, 후기 1차, 후기 2차리그도 동일하다. ④ 전기 1차리그 우승팀과 전기 2차리그 우승팀끼리 맞붙어서 전기종합우승팀을 뽑으며 후기 1차리그 우승팀과 후기 2차리그 우승팀이 맞붙어 후기종합우승팀을 뽑는다. ⑤ 이 두팀끼리 5판 3선승제의 코리안 시리즈를 치른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써놓고 보니 복잡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크게 복잡하지는 않죠.^^;
1977년 타율 1위,홈런 1위, 타점 1위, 도루 1위, 출루율 1위의 주인공. 김재박.
전기리그 최강자는 타격 8관왕[5]의 김재박을 앞세운 한국화장품이었습니다. 전기리그 1차리그에서 7승 2패를 기록한 한국화장품은 결승리그에서 육군 야구단을 꺽으며 창단 2년만에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더니 그 기세를 몰아 전기리그 2차리그에서도 7승 2무 1패를 기록하며 결승리그에 진출 마지막 경기에서 롯데를 상대로 김재박이 끝내기 홈런을 치며 전기리그 통합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반면 후기리그의 최강자는 육군이었죠. 후기리그 1차리그에서는 육군 야구단이 6승 2무 1패를 기록하며 결선리그에 진출 상업은행을 꺽고 우승을 차지했고, 후기리그 2차리그에서도 6승 3무 1패를 기록하며 결승리그에 진출, 롯데와 한국화장품을 상대로 2승 1무를 기록해 후기리그 통합 챔피언에 올라섰습니다.
◎ 1차전 - 10월 22일, 동대문 야구장
◎ 2차전 - 10월 24일, 동대문 야구장
그리고 최초의 코리안시리즈는 한국화장품과 육군간의 대결로 성사되었고 10월 22일 대망의 첫번째 경기가 펼쳐졌습니다. 1차전에서 1:0으로 승리를 거둔 육군야구단은 2차전에서 뒤지고 있던 상황이었던 5회말, 1사 만루의 찬스에서 8번타자 김용운이 불펜투수였던 김호중으로부터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는 2루타를 뽑아내며 3:1로 역전승을 거두었고 1경기만 이기면 최초의 코리안시리즈 우승팀이 되는, 매우 유리한 고지에 올라섰죠.
◎ 3차전 - 10월 25일, 동대문 야구장 25일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3차전에서 한국화장품은 혼신의 힘을 다 했습니다.
육군 야구단 측에서 주심이었던 백인원 심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44분이나 지연되는 촌극이 발생한 이날 경기는 4회말 육군의 선발투수 하기룡을 상대로 밀어내기로 1점을 한국화장품이 먼저 뽑아내었고 곧이어 만루찬스에서 정구왕이 안타를 기록하며 2:0으로 한국화장품이 리드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4회말에 육군의 주전포수 유승안이 볼판정에 항의를 하다 퇴장당하며 분위기는 한국화장품 쪽으로흐르는듯 했습니다.
그러나 유승안 대신 대타로 투입된 금광옥이 5회초에 좌측담장을 넘기는 솔로홈런을 기록하며 추격의 불씨를 살렸고 7회초 육군의 4번타자 김준환의 솔로홈런, 8회초 2사 1,2루 찬스에서 구영석이 동점안타를 기록하며 3:3 동점을 기록하며 8천명의 관중의 환호를 이끌어 냈습니다. 한국화장품 입장에서는 5회말 찬스에서 단 1점만을 뽑아내는 빈타로 결국 이길수 있는 경기를 무승부로 진행되었죠.
◎ 4차전 - 10월 26일, 동대문 야구장
경기초반 한국화장품은 육군에게 선취점을 내주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으나 곧바로 에이스 김재박의 동점 2루타와 김일환의 역전타로 2:1로 앞서나가기 시작했고 5회와 9회에 점수를 보태며 6:1까지 벌려 놓습니다. 육군은 김일권이 출루한후 대타 유두열이 좌측담장을 넘기는 투런을 기록했고 구수석과 김준환의 연이은 안타로 1타점을 더 추가했지만 결국 더 이상의 점수를 뽑아내지 못하고 결국 경기를 내주게 됩니다.
