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잔을 놓자 마자~”
쿵.
문을 닫으니 바깥에서 들리던 소리가 줄어들었다. 나는 볼을 만지면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멀쩡했으나 괜히 열이 올라오는 것 같다. 술기운 탓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업 시키는 이 분위기 때문일까?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에 묻은 왁스를 다시 씻어냈다.
오늘은 신입생 OT 첫 날 뒷풀이 자리였다. 학과 교실에서 진행된 OT와 간단한 자기소개가 끝나고 술집으로 들어와 이제 좀 더 본격적으로 노는 ‘판’이 펼쳐진 것이다. 테이블마다 선배와 신입생들이 어울려 다섯이면 다섯 일곱이면 일곱 모였다. 대화가 시들해지면 술게임이 벌어지고, 술이 좀 들어갔다 싶으면 대화가 시작되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분위기에 나는 잠시 ‘타임’을 외치는 심정으로 화장실로 온 것이다.
다시 문을 여니 바깥에 온갖 소리들이 들어왔다. 술자리는 제법 무르익었다. 처음 앉았던 배치는 거의 의미가 없어졌다. 신입생들은 비교적 처음 테이블을 지키는 편이었다. 하지만 선배들은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후배들의 인상을 파악하거나, 분위기가 죽은 테이블을 다시 띄우려고 했다. 신입생들도 외향적이거나 끼가 있는 친구들은 한 자리에서 가만히 있지 못했다. 다른 테이블로 가서 선배들에게 인사를 드리기도 하고, 자기 테이블에서 동기들과 힘을 합하며 선배를 술게임으로 골탕먹이기도 했다. 후배들이 센 힘을 보이는 자리에는 다시 임원급의 선배가 와서 기싸움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 흐름을 보면서 나는 재미있고 또 피곤했다.
잠시 주변을 살핀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한 여자가 동기가 맥주잔을 들다가 나를 발견했다. 그대로 소주병을 들어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엉겁결에 소주잔을 들었다. 테이블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다.
“K야. 어딜 도망쳤다가 온거야?”
딱 봐도 선배들이 다음 학년 회장감으로 찍었을 것 같은 여자애였다. 술도 피하지 않고 분위기를 만들 줄 알며 무엇보다 예쁘다.
“복귀샷~ 복귀샷~”
“동기가 동기를 사랑하는 만큼~”
살짝 얼굴이 붉어진 남자애가 손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얘는 이대로 술을 그만 마시게 하지 않으면 흑역사 확정인데. 그렇지만 일단 내 코가 석자다. 소주잔에 가득 채워진 술을 독하게 넘겼다.
아주 살짝 실눈으로 내 옆옆자리에 앉은 동기 J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다. 아직 어디로 가지 않았구나.
아직 어깨를 넘지 않는 머리, 고등학생 같은 느낌이 있다. 어떻게 보면 소년 같은 느낌도 있었다. 말하는 방식에도 어딘가 묘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더 내 마음을 뛰게 했다. 원래 어딘가 부족하고 비어있는 부분이 있는 여자가 나를 찾는 법이니까.
술게임이 몇 바퀴나 더 돌았을까? 소주병과 맥주병이 두 배는 더 늘었을 거다. 차기 회장 낙점(내 예상) 여자애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선배들과 다른 테이블을 공략하러 갔다. 한참 전에 얼굴이 빨갛던 친구는 결국 화장실로 달려갔고 선배 몇과 동기 몇이 붙어있다. 테이블에는 나와 옆옆자리 그녀(J)가 깨어 있었고 두 명 정도 더 있었는데 의자에 앉아 골아 떨어져 있었다.
나와 동기는 어느덧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는 어디 살다가 왔어?”
사소한 그녀의 그런 말이 반가웠다. 괜히 더 허리가 펴지고 얼굴에 드러난다.
“나는 청주에서 올라왔어.”
“충주?”
“아니, 청주. 충청도의 청이 청주잖아.”
“아~ 그거 알지 한국지리 때.”
“아무튼 지금은 별 볼게 없는 도시야.”
