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외가댁에서 보내게 되었다. 나랑 네살 터울의 여동생을 이미
환갑이 훌쩍 넘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참 오지게 말도 안들을 시기의 꼬꼬마들을 보살펴
주는게 얼마나 고되고 지난한 일인지 지금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지만 두 분다 너그러움과
자상함의 현신처럼 그저 손자 손녀가 이리저리 놀고 다치고 사고치는걸 그저 웃음으로 감싸주실 뿐이었다.
낮에는 논일, 밤에는 베짜기에 덤으로 철없는 손자 손녀 돌보시랴. 하루 하루가 고단하셨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노래는 삶의 활력소였다. 할머니는 어디서 얻어 듣고서 우물 우물 부르는
나의 '칠갑산'과 '소양강 처녀'에 참 많은 흥을 내시며 즐거워 하셨고 할아버지는 막걸리 한사발에
자동으로 뽑으시는 노래 가락 두 개에 절로 흥을 내셨다.
할아버지가 부르는 노래는 많지도 않았고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하나는 '진도 아리랑' 다른 하나는
가사없이 그저'허~이헤. 에허~허. '허이야~'로 시작 되고 끝이 나는 노래 가락 하나. 이 둘이 그 시기에 내가 들은
노래의 전부였다. 아리랑이야 워낙에 신명나게 부르기도 하셨고 할머니도 종종 따라 부를 정도로 호불호 없는
노래였지만 가사없이 부르는 후자의 노래는 정해진 가사도 없이 뭔가 모를 애잔함과 우울함이 전해지는 노래라
분위기가 가라 앉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할머니는 그 노래를 참 꾸준히 싫어 하셨다.
"이 영감 또 그 노래네.. 그만혀. 손주 앞에서 징허지도 않어? 그만혀어."
"아, 이 노래가 어때서. 복동아 할애비 노래가 그리 징허냐?"
그리곤 답할 시간도 안주시고 턱수염으로 내 얼굴을 부비 부비하면서 상황은 마무리...
사실 할아버지에게 막걸리와 노래는 삶의 거의 유일한 유흥이었다. 일요일이 되면
할머니는 걸어서 30분 거리의 주일 교회 다니시며 신자들과 또는 읍내에서 아는 어르신들과의
대화를 나누시거나 집에 있는 라디오 주파수 맞추어가면서 듣는... 종류가 다양한 유흥이라도
있으셨지만 할아버지는 한 쪽 다리가 불편하셔서 오래 걷고 멀리 나가는걸 힘들어 하셔서
쉬는 날, 쉬는 시간에도 외지에 나가기 보다 혼자있는 시간이 많으셨다. 그럼에도 원체 부지런하셔서
혼자 소 외양간 살펴보고 달구지 정비하고 간간히 마당 감나무 가지치기 등등 갖은 잡일을 마치고
피로함에 오수라도 편히 취할까 마시는 막걸리와 노래 두 가락이 할아버지의 유흥의 전부였던 거였다.
어느 날이었나... 땅거미가 질 즈음 소 달구지를 끌고서 절뚝이며 평소보다 더
무거운 발걸음으로 힘겨이 들어오시는 할아버지를 보고 무슨 생각에서 꺼낸 말인지
"할아버지 다리 안 아파? 할아버지 내가 약 바르고 호~ 해줄까?"
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갑자기 나를 부둥켜 안고서 울먹이며
"복동이는 이 할애비처럼 어디 아프거나 아야하면 안돼... 알겄지?"
라며 흐느끼시는데 그에 나는 나대로 뭔가 잘못한 것 같아 같이 울고 말았는데
그 순간이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할아버지의 흐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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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준비하며 확인한 3통의 부재 중 전화. 나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성향상 일과 중에 전화를 하는
일은 거의 왠만해서는 없었고 할 말은 집에서 하기에 3통이나 온 부재중 전화가 왠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예외가 없지는 않았다.십년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가 거의 유이한 예외였었던..
"엄마 무슨 일이야? 세번이나 전화를 걸고."
"영석아. 큰 삼촌에게서 전화랑 문자가 왔는데 전화는 못받고 문자로
뭔가 상의할 일이 생겼다고 그러네 니가 가서 뭔 일인가 알아보고 와라."
엄마가 수술을 받은 직후라 몸을 추스려야 할 상황인지라 알겠다며 바로 큰 삼촌 댁으로 향하였다.
몇 시간 뒤 올라오는 길 내내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한 두번 쓰고만 가방 속 일회용 휴지를
거진 다 쓸 즈음에야 나의 울음은 겨우 그칠 수 있었다. 실로 억장이 무너진다는게 어떤 느낌인지
다시 오랜만에 느끼게 된... 너무나 슬프고 또 슬픈 시간이었다.
광주시에서 연락이 왔다 한다. OOO님의 자제 분이 맞으시냐는 물음과 함께
OOO님이 일본 후쿠오카의 어느 탄광에 강제 징용된 사실이 확인 되어
위로금 지급 문의차 연락을 드리게 되었다면서...