◎ 5차전 - 10월 27일, 동대문 야구장
한국화장품의 김일환이 솔로홈런등으로 6회까지 3:1로 앞서나갔습니다. 5회말에도 무사 1,3루의 찬스를 맞이했죠. 그러나 구원투수로 올라온 이선희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팀을 위기에서 건져냈고 7회초, 육군은 위학수, 이해창이 2타자 연속 볼넷으로 걸어나갔습니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선 유승안이 한국화장품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김재박의 4번째 공을 좌측담장을 넘기는 쓰리런을 때려내며 4:3으로 역전에 성공했고 9회초에 구영석이 한국화장품의 김호중의 공을 받아쳐 넘기는 투런을 기록하며 추격의지를 완벽하게 꺽어버리고 최초의 코리안시리즈 우승팀이 되었습니다.
전반기에 정규리그 우승뿐 아니라 백호기등 5개 대회를 휩쓸었던 한국화장품은 황규봉이 협심증으로 시리즈 내내 뛰지 못했고, 4번타자 김유동 또한 개인 사정으로 결장해 전반기의 폭발적인 기세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3. 1978년 : 육군 경리단의 2연패 전년도 코리안 시리즈는 매 경기 8,000명의 관중들을 동원하며 인기몰이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 진출팀을 가리기에 꽤나 복잡한 룰, 그리고 기업은행의 해체와 포항제철 야구단 창단으로 인해 실업리그와 금융리그 간의 팀수 차이가 발생하게 되어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실업야구연맹은 단일풀리그제를 도입하게 됩니다. 전기리그 1차~2차리그 우승, 준우승팀과 후기리그 1차~2차리그 우승, 준우승팀이 풀리그를 통해 최다 승리팀이 코리안 시리즈를 우승하게 되는 심플한 방식으로 진행하게 된거죠.
1978 4월에 시작한 실업야구는 10월 8일 후기리그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종료되었고, 코리안 시리즈에 진출할 4팀도 가려졌습니다.
롯데가 우승이라니 으아아아앙
◎ 풀리그 1경기 - 10월 19일, 동대문 야구장
-포항제철 : 1승 -롯데 자이언츠 : 1패
후기리그 1위 롯데와 전기리그 2위의 포항제철간의 경기는 그야말로 난타전이었습니다. 2회말, 롯데는 김성호와 조용선의 활약으로 2점을 먼저 내며 앞서나갔습니다. 그러나 포항제철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고 3회초 포항제철의 이광은이 3루타를 시작으로 연이어 4방의 장타가 터지며 3:2으로 경기 흐름을 뒤집었습니다.
롯데는 4회말에 조용선이 또다시 투런홈런을 기록하며 재역전에 성공했지만, 6회초 포항제철의 유태중이 좌측담장을 넘기는 동점 솔로홈런을 기록하며 4:4 동점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8회초, 포항제철의 4번타자 윤동균이 볼넷으로 출루한후 신언호의 희플, 신현석, 유대성의 연속안타가 터지며 1점을 추가는데 성공, 5:4로 앞서나아갔고 유대성의 타점은 이날 경기의 결승타점이 됩니다.
롯데는 9회말에 주루플레이 실수로 무사 1,2루 찬스에서 1점만을 뽑아 낸것이 이날 가장 아쉬운 순간이 되었습니다.
◎ 풀리그 2경기 - 10월 19일, 동대문 야구장
- 육군 경리단 : 1승 - 성무 : 1패
당대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육군과 공군간의 군 라이벌 매치를 맞이해 양팀은 최고의 전력으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육군은 에이스 이선희를 선발투수로 세웠고 성무는 에이스 김현홍을 선발로 내세웠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날 경기를 투수전으로 예상했고 5회까지 그 기대를 부흥하듯 두명의 에이스들은 단 한점의 실점도 내주지 않고 전광판에 0이라는 숫자만을 띄워냈죠.
0의 행진이 멈춘건 6회 말이었습니다. 경리단의 리드오프 이해창이 좌익수 뒤를 넘기는 솔로홈런을 뽑아내며 1: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이죠. 이에 성무도 질세라 7회초 3번타자 김정수가 육군의 실책으로 출루한후 천보성, 이삼렬, 양종수가 연이어 안타를 기록하며 2점을 뽑아내 순식간에 역전에 성공합니다.