“지금은 자취하겠네?”
“응. 학교 서문 근처에....... 심심하면 놀러와도 돼.”
내가 말을 뱉고도 되도않는 드립이라 느꼈지만 그녀는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나는 괜히 얼굴이 뜨거워진 것 같아서 귀를 살짝 만졌다.
“너는 어디 살아.”
“서울. 강남역 근처에서 사는데.”
“오, 금수저.”
“그런거 아냐.”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들도 왠지 재미있었다. 나중에 카페에라도 갈래? 근처에 괜찮은 데가 있다는데. 그런 말을 꺼내면서 전화번호도 교환했다. 카톡 이모티콘도 큰 거 하나 날려줬고 그녀도 우스꽝스러운 이모티콘으로 응답했다. 서로 전화를 보다가 얼굴을 보며 실없이 웃었다.
그러다가 다시 대화가 시들해지는 시점이 왔다. 나는 괜히 마음에 불안이 피어올랐지만 괜히 억지로 말을 붙이려다가 더 어색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생겼다? 묘한 침묵이 2분 좀 넘게 이어졌나? 멍 때리듯 있던 그녀가 문득 일어났다. 나는 곁눈질로 태연한 척 그녀를 바라보았다. 뒷문 앞에 있던 그녀는 나에게 손짓했다. 입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따라와.’
뭐지?
뒷문으로 그녀가 먼저 나가고 약간 텀을 두고 내가 빠져나왔다. 괜히 찔려서이기도 했고 뭔지 알 수 없는 느낌이 있었다. 뒷문으로 나오니 완전 해가 진 걸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담벽과 건물벽 사이로 좁고 임시로 달아놓은 등이 비치는 곳이 있었는데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밖에 나와서 그녀가 멈춘 곳은 적당히 구석진 곳이었다. 왠지 싫은 향이 나서 땅을 바라보니 담배 몇 개비가 땅에 널렸고, 종이컵으로 만든 임시 재떨이에는 담배가 수북했다. 그녀는 말없이 가방을 뒤적였다. 나는 그저 황망했다.
가방을 뒤적이다가 꺼낸 건 담배 하나와 라이터 하나였다. 담배곽은 검은색이었고 라이터에는 장미 꽃이 예쁘게 그려져 그냥 장신구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것들을 보고 나서야 나는 그녀가 나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보고 여전히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그녀는 그제서야 나를 돌아보았다.
“따라와 줘서 고마워.”
“말 진짜 빠르게 하는구나?”
“미안 미안.”
살짝 내 눈치를 보다가 다시 말한다.
“너는 알지 모르지만 여자 혼자서 담배피러 나가고 막 그러면 보는 눈이 곱진 않아.”
문제는 그게 더 기가 막히는 말이라는 거다.
“그래서 나랑 나왔다고?”
“그러면 썸이라도 타는 줄 알겠지.”
나는 순간 되게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든다.
“일단 한 대 필게?”
허락을 받는 건지 그냥 통보를 하는 건지. 한 손에 쥔 라이터를 들며 나를 쳐다본다. 내가 침묵하는 동안 그녀도 침묵한다. 그녀의 얼굴이 내 눈에 담긴다.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땡큐 땡큐.”
칙, 칙. 담배 끝이 불씨가 스며 붉게 물든다. 그녀의 볼이 홀쭉해진다. 예쁘지는 않지만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흘러나온다.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과 마주친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야, 그런데 한숨 쉬면 빨리 늙는다.”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지만 그녀는 마이페이스였다. 마치 비가 흘러가는 걸 하염없이 보는 그런 마음으로 담배피는 그녀를 보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몽롱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한 대 필래?”
왜 망설임도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을까? 나는 담배를 받아 머금고는 들이켰다가 다시 뱉었다.
받아 핀 담배에서는 검은 향이 났다. 곧 독한 느낌이 가득 찼다.
왠지 지고 싶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은 듯 천천히 숨을 뱉었다. 너 담배 펴 본 적 없구나? 왜인지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나를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