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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6/08/22 15:00:20 |
Name |
깐딩 |
Subject |
[일반] 동물의 고백(3) |
"아, 카르마 따위로 탑을 가니까 트롤 소리를 듣지 어휴"
"아니에요! 카르마가 얼마나 좋은데요!"
"협곡 전체에 울려 퍼지는 너의 웅장한 트롤링이 내 고막까지 들리는구나!!"
"흥! 카르마 엄청 세거든요?! 선배는 뭐하시는데요?"
"데마시아의 힘! 가렌져!"
"으악! 진짜다! 진짜 트롤이 나타났다!"
여느 때와 같이 후배와 내가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말장난을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내 왼쪽에 앉아있는 경력 8년 선배가 나와 내 후배에게 물어왔다.
"OO씨랑 HH씨는 왜 안 사귀어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나와 후배는 그 선배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내 그 선배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옆에서 가만 보고 있으면 두 사람이 성향도 성격도 정말 잘 맞는데 왜 안 사귀는지를 모르겠어.
살면서 이렇게 잘 맞는 사람을 찾기 힘들거든. 그래서 내가 두 사람이 아까워서 물어본 거야."
선배의 말은 무서울 정도로 나의 생각과 일치했다.
하지만 나는 당장의 그 어색한 공기를 걷어내고자 농담 식으로 말을 받아쳤다.
"에이 선배,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잖아요. 허공에 휘두른다고 소리가 납니까?"
"어? 그럼 OO 씨는 마음이 있다는 거네?"
또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나는... 정말 멍청한 게 틀림없다.
그날 밤 나는 걸어서 15분 거리 밖에 되지 않는 퇴근길을 넋 놓고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30분이 돼도 반밖에 오지 못 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후배에게 카톡이 왔다.
-OO 선배! 저 8년 차 선배랑 카톡 했는데 엄청 웃기네요 크크-
-?? 왜? 무슨 일인데?-
-8년 차 선배가 저보고 OO 선배 괜찮지 않냐고 괜찮으면 사귀어보라고 자꾸 그래요-
나는 그 카톡을 보고 아무 말 도 하지 못 했다.
이내 후배가 카톡을 이어나갔다.
-저는 OO선배가 MM선배 좋아하는 걸 알고 있는데, 아예 모르는 사람이 이러니까 진짜 웃기네요 크크크-
?! 이게 무슨 하늘이 주신 기회인가?
나는 이때만큼 8년 차 선배가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아, 나 MM선배한테 아무 생각 없어. 생각 없어진지 꽤 됐는데 내가 말을 안 해줬구나-
-엥? 왜요??-
-남자친구도 있는 것 같고 나랑도 잘 안 맞아. 나중에 덕분에 살 빼게 됐다고 인사나 한번 하려고. 그래도 다이어트는 계속할 거야-
-크크크 좋아요 합격!-
-뭐가 합격인뎈-
-몰라옄크크-
나는 그 합격이란 단어를 보고 '설마...?'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고백할까 했지만 일단 머릿속에는
동물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사람으로 거듭나는 게 최우선 목표였기 때문에 다음으로 미뤘다.
평화로운 나날이 지나가고 어느새 4월 휴가가 다가왔다.
4월 23, 24일 주말을 포함하여 25, 26, 27 3일 휴가, 5일간 쉬는 긴 휴식기였다.
내 고향은 부산이기 때문에 27일에는 서울로 올라와야 했었다.
때마침 그날은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 가 개봉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그날 영화를 보려고 했다.
물론 혼자 가려고 했었다 후후.
부산에서 편하게 쉬고 있을 그 무렵 26일에 후배에게서 다급한 카톡이 도착했다.
-OO선배! 왜 항상 선배가 없을 때만 문제가 발생하고 같이 있으면 아무 일도 없죠?!-
-왜왜? 무슨 일인데, 먼데? 한숨 자고 일어났네-
-지금 DB 데이터가 안 맞아서 전화 오고 메일 오고 난리 났어요 엉엉. 하늘이 원망스러워요-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내가 처리하면 시간이 걸려도 처리가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의 후배가 하기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OO선배 내일 올라오세요?-
-어 내일까지 휴가인데?-
-내일 뭐 하시는데요?-
-시빌워 개봉해서 그거 보러 갈 거임-
-내일 회사 오셔서 저 좀 살려주시면 안돼요? 엉엉-
-영화 보러 갈 건데? 휴가 동안 나를 찾지 말라 그렇게 일렀거늘-
-혼자 가시는 거예요?-
-그래, 슬픈 대답하게 하지 마라-
-그거 저랑 다음에 같이 보러 가요. 제가 쏠게요!-
나는 이때까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주는 게 사실이었구나 싶었다.
나는 신나서 답장할까 하다가 약간의 뜸을 들여서 답장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뭐-
그렇게 나는 휴가 중 마지막 날을 반납하고 출근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후배가 마블 영화는 전혀 모르고 하나도 보지 않은 상태였디.
나처럼 DC, 마블영화게 관심이 많아 꼬박꼬박 챙겨보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후배야, 시빌 워 보려면 그 앞에 영화들 다 알아야 재밌어. 너 이거 봐도 내용 알지도 못해"
"뭐 뭐 봐야 되는데요? 보면 되죠!"
그렇게 후배와 나는 야근하면서 시빌 워 이전의 마블 영화들을 전부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신나게 마블 영화와 각 히어로들에 얽힌 이야기들 영화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을 떠벌렸다.
시간이 지나 시빌 워를 보러 가는 날이 되었고, 우리는 같이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고 다시 영화에 대해 떠들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이 계속될 줄만 알았다.
누가 만들었는지 '행복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참 병X같은 법칙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얼마 뒤 나는 내 인생에서 몇 번 없었던 큰 위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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