7회말, 경리단은 4번타자 유두열이 좌전안타로 출루한후 6번타자 함학수가 볼넷으로 출루한 1사 1,2루 찬스에서 타석에 들어선 유승안이 3루수 앞 땅볼타구를 기록하며 2사 2,3루의 기회를 맞이합니다. 이때 성무의 포수였던 차동렬이 패스트볼을 기록하며 1실점을, 그리고 선발투수 김현홍이 내려간후 구원투수로 올라온 계형철이 와일드피칭을 기록하며 3루주자였던 함학수가 홈으로 들어오며 3:2로 재역전에 성공했고 이것이 이날 경기를 마무리 짓는 결승점이 되어버렸죠.
◎ 풀리그 3경기 - 10월 20일, 동대문 야구장
- 육군 경리단 : 2승 - 포항제철 : 1승 1패
각각 1승을 먼저 챙긴 육군과 포항제철간의 경기는 경리단의 5번타자 김용희가 4타수 4안타 3타점의 맹활약을 펼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2회까지 3:2로 아슬아슬한 리드를 지키던 육군은 5회초 2사후 유두열이 안타로 출루한후 김용희가 좌측담장을 넘기는 투런을 기록하며 포항제철을 따돌리기 시작했고 이에 그치지 않고 함학수와 유승안이 연달아 2루타를 치며 팽팽하던 경기의 균형이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이날 경기 승리로 육군 경리단의 코리안시리즈 2연패까지 단 1승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 풀리그 4경기 - 10월 20일, 동대문 야구장
- 성무 : 1승 1패 - 롯데 자이언츠 : 2패
각각 1패를 안고 있는 양팀의 대결에서는 4번타자 정현발이 7회에 솔로홈런을 치는등 분전했으나 점수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2패를 떠안게 됩니다.
◎ 풀리그 5경기 - 10월 21일, 동대문 야구장
- 성무 : 2승 1패 - 포항제철 : 1승 2패
양 팀다 1승 1패를 기록한 상황이었지만 육군 경리단이 1패한다면 2승 1패로 재경기를 바라볼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양 팀다 1승이 간절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중력은 화끈한 타격전으로 전개되었고 송인웅의 솔로홈런을 앞세운 성무가 9회말 윤동균의 솔로홈런으로 끝까지 추격한 포항제철을 제치고 2승 1패를 기록하며 재경기의 희망을 갖게 됩니다.
◎ 풀리그 6경기 - 10월 21일, 동대문 야구장
- 육군 경리단 : 3승 - 롯데 자이언츠 : 3패
만약 육군이 패배한다면 성무와의 재경기를 준비해야되는 상황에서 마주한 상대는 2패로 우승에 실패한 팀인 롯데 자이언트였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승리를 위해 육군이 내세운 카드는 최고의 에이스 이선희였죠. 사실상 일방적인 경기가 될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했지고 경기는 그렇게 흘러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점수를 내야된다는 압박감에 2회말 함학수가 롯데 선발 강용수를 상대로 친 솔로홈런을 제외하고 더이상의 추가점을 내지 못했습니다. 매이닝 주자를 출루하고도 말이죠.
1위 육군 경리단 3승(우승) 2위 성무 2승 1패 3위 포항제철 1승 2패 4위 롯데 3패
그러나 이선희의 압도적인 투구에 롯데는 단 4안타만을 기록하며 영봉패를 기록했고 육군 경리단은 3승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 사상 첫 2연패를 기록합니다. 에이스 이선희는 1978년 실업야구 MVP를 수상하며 자신의 가치를 만천하에 보여주었죠.
#4. 1979년 : 롯데 자이언츠, 창단 첫 우승! 1979년에는 실업야구계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규정또한 바뀌게 됩니다. 우선 실업야구연맹이 대한야구협회 산하로 들어감에 따라 대회운영주체가 대한야구협회로 단일화가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2년만에 단일리그제에서 양대리그제로 변경했으며 각각 타이거즈 리그와 라이온즈 리그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또한 각 리그별로 1차리그부터 5차리그(1차~4차리그 + 추계리그)를 치른 후 각 리그 우승, 준우승팀이 코리안시리즈에 진출, 우승팀을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단기전이 아닌 토너먼트 제도를 도입해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9년 9월 17일 마지막 대회의 우승팀이 한국전력으로 확정되면서 7개의 팀이 가려졌습니다. 홀수인 이유는 규정상 1차리그부터 4차리그까지 우승팀 혹은 준우승팀이 중복되는 경우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성무는 2차/3차리그 우승, 포항제철은 3차/4차리그 준우승을 했기 때문에 총 참가팀이 7개 팀이 된거죠.
