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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9/04 21: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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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책 추천) 투명인간/성석제


안녕하세요,

PGR에는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자게에서 몇번 책 추천글을 보았는데, 실제 그 책을 읽지 않더라도 내용이 좋더라구요. 제가 이번에 올리는 서평글은 다른 글에 비해 발췌문이 좀 많습니다. 그만큼 기억에 남는 명문이 많기도 했구요. 하지만 약간의 스포일러가 될수도 있겠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소설보다는 일본 소설을 좋아합니다. 일본 현대 소설은 재치있고 가볍게 읽을 만한 내용이 많은 반면, 한국 소설은 진지하면서 한(?)이 서려있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번 성석제의 소설은 중반을 넘어가며 눈을 떼기 힘들정도로 재미도 있고, 한국 사회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럼 바쁘신 분들을 위해 한줄 평으로 시작하겠습니다.

한줄 평 :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며 삶과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1. 다사다난한 삶을 마무리하며 내린 결론

[... 개체의 생물학적 연장인 핏줄에 집착하고 연연하는 것이 세계를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바꿔나갈 책무를 지닌 깨어 있는 인간으로서 온당한 태도인가.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영세불멸의 것으로 하려는 동물적인 욕망이며 봉건적인 세계관의 발로가 아닌가. 예전이라면 내 속내가 훤히 드러난 것을 부끄러워했겠지만 이제 나는 바로 그게 우리가 바꿔나가려 했던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반론할 것이다. ] - 162p

주인공 만수의 할아버지는 학생 때 고등교육을 받다가 결혼해서 산골 마을로 피신하고 평생을 지내게 됩니다. 산골에서 지낸만큼, 6.25 전쟁, 독재 등 한국역사의 피바람을 피할수는 있었지만 사랑하는 손자를 전쟁중에 잃게 되죠. 어린시절 학우들과 인간과 삶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전인류적인 관점에선 자기 종족만 보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살아보고 경험해보니 결국 가족을 돌보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2. 지독한 현실주의자, 하지만 연민의 대상

[세차든 회사 종업원이든 결국 씨스템 하부에 예속되는 종노릇을 하는 것이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경쟁해 위로 위로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세상을 호령하고 싶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 드는 비용을 대기위해 형이 세차를 하든 공장의 부속품이 되든 남의 뒤를 닦아주든 상관없었다. 형에게 타고난 노예근성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 형이 있다는 것 또한 나의 조건이다.] - 218p

가족들을 돌보는 것을 삶의 낙으로 생각하는 만수와는 달리 석수는 가족도 본인의 삶을 위한 일종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기초적인 구타에서 신경이 마른 실뿌리처럼 하얗게 타버리고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듯한 전기 고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의 폭력을 모두 겪어야 했다. 나중에는 내가 기억하는 게 뭔지, 그게 맞기나 하는지, 내가 누구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인간은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고문을 경험해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 뇌리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 불온한 가치관과 불순한 관념이 들어있는 머릿속의 신경세포를 속속들이 씻어내고 인간성 자체를 개조하는 과정을 겪어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 남에 의해 완전히 해체 되었다 다시 재조립된 자신을 받아들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 ]
-241p

지독한 고문을 받고 인간성의 상실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경험하게 되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한정된 자원이라는 생존조건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 누가의 몫을 내가 빼앗기 위해서는 배신, 속임수, 회유나 설득을 위한 정치기술을 사용하고 폭력이나 살인 같은 범죄조차 불사해야 한다. 그런 인간만이 적자로 생존할 수 있다. 우리의 피에는 그러한 적자의 유전자가 들어있다. . . . 가족,공동체,사회,국가,세대,세상이 망하든 말든 영원히 지속될 씨스템 속에 들어가 씨스템의 일원이 될 것이다. 법과 권력, 자본이 그런 것이면 거기에 들어가겠다. 계급과 이념을 가리지 않고 내게 유리한 것, 나의 평안과 힘과 항상성을 지켜주는 편을 택하겠다. 카오스의 법칙, 엔트로피의 법칙이 그런 것이라면 나는 물리법칙이 되겠다. 씨스템을 훼손하려는 불순한 세력, 끊임없이 준동하는 벌레와 바이러스는 나의 적이다. 그것이 가족이라 하더라도.
  나는 오로지 내 길을 갈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내 편일 것이다. 세상이 모두 망한다 해도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혼자만이라도 끝까지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음으로써 이기리라.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한 쓰레기들에 대한 복수일 것이다.]
-244p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적자의 삶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그 누가 피해를 보든 자신이 유리한 선택을 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싸이코패스로 살아가겠다는 것이죠. 하긴 누구든 이렇게 지독한 고문을 받게 되면 시스템과 권력에 저항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3.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는 조건 : 자립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은 이게 아니었다, 기사식당 바깥주인으로 경광봉 들고 형광조끼 입은 채 주차 정리나 하면서 인생을 보내려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누구는? 내 인생의 목표는 어디 가서 찾나? 주방의 가스레인지 불꽃 속에서? 끓고 있는 돼지뼈 국물 속에서? 뭘 하나 희생하지 않고 제멋대로, 편한 대로 살려고 하는 이기주의자였다. ] -319p

남편을 대신하여 치열하게 바깥 살림을 유지해가고 있는 아내의 말입니다. 물론 인생에 있어서 꿈과 의미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원치않는 희생을 강요해선 안되겠지요. 그런 면에서 일단 현실에 부딪혀서 열심히 돈을 벌어보는 것도 꿈을 위해 다가가는 방법 중 하나라고 봅니다.


