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은 유선 시대 촉나라의 절대 권력의 2인자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별볼일없던 유비 집단에 제갈량 일족이 의탁한 이후 유비 집단은 점점 집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 원인이다. 그것의 이유로는 제갈량의 탁월한 전략(당시엔 요원했지만 집단으로서 방향성을 갖춘다는 것은 장대한 목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세력 구성에 있어서 목표 뿐 아니라 실력도 필요로 한다)과 집단을 유지하고 운영을 가능케한 사족의 협력과 응집이 있었기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제갈량의 유비 집단 합류는 그 융중대책의 전략보다 사족의 지지 및 응집이 훨씬 더 큰 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전의 유비 집단은 전투 능력은 갖췄으되 세력을 일구기엔 명분과 사족/호족의 지지 등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유씨라는 상징성은 유표와 유장이 멸망했을때는 상징성으로 크게 작용할 수 있었으나 유씨 군벌이 건재했을때는 유비의 혈통으로선 어림없었다. 그는 후한의 직계도 아닌 단지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의 아들 120여명의 후손중 하나일 뿐이었다. 더구나 그의 출신도 비록 조부와 부친이 관직에 있었다하나 그 자신은 돗자리와 신발을 엮어 생업을 유지했던만큼 사족으로부턴 충분한 무시와 경멸을 받을만한 위치였다. 그런 배경이었던만큼 사족들의 호응과 지원을 이끌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몇번이나 자신의 집단이 붕괴됐음에도 재결성하고 살아남아 나중에는 조조에 대항하였는데 안티 조조의 기치를 내걸었을때는 이미 상당한 유씨들이 몰락하였고 아직 후한의 부활을 꿈꾸는 사족들은 많이 있어 그들로부터의 호응을 얻게된건 아닌가 생각한다.
정리하면 유비와 제갈량의 결합은 유씨의 군사능력과 후한의 부활을 꿈꾸는(자신들이 권력을 잡길 원하는) 사족들과의 결합으로 볼 수 있겠다. 형주의 호강들은 이미 유표에 의해 등용되고 조조 정권에 흡수되었고 유표와 손씨는 적대하고 있어서 어쩌면 사실상 신진사족들의 선택은 유비 외에는 적절한 선택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유비와 제갈량이 결합한 이후, 제갈량은 갓 임관한 사람으로선 상당한 권력을 부여받고 활동하게 된다. 갈길없던 유비 집단에 청사진을 제시하고 오나라로 건너가 외교활동을 훌륭히 이뤄 동맹을 성사시켜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맞아 대파시키게되는 초석을 만들었다. 유비 집단이 형남4군을 얻자 제갈량은 군사중랑장이 되어 장사군, 영릉군, 계양군 3군의 부세를 감독하여 유비의 군사활동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유비가 입촉하여 낙성 공략에 부진하자 제갈량은 장비와 조운을 이끌고 익주의 각 군현을 공략하여 유장의 팔다리를 자르기에 이른다. 이전의 유비는 외로운 형세로서 주변의 인심을 얻고 유장의 수도를 점령하는 목표를 세웠으나 유장 정권의 상당한 반발로 참모인 방통마저 사망하는등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다. 제갈량의 익주 공략은 유비가 익주 성도로의 진공을 시작할때 유비의 연락을 받아 장비, 조운 등을 이끌고 익주의 평정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말해 유비는 유장 정권의 중심부를 타격하고 형주 본군은 익주의 군현이 유장을 지원할 수 없도록 각개격파한 것이다.
