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사진만 봐도 연세가 상당히 있을만한 할아버지 합창단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이 할아버지 합창단의 공식 명칭은 Ynysowen Male Choir 인데 분명 영국에 있는 영국 할아버지들의 합창단임에도 Ynysowen은 매우 낯선 단어입니다. 사실 Ynysowen은 영국 웨일스의 Merthyr Vale 지역의 웨일스어 표기입니다.
그리고 이 할아버지들은 Merthyr 지역의 한 마을 Aberfan에서 평범한 광부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였으나 50년 전 한 참사가 계기가 되어 합창단을 조직한 것입니다.
* 할아버지 합창단 Ynysowen Male Choir 사진
1966년 10월 21일 금요일 오전 9시 15분 Aberfan에서 벌어진 일
1966년 10월 21일 금요일 오전 9시 15분 영국 웨일스 남쪽의 한 조그마한 탄광촌 Aberfan에 들이닥친 비극은 고된 노동 속에 가족을 부양하며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던 광부들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 Aberfan의 위치(BBC 다큐 캡쳐)
10월 21일 금요일 탄광촌 어린이들은 이틀 내내 쏟아붓던 비가 그치자 들뜬 마음으로 마을 위쪽의 학교로 모여들었습니다. 금요일은 단축 수업(half-term holiday)이 있던 날이었기에 조금 후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거나 골목길에서 놀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막 학교에 도착한 아이들은 대부분 교실에 들어와 있었고 좀 늦은 아이들은 아직 건물 밖에 있었습니다.
* 1966년 당시 Aberfan의 Pantglas Junior School 아이들 사진(BBC 다큐 캡쳐)
그런데 9시 15분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 같은 굉음이 마을을 덮쳤습니다.
아무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채지지 못하던 순간 거대한 검은 흙더미가 교실 창문과 문을 부수고 덮쳐들어 왔습니다.
* 교실을 뚫고 들어온 검은 흙(BBC 다큐 캡쳐)
사실 위 사진의 교실은 아마도 고층에 있었거나 피해를 덜 받은 옆 건물의 교실이었을 텐데 무려 4만 입방미터의 검은 흙은 최대 13미터의 깊이로 학교 건물을 순식간에 파묻어 버렸습니다.
* 검은 흙에 파묻힌 Aberfan 전경(BBC 다큐 캡쳐)
* 검은 흙에 파묻힌 학교 모습(BBC 다큐 캡쳐)
전형적인 탄광촌이었던 Aberfan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학교로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비행기가 떨어지는 줄 알았다는 큰 울림이 사라진 곳에서는 9-10살 전후 아이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뒤덮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들이 묻혀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광부들은 삽으로 흙에 덮인 교실의 흙을 몇 날 며칠 동안 쉬지 않고 퍼냈지만 끝내 116명의 아이들과 28명의 성인들을 구해내지는 못하였습니다.
* 교실에서 흙을 퍼내고 있는 광부들(BBC 다큐 캡쳐)
총 144명(아이들 116명 포함)이 사망한 이 참사로 조그마한 탄광촌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으며 한 세대 전체가 사라지는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특히 10살 남짓한 116명의 아이들 부모들은 모두 가슴속에 자식을 묻고 남은 인생을 비탄 속에 보내야 했습니다.
*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의 매장 모습
* 참사를 추모하기 위해 언덕에 임시로 만들어진 십자가(BBC 다큐 캡쳐)
한마을의 아이들 거의 모두가 하루아침에 죽은 이 참사는 영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는데 영국 전역에서 9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성금을 보내왔고 금액은 무려 1,606,929 파운드에 이르렀습니다.
* Aberfan에 답지한 우편 성금 장면(BBC 다큐 캡쳐)
마을 위 자리 잡은 7개의 검은 산과 국가석탄위원회(National Coal Board: NCB)의 책임
이 끔찍한 참사는 사실 마을 위쪽에 자리 잡은 7개의 검은 산 중 7번째 봉우리가 이틀간 내린 비로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다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결과였습니다.
* 마을 위 검은 산들(BBC 다큐 캡쳐)
* 무너져 내린 7번째 봉우리 모습(BBC 다큐 캡쳐)
그런데 이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검은 산들은 원래부터 있던 산들이 아니었습니다.
1910년대 중반부터 지역 탄광이 개발되면서 석탄을 캐고 남은 부산물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는데 무려 50년간 이어지면서 7개의 인공 산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1946년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국의 석탄 산업은 모두 국영화되었는데 이를 관리하는 국영회사가 국가석탄위원회(NCB)였기에 Aberfan의 인공 산들도 NCB의 책임이었습니다.
NCB는 소위 '영리를 추구하는 자본가들의 탐욕'에서 벗어난 국영회사로서 광부와 그 가족들에게는 노조와 함께 생계를 결정짓는 상위조직이었습니다. 참사 직전 Aberfan 아이의 그림에도 NCB는 모든 것을 조직하는 최상위 기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물론 맨 위 "The End"라는 글귀가 참사를 예고하는 것 같아 섬찟합니다.
