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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8/27 22:14:19
Name 스타슈터
Subject [일반] [8월] 모교, 그 변하지 않는 추억.


아시아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조호바루라는 말레이시아의 작은 도시에서, 아시아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중고교가 있다. 내가 다니던 그 학교는, 바다 앞이라서 방과시간만 되면 커플놀이를 하는 학생들이 바닷길 산책을 하곤 했다. 그게 뭐가 재미있나 싶지만, 진지하게 조호바루는 특색이 별로 없는 곳이다. 이곳이 뭐로 유명하냐면, 아이러니하게도 싱가폴에 가깝다는 것이 유명하다. 이건 마치 교실로 따지자면 "반장 옆자리 앉은 애"와 비슷한 수준의 인지도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정말 뭐라도 하면 그게 재밌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랑 바다로 나와서 돌 몇개 던지고 낄낄거리고, 옆에 패스트푸드점에 걸어가서 공부하는 그런 사소한 즐거움조차도 크게 다가왔다.

뭐 어쨌든 모교는 정말이지 나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준 곳이다. 첫사랑의 추억부터 시작해서, 여태껏 인생중에 수많은 첫경험들이 그곳에서 이루어졌고, 아직까지도 "고향"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기억에 남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인인데 고향을 떠올릴때 외국부터 생각나는게 참 신기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이 추억이 가득한 학교라는 장소는 나에게 있어서 각별한 곳이다.

학교라는 곳은 사실 막상 떠나고 나면 다시 갈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이기에 힘쓰는 편이라 일년에 두세번쯤은 모이고, 그 중 한번쯤은 모교에 들리곤 한다. 학생으로 만났던 우리가 교무실에 들러서 한결 세월의 흔적이 드리운 옛 은사분들을 찾아볼 때는 나도모를 격세지감이 든다. 그리고 더 격세지감이 드는건, 우리의 동창들 중 교무실에서 우리를 맞아주는 녀석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교로 돌아와서 교사가 되었고 나름 늠름한 선생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게 신기하게 느껴지곤 한다. 성격도 무른 녀석인데 학생들이 괴롭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아무튼 이렇게 매년마다 모교를 한번씩 방문하는데, 예전보다 점점 더 구석 한곳한곳에 수많은 추억들이 물들어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받았다. 친구들과 학교의 사소한 구석을 지나면서 예전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사건들, 그리고 심지어는 이불킥할만한 추억까지도 말하면서 걸으니 시간이 가는줄 몰랐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추억이 미묘하게 다르지만 그렇기에 더욱 그 대화가 즐거운것도 같았다.

그 구석들은 그대로인데, 내 자신은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그냥 평범한 의자, 책상들이, 내가 친구와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던 의자, 내가 친구들과 기말고사를 극복했던 책상들로 보였다. 그게 뭐 대단한 의미일까 싶지만, 돌아갈수 없는 추억일수록 더욱 생각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게 뭐라고 한번씩 생각나고, 그게 뭐라고 생각나면 피식 웃게된다. 우리는 이미 너무 그것들과 멀어져 버린 것에 대한 허탈함일까?

근데 그런 생각에 잠기던 와중에 친구 한명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너희들은 정말 하나도 안변했네"]

순간 굉장히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었다. 격세지감을 느끼던 도중 전부 안변했다고 하는 말을 들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진짜?"라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또 곰곰히 생각해보니 실제로 친구들은 다 그대로였다. 말 많은 애는 여전히 말이 많은 애였고, 진지한 애는 여전히 진지한 애였고, 다 그대로였다. 그리고 내 자신을 돌아봤다. 사실 나도 그대로였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아닌, 이 친구들 앞에서의 모습만큼은 그대로였다. 우리는 사실 변하지 않았다. 다만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늘 자신답지 않게 살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게 되고, 가끔 한번씩 이렇게 편하게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게 아니였을까.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학교도 참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없던 건물도 생기고, 예전보다 더 좋은 시설도 많이 생겼다. 근데 왜 난 이곳을 그대로라고 생각했을까? 아마 난 이미 그 장소를 기억하는게 아니라, 그 장소 근처에서의 추억들로 그곳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보이는 것은 결국 변하더라. 아무리 변치 않을것 같았던 장소들도 결국은 변하고, 사람의 모습도 결국 변한다. 하지만 변한다고 그게 나에게 가지는 의미가 딱히 달라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걸 느꼈다. 아무리 변해도 나의 모교는 늘 내가 뛰어다니던 추억이 깃든 그곳이고, 내 친구들은 여전히 그 말많은 녀석과 진지한 녀석을 포함한 특색 넘치는 녀석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년 방문하는 모교는 늘 새롭다. 계속 달라지지만, 그래도 나에게 의미는 같다는 점이 참 신기하면서도 새롭다.

좀 더 생각해보니, 이런 의미를 가진 것들이 모교와 동창들 뿐일까? 그 예로 우리 어머니도 참 변하지 않으신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변하지 않는다는건 참 멋진 표현인것 같다.

순간들이 박제되어, 우리 마음속에 변하지 않는 추억으로 남는다는 것이 그래서 아름다운게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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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7 22:58
수정 아이콘
이벤트 열 때마다 다른 컨셉으로 매번 좋은 글 올려주시네요. 감사합니다.
16/08/28 08:26
수정 아이콘
마지막에 순간이 박제된다는 표현이 와닿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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