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일-이태리 3국 합작애니였던 몬타나존스 이후 오랫만에 한-일-유럽국 합작애니 레이디버그가 방영되었습니다. 한국 3d 애니메이션은 찰흙인형같은 일종의 무광택 질감의 모델링이 주류인데 레이디버그는 반짝반짝합니다. 포스터에 디즈니 로고가 슥 박혀있는데 딱 그 스타일입니다. 그리고 지금껏 나온 3d 캐릭터들 중에서도 손꼽게 이쁘고 섹시하게 잘 뽑았습니다. 변신 후 포즈를 취한 장면을 보아하니 실제 회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덕후들 뽑아 먹겠다는 게 느껴지는 듯 합니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그동안 걸었던 철저한 아동용 애니메이션은 분명 아니고 어느 정도 아동과 그 윗세대를 노린 듯 합니다. 스토리의 구성도 그렇고 한국에서 초창기 미국애니 오타쿠 양성을 일임했던 킴 파서블이나 대니 팬텀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서양쪽인데 캐릭터에서 동양 애니메이션의 향취가 짙습니다.
각설하고, 오랫만에 만화주제가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사실 이런 올드스쿨 주제가 듣기가 요새 쉽지 않아서 말이죠.
사실 만화주제가 가사는 어느 나라에서나 유치합니다. 저같이 영어 못하는 사람도 밑에 올린 영어판 주제가를 들어보면 가사가 대충 각이 나오죠. 나는 평범한 여자지만 악의 무리가 등장하면 나의 힘이 정의를 위해 날뛴다는 30년전 만화주제가 가사가 아직도 쓰이는 게 이 바닥입니다. 특히 TV판이 이런 경우가 강한데 극장판의 경우 디즈니가 '극장판 애니메이션 주제가'라는 존재의 무게감을 어마어마하게 끌어올린 통에 전세계에서 기가 막힌 가사와 사운드 만들겠다고 오만 투자를 다 합니다만 TV판은 아니죠. 그럼에도 이런 주제가가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그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확실한 음악적 장치라는 위치에 기반합니다. 그리고 가사가 유치할지언정 그 유치함을 비벼버리기 위해 갖은 장치를 동원하여 생명력있는 음악으로 남기죠.
- 킴 파서블이 2002년 방영이니 13년 전입니다. 이때나 지금이나 만화주제가 가사라는 놈은 변화를 거부하는 기묘한 특징이 있습니다. -
저는 번안 주제가에 대한 저항력이 남들에 비해 꽤 높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번역이라는 게 결코 만만한 게 아니란 걸 아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거기서 유치한 게 한국에서 상큼할 리는 없죠. 한국의 번안 주제가의 문제는 기존 버전의 가사의 유치함만 유지하는 게 아니라 사운드 퀄리티나 곡의 구성에도 흑마법을 걸어버린다는 겁니다.
레이디버그 한국판 주제가는 영어판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문학적 센스도 갖추지 못하고 벡터맨에서나 들었던 어둠속의 악의 무리가 오랫만에 부활했습니다. 이런 노래에서 유치함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로 만화주제가가 흔히 선택하는 것이 바로 가사를 충분한 양으로 늘려서 비트 안에 빠르게 녹여버리는 건데 한국판은 철저하게 박자를 따라 시조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물론 이건 영어권이 가지는 언어적 강점이 작용한 결과입니다만.
그리고 영어판이 채용한 또 하나의 장치인 남성과의 듀엣도 삭제하고 피에스타 보컬로 일관한 것도 아쉽습니다. 한국판 제목이 레이디버그이긴 합니다만 제작과정이나 원제나 스토리구성이나 뭐로 보아도 남자 주인공의 역할이 상당한 작품이며, 원판 주제가 역시 1절은 여주, 2절은 남주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주제가로 확실히 보여줍니다. 그런데 한국판은 이런 구성을 없애고 전형적인 변신 마법소녀 주제가를 채택하여 그렇지 않아도 없던 주제가의 힘이 2절에서 더 떨어집니다. 보컬이나 사운드는 훌륭한데, 한국노래이니 가사가 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보니 어쩔 수 없네요.
한국 애니메이션의 문제가 기술력이 아닌 컨텐츠라는 것은 한국 애니메이션이 태동하면서부터 지적되었던 문제였습니다. 만화주제가가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일본의 타이업 문화 성행 이후 계속 논란이 되어왔습니다만, 우리가 유치하다는 올드스쿨 주제가들이 아직도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레이디버그는 근래 한국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중 어디서 뭐하는 지 모르는 고스트 어쩌구랑은 다르게 아동용을 탈피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수작입니다.
기왕 잘 만든 거, 더 잘 만들었으면 좋았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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