유비가 제위에 오른 후엔 승상 녹상서사 가절이 되고 장비가 죽은 후엔 사례교위까지 겸임했으며 유비가 임종에 이르렀을땐 탁고대신이 된다. 그리고 유선이 제위에 오르자 익주목까지 겸임하고 개부치사하여 부서를 열고 자신의 부서에 사람을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까지 갖게되는데 사실상 이때 정권을 장악했다. 유비는 제갈량을 탁고대신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이엄 또한 탁고대신이 되는데 이는 아무래도 제갈량을 견제하는 인사로 보여진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유선의 자질이 부족하면 그대가 대신하라'라고 했는데 이는 제갈량을 견제함과 동시에 신뢰를 주는 엄청난 말이었다. 더불어 유선에게도 '승상을 아비로 섬기고 모든일을 같이하라'라는 조칙도 남겼다. 사실 유비가 제갈량에게 유선의 자리를 대신하라고 했을지라도 현실적으로 유씨 천하였던만큼 그 자리를 취하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유비는 조씨를 멸하는 대의명분을 거스르고 오나라로 진공한만큼 촉나라의 대의명분은 어느정도 금이 간 상태였다.
제갈량은 모든 권력을 장악했음에도 황제의 위에 오르려는 모습은 없었다. 위략에 나오는 기사를 보면 유선은 종묘사직의 제사를 받들고 제갈량은 모든 국정을 담당하는, 현재와 비교하면 입헌군주제의 수상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제갈량의 출사표나 행보를 보면 신하보다는 거의 군주와 동격인 모습이 보인다. 그렇기에 제갈량이 '칭고'를 하고 이엄이 파주자사를 시켜달라 청원하고 구석을 받으라 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제갈량의 충정을 의심할 수는 없는게 유비와 유선 또한 제갈량을 신뢰하여 전폭지지했고 제갈량 또한 분골쇄신했으며 제갈량이 죽은후 이막이라는 신하가 제갈량을 여산과 곽우에 비유하여 비판하자 유선의 치세기간동안 인사를 죽인 것이 극히 드물었던 유선이 노하여 이막을 하옥하여 주살한다. 유선은 제갈량 사후 승상직을 폐하고 사당 세우는 것을 승인하지않을 정도로 제갈씨의 영향력 확대에는 경계했지만 제갈량을 비롯해 제갈씨에 위해를 가하지않았다. 또 촉나라 정권에 그다지 협조적이지않았던 익주의 인사와 학자들도 제갈량을 경애하고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갈량은 국정을 운영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촉나라에선 촉나라 내부로부터 정통성을 인정하지않은 익주의 학자들이 있었고 외적으론 동맹관계였지만 손권이 칭제하여 이를 승인하기까지 불협화음이 있었고 이로 인해 사실상 촉나라의 대의명분은 파탄을 맞이했다. 익주인을 설득한 명분은 유씨 천하의 부흥이었는데 황제가 3명이나 되다보니 굳이 익주인들로서는 유씨만을 섬겨야할 이유가 사라지게된 것이다. 더구나 유씨 정권은 익주로부터 일어난 정권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입된 외래 정권이었다.
어떤 면에서 제갈량은 지극히 복잡한 캐릭터이다. 보통 그 정도의 권력을 갖게되면 최고를 꿈꾸는게 일반적이었지만 그는 그렇지않고 자신의 위치에 만족했으며 최선을 다해 국정을 운영하고 자신을 비롯해 여러 인사들이 과로사할 정도로 분골쇄신했다. 그러나 연의처럼 지극한 선인도 아니었다. 촉나라의 정권 안정을 위해 유봉/팽양/상방을 죽일 정도로 냉철했다. 또한 촉나라 정권 유지를 위해 북벌을 했고 최대한 국익에 협조할 수 있게 사족들을 위로하고 꾸짖기도 하였으나 국익에 해가 된다 판단되면 요립/이엄처럼 숙청하기도 했다. 그는 유비나 조조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던 정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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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국-승상이란 직책은 생각하면 할 수록 상설직으로는 가장 적합하지 않은 직책이 아닐까 하네요.
한~진 시대의 삼공은 실권이 거의 없었고 신라~고려의 중시-광치나-시중 같은 경우엔 국정을 총괄하는 직책이긴 했어도 병권이 없었는데 비해
승상은 실질적으로 군권과 인사권을 모두 가지고 있던 직책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