* 참사 직전 Aberfan 아이의 그림(BBC 다큐 캡쳐)
당시 NCB의 수장은 1961년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Alfred Roben이었습니다. 25살 되던 1935년부터 정력적인 노조활동가였던 로벤은 1945년 영국 노동당의 총선 압승 당시 탄광 지역 하원의원이 되면서 광산노조와 광부를 주요 지지층으로 두었습니다.
하지만 사건 당일 로벤의 행적은 두고두고 비난을 받았는데 참사를 보고받았음에도 그는 사건 현장을 찾지 않고 Aberfan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예정되었던 자신의 Surrey 대학 총장(Chancellor of the University of Surrey) 취임식(위원장과 총장의 겸임이 가능했던 듯?)에 참석하였습니다.
검은 산의 총책임자였던 로벤을 여기저기서 찾자 NCB 간부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댔는데 웨일스 지방장관에게는 심지어 그가 현재 구조활동을 지시하고 있는 중이라는 거짓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로벤이 사건 현장을 처음 찾은 것은 하루가 지난 토요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벤과 NCB가 욕을 먹은 것은 사건 당일의 행적 때문만은 아닙니다.
* 문제의 NCB 수장 Roben
로벤은 하루가 훨씬 지난 토요일 저녁에 참사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 TV 리포터가 참사에 대해 묻자 사건은 7번째 봉우리 밑의 숨겨져 있던 샘물이 원인이 된 자연재해로 NCB가 사전에 취할 조치는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조사에서 NCB는 이미 해당 샘물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 위치도 지도에 표시해 놓고 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사건 조사위원회(tribunal)가 구성되자 로벤은 마지막 날 마지못해 참석해서는 NCB의 일부 잘못을 겨우 인정했습니다.
사실 1966년 10월 21일 이전에도 여러 번 작은 규모로 검은 산의 산사태가 존재했으며 몇몇 엔지니어들이 상황의 위험성을 알았지만 공식적인 보고가 이루어지지는 못 했습니다.
무엇보다 수년 전부터 마을 주민들과 교장 선생님이 검은 산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민원을 냈음에도 NCB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0월 21일 참사로 민원을 냈던 마을 주민들 중 상당수가 자식을 잃었다고 합니다.
로벤과 NCB는 참사의 책임회피뿐만 아니라 사후 대책에서도 놀라운 반응을 보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사고의 재발 가능성 때문에 남아있는 검은 산들의 이전을 요구하자 비용 문제를 들이대며 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노동당 총리가 산의 이전을 약속하고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면서 남은 산들의 이전이 시작되었지만 로벤은 이마저도 반대하다가 이전 예산의 거의 10%에 해당하는 15만 파운드를 영국 전역에서 보내진 성금으로 충당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노동당 내부에서도 로벤의 사임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는 끝내 사임하지 않고 버텼으며 법적 공방에서도 책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노동당 수뇌부는 탄광노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로벤을 내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144명이 죽은 대참사였지만 어떤 이도 사법적으로 처벌받거나 심지어 자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특히 로벤은 그후로도 승승장구하며 정치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유지했습니다.
30년 후의 정부 보상 그리고 할아버지들의 애끓는 노래들
Aberfan 참사는 3년이 지난 1969년 탄광 주변의 학교 및 주민의 안전을 담보하도록 하는 "Mines and Quarries Act of 1969"를 제정하는 뒤늦은 안전 대책이 마련되지만 검은 산 이전에 강제로 사용된 성금 15만 파운드는 무려 31년이 지난 1997년 블레어 정권에 가서야 보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보상금 마저도 31년간의 인플레이션은 물론 이자도 계산되지 않은 15만 파운드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황당한 소송은 당시 담배 회사에 다니다기 야간 근무를 거부하며 해고된 Janice Evans가 제기한 것이었는데 에반스는 참사 당일 학교 근처에서 길을 걷다가 허리까지 파묻혔으며 함께 길을 걷던 친구는 사망하는 충격으로 야간 근무를 하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회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에반스 소송은 2005년에 가서야 회사가 배상금을 지급하며 법정 밖에서 해결되었습니다.
그나마 41년이 지난 2007년 웨일스 의회는 150만 파운드를 Aderfan 추념재단에 기부하기로 하고 50만 파운드는 Aderfan의 교육 자선사업에 사용하기로 하는 조치를 취하며 아픈 상처를 보듬으려고 하였습니다.
* 희생자들의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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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산들이 치워진 Aderfan의 현재 모습
한편 검은 산들의 이전을 위해 결성된 위원회 소속 위원들은 오랜 기간 참사로 잃은 자식에 대한 슬픔과 NCB의 황당한 처사에 지쳤음에도 이 참사의 교훈이 잊히지 않도록 남성 합창단을 결성하기로 합니다.
이제는 할아버지 합창단이 되어 버린 Ynysowen Male Choir는 지금도 영국과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있고 수익금으로 자선 사업을 하고 있답니다.
50년이 지난 이 참사에 대해 살펴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만 무엇보다도 합창을 하는 할아버지들의 마음속에 있는 못다 한 사랑을 안고 떠나간 아이들(살아있었다면 60이 되었을 나이지만)에 대한 그리움과 유사한 참사의 재발을 막으려는 의지가 절절히 전달되는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 Ynysowen Male Choir 할아버지들 연습 장면
* Ynysowen Male Choir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VqEJTwj-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