◎ 1경기 - 9월 18일, 동대문 야구장
상업은행의 하기룡이 1회 1실점을 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지만 막강타선의 경리단을 단 5안타로 묶었고 상업은행은 4번타자 김준환의 솔로홈런뿐 아니라 8개의 안타를 기록하며 승리를 거두며 코리안시리즈 3연패를 도전하던 경리단을 광탈 시켜버립니다.
◎ 2경기 - 9월 18일, 동대문 야구장
전년 실업리그 MVP였던 이선희, 타격 3위(.350 / 타이거즈 리그)였던 송영운을 앞세운 농협과 다승왕(5승 / 타이거즈 리그)인 정선두, 도루왕(13개 / 타이거즈 리그) 이해창을 앞세운 롯데의 맡대결이 펼쳐졌습니다. 이날 대결에서 롯데는 이선희를 상대로 2,3,4회에 총 7개의 안타를 얻어내는데 성공하며 4점을 뽑는데 성공합니다. 농협은 빈타에 허덕이며 이선희는 9이닝 4실점 완투패를 기록, 결국 탈락하게 됩니다.
◎ 3경기 - 9월 18일, 동대문 야구장
승리의 주역이었던 24살의 김용희.
신생팀 포항제철과 한국전력공사의 맞대결이었습니다. 당시 라이벌 의식이 강햇던 두 팀간의 경기는 이광은, 윤동균, 김용희, 장효조라는 사기적인 타선이 빛을 발한 포항제철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한전은 김용달과 김중근의 분투로 3점을 뽑아내는데 성공했지만, 경기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죠.
◎ 4강 1경기 - 9월 19일, 동대문 야구장
부전승으로 미리 4강에 안착했던 성무와 롯데간의 맞대결이 펼쳐졌습니다. 다승왕과 방어율 3위(10승 / 2.18 / 라이온즈 리그)의 정순명과 도루왕(20개 / 라이온즈 리그)을 차지한 김재박이 버틴 성무는 6회초, 김재박의 적시타로 선취득점을 뽑아내는데 성공합니다. 롯데는 8회말, 성무의 폭투와 실책이 연달아 나오며 1점을 따라가는데 성공하죠. 그리고 9회말, 롯데의 4번타자 김한근이 안타를 뽑아내며 출루, 그후 연이은 희생타가 나오며 2사 3루가 되었는데 이때 김성호가 스퀴즈 번트를 성공시키며 김한근을 홈으로 불러들이는데 성공하며 2:1로 승리합니다.
◎ 4강 2경기 - 9월 19일, 동대문 야구장
코리안 시리즈 2연패를 달성햇던 경리단을 꺽고 올라온 상은은 그때의 맹렬한 기세를 이날 경기에도 이어갔습니다. 1회말, 4회말 2득점을 먼저 뽑아내는데 성공한 상업은행에 반해 포항제철은 득점권 찬스를 맞이할때마다 번번히 범타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6회초 포항제철이 안타2개와 볼넷 1개를 얻어내며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9회초, 클린업 트리오가 타석에 들어서는 기회를 맞이한 포항제철은 선두타자로 나온 이광은이 안타로 출루한후 윤동균(안타)-김용희(볼넷)을 기록하며 무사 만루가 되었고 내야 땅볼과 안타로 2점을 뽑는데 성공, 최종 스코어 4:2로 결승에 진출하게 됩니다.