4. 결국 다시 인간의 삶으로 돌아가서

[아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사는 게 훨씬 쉽다. 나는 한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아직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지지하고 지켜줘야 한다. 내가 포기하는 건 가족까지 포기하는 것이다... 지금같은 순간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기쁨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며 차오른다. 모든 것을 함게 나누는 느낌, 개인의 벽을 넘어 존재가 뒤섞이고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진짜다.] -365p

작가는 주인공 만수의 삶을 통해 한국 역사의 각종 사건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6.25, 월남전, 공장노동, 독재, 고문...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 보다 더 치열하고 전쟁같은 하루하루 견디는 삶 자체를 말이죠. 만수에게 강인한 체력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부여하여 이 모든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어쩌면 매일매일 고통의 연속이었을 삶을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만수는 '사랑하는 가족' 이라고 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우리 사회에서, 만수는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훨씬 쉬웠다고 말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가족이라는 것을, 만수와 그의 할아버지가 세대를 넘어서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점점 가족이 해체되고, 1인가구가 늘어나며,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는 우리나라를 생각해봅니다. 물론 변화하는 경제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잃게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의 젊은이들의 삶과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과의 삶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한번 더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윗 세대들과의 공감, 교류를 위해서라도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물론 학교 다니며 근현대사는 다들 배우셨겠지만, 바쁜 현실 속에서 과거의 역사는 잊고 살기 쉬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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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사랑
15/09/04 22:06
수정 아이콘
이 책 강력히 강력히 추천합니다. 꼭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인트
15/09/05 11:28
수정 아이콘
세상에 내가 이분과 같은 의견을 낼 줄이야...
아무튼 그럼에도 이 책은 정말 좋습니다. 읽고나면 뭔가 좀 걸리는게 남습니다.
사티레브
15/09/04 22:17
수정 아이콘
천지지간 만물지중 인간이 가장 귀한 이유가 뭔지 아느냐?염치를 알기 때문이다. 염치는 제 것과 남의 것을 분별하는 데서 생긴다.염치,이 두 글자를 평생의 문자로 숭상하여라. 그러면 너는 어디를 가든 사람답게 살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 받으리라.천분을 넘어서는 것을 욕심내지 마라.욕심이 과하면 탐심이 생긴다. 탐심은 남의 것을 훔치게 만든다.도둑질은 절대로,절대로,절대로 하면 안된다. 필요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으면 내가 가진 것과 바꾸어라.돌려줄 것을 약속하고 빌려라. 먼저 말을 하고 구하면 얻으리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훔치는 건 안된다.훔치지 마라.훔치고 나면 너는 네 것을 모두 도둑맞게 된다. 네 삶을 도둑맞는다.그러면 너에게 무엇이 남겠느냐.
15/09/05 17:08
수정 아이콘
이거 소설 속에 있는 내용인것 같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티레브
15/09/05 17:09
수정 아이콘
네 제가 이 책 읽고 따놓은 글귀라 옮겨봤어요
WeakandPowerless
15/09/04 22:28
수정 아이콘
요약하신 내용을 보면, 누군가의 말마따나 우리 사회의 고정불변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주 기본적인 안위만을 기준으로 생각하며 현 여당에 투표하는 그들'을 잘 묘사했다는 느낌을 받네요. (그리 잘 쓴 글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분석한 한 블로그의 글에서 인용해봤습니다)

어찌보면 그들이 연민의 대상이긴 해도, 어쨌든 굴곡을 통해 '인간성을 잃어버린 것'을 긍정하는 방향이 되어서는 곤란할텐데 참 안타까운 내용이겠네요... 과연 그런 것을 표현한 것일지,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추천 감사합니다
15/09/05 17:10
수정 아이콘
예 사실 읽어보면 작가는 오히려 경제성장의 그늘 속에 소외된 사람에 주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벤더
15/09/04 22:41
수정 아이콘
어쩌다보니 계속 미루고 있는데, 곧 읽어봐야겠어요.
두괴즐
15/09/04 22:47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마무리가 좀 아쉽긴 했는데, 전체적으로 좋았습니다. 저도 추천해드리고 싶은 소설입니다.
15/09/05 17:13
수정 아이콘
토론할때도 마무리가 아쉽다는 분이 있었어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나는 느낌이죠
두괴즐
15/09/04 22:48
수정 아이콘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투명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건, 해도해도 너무하다. 그의 가족이 따뜻했던 만큼, 더 아프게 온다. 염치를 몰랐던 우리의 근현대사 속에서 염치를 지키고자 애쓴 한 남자의 고군분투"

★★★★ (8.6)

-> 독서모임에서 이 소설을 다루고 제가 남긴 평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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