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은 아침 8시에 열고 밤 11시에 닫았다. 수험생 시절의 나는 그 시간에 맞춰 직장인처럼 꼬박꼬박 도서관으로 출퇴근을 했다. 공부하는 중간 중간, 자꾸 자리를 비우고 담배를 피며 멍 때리는 시간이 아까워 어느 순간 담배를 끊었다. 어느 날은 내방에 들어오는 인터넷 통신도 끊었다. 전화요금도 부담이 되어 휴대폰마저도 끊고 나니 안 그래도 단조롭던 인간관계도 저절로 정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요란스럽게 공부했다 싶지만 당시의 나는 그만큼 절박했다. 그런 내게 도서관은 마음의 쉼터이자 전쟁터였다. 밤 10시 반쯤 되면 늦게까지 공부하던 이들도 주섬주섬 짐을 쌌고, 도서관 마감을 안내하는 종이 울리는 10분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방을 싸들고 도서관을 나섰다. 하지만 나는 버릇처럼 맨 마지막 즈음에 도서관을 나서기 일쑤였다. 왠지 그래야 마음이 좀 놓이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한 듯 뿌듯했다.
어떤 날은 10시 45분쯤에 까무룩 잠이 들어버린 적도 있었다. 너무 피곤했는지 마감 종소리도 듣지 못했다. 공부하던 사람들은 모두 퇴실했고 열람실의 불은 꺼졌다. 갑자기 누군가 깨우는 소리에 책상에 파묻었던 고개를 황급히 들었다. 손전등을 든 경비 아저씨가 나를 비추고 있었다. 아저씨는 말했다. "학생, 집에 가서 자야지." 깜깜하게 불꺼진 열람실을 그때 처음으로 보았다. 도서관을 나서며 시계를 보니 12시가 가까웠다. 그날따라 까만 하늘에 달만 홀로 훤했다. 휴대폰이 없으니 어디 전화나 문자로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고.. 그렇게 달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가만히 빌었다. 합격도 좋지만.. 염치없이 합격만 바라기 전에, 합격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나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평소 11시가 넘는 시간에 동네 도서관을 나서 터덜터덜 걸어서 집에 도착하면 거실의 시계는 11시 30분을 가리켰다. 그시간쯤 되면 아버지는 안방에서 주무시고 엄마는 TV를 틀어놓고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조용히 들어와 씻고 부엌에서 간단하게 허기를 채우고 나선 가만히 엄마를 깨웠다. 그제서야 엄마는 졸린 눈을 비비며 안방으로 향했다. 그러고 나면 나는 텅 빈 소파에 앉아 TV 리모컨을 들었다. 흔해빠진 외화채널, 홈쇼핑 방송들, 해외축구 중계, 지나간 옛날 드라마들까지.. 케이블 채널은 자기들끼리 웅성웅성 떠들어댔지만 보고 싶은 채널은 하나도 없었다.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나는 무슨 주문에라도 걸린 인형처럼 TV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꾸역꾸역 늦은 밤까지 TV를 시청하곤 했다. 항상 그랬다. 졸더라도 TV를 보면서 졸았다. 그 당시 내겐 TV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유흥거리(?)였다.
사실 피곤하면 그냥 방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면 그만인데, 나는 왜 TV를 끄지 못했을까. 그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순간의 나는 무언가 보상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하루종일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 공부만 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 쳇바퀴 같은 수험생의 일상. 어디 말할 곳 없이 쓸쓸하고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던 하루하루. 그 시절의 내 삶이 그랬다. 공부하는 기계처럼 하루를 마감하는 게 괜시리 아깝고 억울해서, 축축 처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렇게 고집스럽게 TV 화면을 쳐다봤다. 당시엔 내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위안거리가, 그 정도밖엔 없었나보다. 이른바 '저녁이 없는 삶'에 대한 보상 심리이자 내 나름의 소박한 반항. 누군가를 향한 반항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나는 매일 밤 TV를 보며 내 삶에 반항했다.
사실 그러면서도 그게 나한테는 또 하나의 스트레스였다. 잠을 일찍 자야 다음날 좋은 컨디션으로 공부할 수 있는 수험생에게 늦잠은 나쁜 습관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 괜한 죄책감(?)에 휩싸여 TV를 보던 나는 한 번도 내게 괜찮다고 말해준 기억이 없다. 이왕 그럴 거, 하루라도 맘 편히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만약 내 주변 누군가가 그런 스트레스에 싸여 피곤한 하루를 꾸역꾸역 마감하고 있다면 그에겐 얘기해주고 싶다. 그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 내가 잘 안다고. 저녁이 없기에 오히려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한 채 헤매는 그 쓸쓸한 마음 말이다. 피로하기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그의 삶에 내가 저녁을 만들어주진 못하더라도, 그래도 이런 얘기는 해주고 싶다. TV를 좀 더 봐도 괜찮고, 컴퓨터를 좀 더 켜놔도 괜찮다고. 이 힘든 세상 속에서 우리들의 이런 모습은 지극히 정상이니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맘 편히 키보드를 두드리자는 얘기 정도는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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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합니다..
프로젝트 달릴때면 일주일 내내 출근하고 매일 새벽 1시 넘어서 퇴근하고 하는데, 그 시간에 미쳤다고 소주한잔 빨러갑니다.
그거먹고자면 아침 출근 늦어지고 몸버리고 하는걸 알면서도, 그냥 들어가면 내가 이래 살아 뭐하나 하는 자괴감이 너무 심해요...
거기서 더나가면 그렇게 고생해서 번 돈을 막쓰게 되죠.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