◎ 결승전 - 9월 19일, 동대문 야구장
실업야구 막내들 간의 맞대결에서, 포항제철의 박상열의 호투에 8회까지 단 2점만 뽑아낸 롯데 타선에 비해 포항제철은 5,6회에 연속해서 2점을 뽑아내는데 성공했고 8회초와 9회초에도 각각 1점을 추가하며 6:2로 아웃카운트 3개만 잡아내면 포항제철이 창단 원년인 1979년, 실업야구 최강팀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수 있었죠. 하지만 야구는 끝날때 까지 끝난게 아닌 스포츠. 9회말 롯데의 6번타자 조용선의 솔로홈런을 시작으로 8번타자 박순철, 9번타자 장정호, 1번타자 김형운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만루가 만들어 진데다 실책이 나오며 1실점. 2점차 까지 따라잡힌 포항제철은 천창호를 급히 마운드 위로 올려보내지만 1루수 김용희의 실책으로 또다시 1실점을 하며 6:5, 거기다 3루수 유상호마저 홈송구 실책을 기록하며 6:6 동점이 되었습니다.
10회에는 양팀다 득점에 성공하지 못한채 물러습니다. 그리고 롯데의 공격기회였던 11회말. 롯데의 이해창이 친 타구를 중견수 윤동균이 따라가 잡는데 성공....하나 싶었는데 글러브에서 공이 빠지며 담장 밖으로 넘어갔고, 홈런으로 인정되며 8:6, 극적인 롯데의 승리, 그리고 우승으로 1979년 코리안 시리즈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5. 1980년 : 경리단, 3번째 트로피를 올리다.
1980년에도 규정이 또 다시 변경되었습니다. 이유인 즉슨, 1979년 코리안 시리즈에서 우승기록이 없는 포항제철과, 롯데 자이언츠가 결승전에서 맞붙었기 때문에 우승팀 관계자들의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전기 1차리그~4차리그 우승팀끼리 전기리츠 결승리그를 통해 우승팀을 뽑고, 후기 1차리그~4차리그 우승팀끼리 후기리그 결승리그를 진행해 후기리그 우승팀을 뽑아 전기리그 우승팀 vs 후기리그 우승팀 5전 3선승제라는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방식은 프로야구 출범 이후인 1985년 KBO 한국시리즈때까지 이용되죠.
전기 2차리그 우승팀인 성무가 경리단(전기 1차리그 우승), 포항제철(전기 3차리그 우승), 한일은행(전기 4차리그 우승)이 전기리그 결승리그에 진출해 성무가 포항제철을 꺽고 우승을 차지해 코리안 시리즈에 먼저 안착했고, 후기리그 결승리그에서는 후기 3차리그 우승팀인 육군 경리단이 한일은행(후기 1차리그 우승), 포항제철(후기 2차리그 우승), 한국화장품(후기 4차리그)을 꺽고 우승을 차지, 코리안 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한국전력은 전기 1차, 전기 3차, 후기 1차리그에서 준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콩라인..
당시 경리단은 권영호, 심재원, 김용철, 장효조가 버티고 있었고 성무는 팀의 주축선수였던 김유동, 김인식, 천보성, 김정수 등이 전역을 하면서 전력 약화가 우려되긴 했지만 김재박, 김진우, 김한근등이 팀의 중심을 잡고 있었습니다.
◎ 1차전 - 10월 17일, 동대문 야구장
경기 초반, 양팀의 타선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날 경기의 물꼬를 튼 것은 입대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신병 장효조였죠. 4회초, 경리단의 선두타자였던 4번타자 장효조는 안타로 출루한후 곧바로 2루를 훔치는데 성공하며 성무를 흔들었습니다. 이어 김일환이 장효조를 불러들이는 적시타를 때려내는데 성공했고, 김일환이 도루사를 했으나 이어 신언호가 좌측펜스를 넘기는 솔로홈런을 때려내며 2:0으로 달아나는데 성공합니다.
한편 성무는 경리단의 선발투수 권영호에게 꽁꽁 묶이며 9회까지 단 5개의 안타만을 뽑아내는데 그치며 무득점으로 경기를 마쳤죠.
◎ 2차전 - 10월 18일, 동대문 야구장
경기 초반, 경리단의 서정환이 솔로홈런을 뽑아내는데 성공하며 선취득점을 뽑아냈습니다. 성무는 4회에 반격을 했지만 5회말, 경리단의 타선을 막아내지 못하고 내리 3실점을 하며 무너졌죠. 7회에도 김용철의 투런 홈런이 터지며 점수차이는 5점차까지 벌어졌고 성무는 이광은이 투런을 때려내며 따라가는 듯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 3차전 - 10월 19일, 동대문 야구장
5전 3선승제의 대결에서 내리 2연패를 당한 성무는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리단의 타선은 역시나 매서웠고 선취점을 뽑아냈지만 경리단은 곧바로 4점을 내는데 성공하며 일순간에 역전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기회는 성무에게도 찾아왔습니다. 8회말 무사 만루의 찬스에서 조용선이 안타를 때려내는데 성공하며 2점을 보태 4:3까지 따라 붙었고, 9회말, 2사 1,2루에서 김재박이 3루수를 스치는 2루타를 때려내며 동점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이죠. 그러나 양팀은 더이상의 추가점을 내지 못했고 연장 10회까지 무득점으로 경기가 종료되어 무승부가 되었습니다.