큰 외삼촌이 우연찮게 지난 성묘에서 외가 먼 친척들에게서 외할아버지가 한동안
일본에 끌려 갔었다는 말을 듣고 사실 확인을 위해 '일제 강제 동원 피해 조사 위원회'에
문의를 하게 되었고 심사 결과 일본 후쿠오카 어느 탄광에 징용된 사실이 밝혀져서 오게 된 그런 연락이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땅 한 마지기 만이라도 내 이름으로 만드는 걸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며 논밭 일구는 것만 생각하며 20살에 18살 할머니를 만나 가정을 꾸린지 채 2년도 안되어
바다 건너서 후쿠오카라는 저 먼 곳으로 징용을 당해 탄광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하실 줄 차마 생각조차 하셨을까?
그런 생지옥에서 어떻게든 견디고 살아남기 위해 부른 노래가 할아버지가 부른 그 가사없는 노래라는 걸 늦게서야
알게되니 내 마음이 온전히 내 마음 같지가 않았다.
백년 가약을 맺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못하고 끌려간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논밭 메랴. 베틀짜기로 혼자 집안 생계를 꾸려갔고 돌아온 할아버지의 아픔을 함께 나누듯
조금이라도 시간 날 때마다 할아버지의 불편한 한 쪽 다리를 연신 주무르던 할머니는 또 얼마나
몸과 마음이 힘겨우셨을까...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이런 저런 상황을 말해주자 엄마 또한 대성통곡하며 한참을 우실 뿐이었다.
할아버지의 그 참혹한 경험은 할아버지의 한쪽 다리를 온전치 못하게 하였고 끝내
그 과거의 후유증은 과거에서만 맴돌지 않고 할아버지를 붙잡고서 지붕 기왓장을 바꾸다
불의의 낙상 사고로 돌아가시는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는 사실과 내가 어릴적
할아버지를 흐느끼게한 그 질문이 다시 생각나며 원통함과 서글픔이 주체되지 않아 나 또한 다시 울고 말았다.
하루 감자 한 알, 주먹밥 한 개. 물 한 통 마저 온전히 나온 날을 손에 꼽는게 어렵지 않으며
그마저도 일왕의 은총으로 여기며 굽어 절하면서 감사히 받아 먹어야 하는...
천하의 통뼈, 강골이라도 일본인 작업 반장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아무 이유없이 매와 채찍으로 타작 당해
산송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매장하여 실종 혹은 도망자 처리 되고 일하다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 누군가 죽는다는
사실에 무감각해지고 생존자중 부상을 안당한 사람이 당한 사람보다 적다고 말씀하시는 몇 해 전 광복절 특집 다큐에
나온 강제 징용 생존자의 그 참혹한 상황을 할아버지가 고스란히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니 가슴에 저절로 응어리가 질 수 밖에 없었다.
광복 70주년, 승전 70주년, 패전 70주년, 어디에 있고 어디에 속하는지에 따라 각자가 말하는 의미와 성격은 달라지는
그런 사건이 70년 전에 일어 났었고 그 시대 있었던 일들은 단지 과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내 동생은 할아버지의
소식을 들은 이후 시간이 되는대로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집회를 참석하고 있다. 예전 머나먼 나와 내 주변에는 별로 관계 없다
여겼던 사실이 자기에게 전혀 무관계하지 않고 머나먼 일들이 아님을 느껴서 일까. 설령 무관계한 일인들, 먼 예전 이야기인들,
한 두 다리만 건너 그 누군가에게 또 그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아픈 기억일 수도 있음을 알아서 일까 그 녀석...
옆 나라의 정상은 참상의 표현을 과거형으로 이미 지나간 일로 고여서 머물기 바라며 다음 세대에게 사죄의 숙명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흐르는 시간이 가져올 망각의 효과를 바라며 함께 사라질 감정적 느낌도 고려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기 전 내 후손에게 너희 증조 할아버지와 혹은 고조 할아버지는 일제 시대에 참혹한 일을 겪으셨다고 말하고 가면
그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도 거의 왠만해서는 '아..그러하셨구나...'라고 생각만 할 뿐 지금의 나처럼 가슴에
응어리가 지는 느낌의 감응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할아버지가 부르던 노래를 내가 죽어라 부른다고 해도...
불과 몇 년전까지도 나의 일이 아니었다. 그저 역사적 사실이었을 뿐... 인간으로써 아직 미성숙해서 그러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바로 나의 일이고 멀지 않은 이웃들의 일이다. 한 세기 전의 이 땅에서 살던 나의 가족과 이웃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이 백여년 세월의 흐름에 무덤덤해 지기에는 할아버지가 부르던 노래와 흐느끼던 울음의 기억이 너무나 아프고 또 아프다.
PS. 무겁기 그지없는 자게에 두번째로 쓴 글 같은데 중구난방에 주제 의식이 뭔지도 불명확하고 참 난잡한 글이지만 오늘이 광복절이고
또 할아버지 묘소도 다녀오고 그러니 가슴이 아려와 어떻게든 풀고 싶어 쓰게 되었습니다. 많이 부족한 글 모쪼록 너그러이 봐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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