◎ 4차전 - 10월 19일, 동대문 야구장
1승만 챙기면 우승하는 경리단과 3연승을 해야 하는 성무. 양팀의 라이벌 매치는 4,000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무의 선취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0으로 앞서고 있던 성무는 이광은이 솔로홈런을 때려내는데 성공하며 2:0을 만들어 냈고 5회에는 양팀이 각각 1점을 내면서 3:1이 되었죠. 7회초와 9회초에도 1실점씩을 기록하며 6:1까지 벌어지던 상황. 하지만 경리단의 승리에 대한 집념은 5점이란 점수차이를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9회말, 경리단은 선두타자 김일환이 좌전 안타로 출루한후 김성호, 심재원이 김재박의 실책으로 걸어나가며 무사 만루의 찬스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선 김호인이 주자일소 2루타를 때려내는데 성공하며 6:4, 한순간에 2점차이로 좁혔죠. 달아오른 경리단의 방망이는 더욱 거세게 성무를 몰아 붙였습니다. 김우근이 몸에 맞는 볼로 걸어나가자 서정환이 내야안타로 또다시 무사 만루가 된 상황에서 차영화가 좌전 적시타를 때려내는데 성공하며 2,3루주자를 불러들이는데 성공, 동점을 만들어 냅니다. 다급해진 성무는 4번타자 장효조를 고의사구로 거르는 작전을 시도했지만, 5번타자 김일환의 1루 강습타구를 성무 1루수였던 조용선이 놓치면서 6:5, 경리단의 3번째 코리안 시리즈 우승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날 김재박은 4타수 4안타를 때려냈지만 결정적 실책으로 팀의 우승을 막은 역적이 되어 버렸죠.
#6. 1981년 : 최동원에 의한, 최동원을 위한, 최동원의 시리즈. 실업야구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바로 그 경기입니다. 실업야구를 몰라도 한번쯤은 들어 보셨거나, 방송등을 통해 "아! 그경기!"라고 하실 텐데요 바로 롯데와 경리단, 그리고 최동원과 김시진의 라이벌 매치가 열린 그 경기거든요.
1981년 1월 10일, 고교야구를 평정하고 연세대를 당대 최강의 야구팀으로 만든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이 롯데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자 많은 이들의 관심이 롯데로 쏠리게 됩니다. 그리고 1달이 채 지나지 않아 1월 31일, 수많은 실업팀의 구애를 받던 한양대 에이스 김시진이 군대를 선택, 경리단에서 뛰게 되고 이 20살 신병은 곧 경리단의 에이스로 떠오르며 맹활약 합니다.
한편 1981년 코리안시리즈는 진행방식에 약간의 수정이 이루어 집니다. 기존에 1차~4차리그로 진행되던 전기리그와 후기리그가 각각 1차리그, 2차리그만 진행되고 통합 승률이 가장 높은 팀이 코리안 시리즈로 직행하게 되게끔 변경 되었죠.
최동원이라는 천군만마를 얻은 롯데는 7승의 최동원을 앞세워 8승 1패 승률 0.889를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전기 2차리그도 5승 1패를 기록하며 상업은행과 공동 우승을 차지, 전기리그 통합 13승 2패로 코리안 시리즈에 직행하게 되었습니다.
또다른 결승 진출팀인 경리단은 후기 1차리그는 4승 2무 3패부진을 겪으며 한일은행에게 우승을 내줬지만 후기 2차리그에서 7승 1패로 우승을 차지, 전후기 통합 11승 2무 4패로 후기 1차리그 우승팀 한일은행을 제치고 코리안 시리즈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경리단과 롯데는 당시 실업야구 최강팀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롯데는 전기리그를 압도적인 성적을 내며 우승을 차지했고 후기리그도 시즌 막판까지 경리단을 추격했기 때문이죠. 경리단은 전기리그에서 부진했지만, 후기리그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마음껏 뽐내며 그 누구도 그들의 진격을 막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 1차전 - 10월 25일, 동대문 야구장
코리안 시리즈 첫 경기의 선발 투수는 김시진과 최동원이었습니다. 양팀의 최고의 에이스를 투입한 이날 경기는 9이닝 무실점 완봉승을 거둔 김시진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석규와 장효조의 합작으로 선취득점을 뽑아내는데 성공한 경리단은 6회에 3안타를 뽑아내는데 성공하며 1점을 더 추가했고,. 그리고 9회초 이석규가 솔로홈런을 뽑아내며 이날 경기의 마지막 점수를 기록하며 경기는 종료되었습니다.
참고로 롯데는 김시진에게 단 2개의 안타만을 때려내는데 그쳤습니다.
◎ 2차전 - 10월 26일, 동대문 야구장
2차전 선발은 롯데는 계형철을, 경리단은 배경환을 내세웠습니다. 1회초 배경환이 연타석 홈런을 얻어 맞으며 3실점을 기록하며 빈타에 허덕이던 전날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최강의 타선을 보유한 경리단이었죠. 1회말, 정진호와 김명구가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1점을 뽑아낸 경리단은 무사 1,2루에서 4번타자 장효조의 외야 뜬공때 롯데의 송구 실책으로 1점을 더 뽑아내는데 성공합니다. 또한 2회말에 안타 4개와 롯데의 실책 2개를 곁들여 3점이 추가하며 역전에 성공했고 이에 롯데는 최동원을 2회부터 투입하는 강수를 둡니다.
최동원은 이후 무실점으로 막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롯데는 1점만을 추가하는데 그치며 4:5로 패배를 기록합니다. 이제 경리단은 1승만을 하면 우승을, 롯데는 1패만 해도 우승의 기쁨을 경리단에게 넘겨줘야 했죠.
◎ 3차전 - 10월 27일, 동대문 야구장
여유가 있던 경리단과 절박함의 롯데. 이 두팀의 맞대결은 치열한 난타전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회말, 이해창의 투런으로 선취득점에 성공한 롯데였지만 경리단은 2회초 장효조가 곧바로 솔로홈런을 때려내며 따라붙었고 3회말에 다시 1점을 추가했지만 4회초 정구선이 투런을 때려내며3:3 동점이 되었죠. 그리고 6회초 경리단의 우경하가 솔로홈런을 때려내는데 성공하며 경리단이 앞서나가기 시작했고 7회초 다시금 1점을 추가하며 5:3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롯데가 7회말 김한근의 솔로홈런을 시작으로 8회말 대타 최정기가 투런을 때려내며 5:6으로 경기를 뒤집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경리단이 곧바로 대타 강기섭의 동점타로 1점을 추가하며 동점. 9회말 1사 만루의 찬스를 맞이했지만 김정수와 정현발이 범타로 물러나며 득점에 성공하지 못했고 11회 말에서도 1사 만루의 찬스를 살리지 못하며 1승의 기회를 날리게 됩니다.
경리단은 비록 비기긴 했지만 여전히 1승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고, 롯데는 내리 3연승을 기록해야 했죠. 그러나, 모든 이들이 힘들다고 하던 그 순간, 팀을 위해 묵묵히 마운드 위로 올라가던 사내가 있었죠. 바로 최동원이었습니다.
◎ 4차전 - 10월 29일, 동대문 야구장
우천 연기로 하루 연기된 이날 경기에서 롯데의 선발투수 최동원은 6이닝 동안 3실점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날 롯데의 타선은 각성했고 7회초, 10명의 타자가 3안타 4볼넷을 얻어내며 6점을 뽑아내는데 성공 7:3으로 뒤집어 냅니다. 4점차가 되자 롯데 덕아웃에서는 최동원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최동원을 차준섭과 교체하고 1루수로 내세웁니다. 그러나 8회말, 2사 만루의 위기가 닥치자 박영길 감독은 1루수 최동원을 다시금 마운드에 올려세웠고 남은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는데 성공하며 7⅔이닝 3실점 호투를 펼치죠.
◎ 5차전 - 10월 30일, 동대문 야구장
전날, 롯데의 불타오른 방망이는 차가운 가을바람에도 전혀 식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경기 초반부터 맹타를 가하던 롯데는 4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대타 김인식의 절묘한 텍사스 안타로 주자 일소에 성공, 5:1까지 점수를 벌립니다. 7회초, 경리단이 2점을 추가하며 5:3까지 따라 붙었지만 롯데는 최동원을 마운드에 올려 3이닝을 막아내는데 성공 경기를 6차전까지 끌고가는데 성공합니다.
◎ 6차전 - 10월 31일, 동대문 야구장
양팀의 마지막 대결이 될 6차전에서 양팀은 각각 최고의 카드를 꺼내 듭니다. 롯데는 최동원을, 경리단은 김시진을 내세운 것이죠. 1회초, 김시진을 상대로 이해창이 솔로홈런을 때려내며 기분 좋게 시작한 롯데는 2회말에 최동원이 경리단의 조종규에게 투런을 포함해 3실점을 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죠. 롯데는 3회에 곧바로 1점을 추가하며 따라 붙었고 5회에는 각각 1점씩을 주고 받으며 4:3, 경리단이 1점을 리드하는 모양새가 됩니다. 그러나 6회초, 1점을 추가하는데 성공한 롯데는 7회말 손상대의 결승 솔로홈런을 포함해 2점을 뽑아내며 6:4로 뒤집는데 성공합니다.
이날 최동원은 9이닝 4실점을 기록하며 완투승을 기록, 1981년 가을의 마지막을 결정짓는 투수가 됩니다. 이때 최동원의 기록은 가히 사람의 기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코리안시리즈 총 6경기중 6경기에 모두 등판, 42⅓이닝 2승 1패 1세이브 방어율 2.32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1984년 한국시리즈때 기록한 40이닝 4승 1패와 맞먹는 기록입니다.
#7. 그후...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며 실업야구는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집니다. 이후에도 실업야구는 존재했고 코리안시리즈도 존재했지만 그 어느 언론에서도 다루지 않아 정확한 기록을 확인하기가 어려운게 현실이죠. 실업야구는 2001년 육군 야구단(경리단)이 KBO 퓨처스리그로 편입되며 떠나고 포항제철 야구단의 해체 그리고 2003년, 마지막 실업야구팀인 현대해상 야구단과 제일유리 야구단이 해체를 선언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 [1]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배재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된 야구대회로 현재 전국체전의 전신입니다. 대한 체육회 개최 근황 제2회 대회부터 축구, 정구가 포함되고 1935년부터는 종합경기대회의 모습을 띄게 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로 입장권을 판매한 대회이기도 합니다.
[3]참고로 1년 전인 1976년 1월 1일에는 재미사업가 홍윤희의 주도로 한국프로야구추진위원회가 설립되어 프로리그 창설을 준비하기도 했기에 뉴스라이브러리 실험적인 성격도 띄고 있습니다.
[4] 당시 군 야구단은 공군과 육군으로 나뉘었고 육군 야구단은 말 그대로 육군이라고 표기하다가 1978년부터 경리단으로 변경되고, 공군은 1954년부터 성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1984년 육군 경리단과 성무는 통합하게 되며 2001년부터 퓨처스리그에 참가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5] 당시 기사에는 타격 8관왕이라고 나와있는데 현재 기준으로 보면 타격 5관왕 입니다. 이유는 당시에는 최우수선수상, 타격삼관왕상, 신인상도 포함 시켰기 때문이죠. 당시 김재박은 타격 1위(.439), 홈런 공동 1위(13개), 타점 1위(37타점), 도루 1위(24개), 출루율 1위를 기록했습니다. 출루율은 당시 신문기사에 1위 했다고만 나오지 정확한 기록은 실려있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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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등판 몇 번만 해도 구위가 무뎌지고 3일 등판에서 호투하는 선수가 거의 없는 걸 감안하면 최동원이 저렇게 투구하면서 저런 성적을 내서 팀을 우승시키는 걸 다른 투수들의 성적과 1:1로 비교하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정말 인간이 아니었고 당시의 한국야구 선수 중에서 메이저리그에서 계약할 만 한 선수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