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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8/04 08:27:15
Name 하쿠오로
Subject [일반] 한 공대생의 인생을 바꾼 김수행 교수
1993년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한 명 있었다. 당시 대학입학시험이었던 학력고사의 사지선다 객관식 문제에 최적화된 일차원적 두뇌를 가진 전형적인 공대생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왔으니 왠지 사회과학 서적도 읽어줘야 미팅 나가서 여자 앞에 똥폼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한 책이 하필 마르크스의 <자본론>이었다. 바로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비봉출판사 판. 역시 자본론은 어려웠다. 분명 한글로 되어 있는데, 영어로 된 전공서적을 읽을 때보다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내용을 이해하고 싶어 <자본론> 관련 해설서를 찾아 봤는데, 그때 발견한 책이 한길사에서 출간된 <政治經濟學原論>이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김수행 교수였다.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마르크스 <자본론>을 김수행 교수가 쓴 해설서의 도움으로 읽어내며, 공대생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개안開眼’하게 된다. 그때의 느낌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모피어스에게 빨간약을 받고 세상의 진실을 보게 됐을 때와 비슷했다. 관심이 깊어진 공대생은 결국 나중에 김수행 교수의 관련 수업도 신청해서 듣게 됐다. 그렇다. 대한민국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을 접한다는 것은 김수행을 읽는 것이었다.

<자본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얼떨결에 공과대학에서 반도체 소자 연구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기업에서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연구원을 하고 있었지만,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결국 2006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대한민국을 바꾸는데 일조하겠다며 민주노동당 활동에 투신(?)하게 됐다. 당 활동을 하던 중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의 21세기 사회주의에 대해 다룬 책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을 첫 책으로 쓴 것이 인연이 되어 인문사회 저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베네수엘라와 차베스에 대한 책으로 저자의 삶을 시작했지만, 사실은 마르크스 <자본론>의 대중적 입문서를 쓰고 싶었다. 내가 김수행 교수의 번역서와 저서를 통해 마르크스 <자본론>을 소개 받고 ‘개안’을 경험했듯이, 아직 마르크스 <자본론>을 접하지 못한 이들에게 내가 쓴 책으로 ‘개안’의 기회를 제공한다면 사는 보람을 느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쓴 책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이다.

내심 인생에서 ‘개안’의 기회를 준 김수행 교수에게 추천사를 받고 싶었지만, 학창시절 대형강의동 구석에서 교양수업을 들었다는 얄팍한 인연으로 덜컥 추천사를 부탁하는 것은 실례라고 판단해 지레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출판사에서 자체적으로 김수행 교수에게 추천사를 부탁해 이미 받아놓은 것 아닌가. 그것도 다음처럼 어마어마한 내용으로 말이다.

"이 작은 책이 3000쪽에 달하는 《자본론》 세 권을 모두 다룰 뿐 아니라 독점과 제국주의, 그리고 새로운 세상까지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필자의 설명이 매우 짧으면서도 핵심을 찌르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여러 곳에서 수많은 강의를 한 것 같고 청중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자본론》과 현대 자본주의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를 터득한 것 같다. 매우 훌륭한 입문서임에 틀림없다."
- 김수행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현 성공회대 석좌교수, 《자본론》 완역)

저자가 직접 부탁하지 못했다는 송구스러움과 과분한 추천사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함을 직접 전하기 위해 출판사에서 연락처를 받아 직접 김수행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임승수 씨? 반갑네. 내가 자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어 봤어. 아주 잘 썼더군.”

나라면 일면식도 없는 무명 저자의 보잘 것 없는 책을, 그 바쁜 시간을 쪼개서 꼼꼼히 읽고 정성들여 추천사를 써 줄 수 있을까? 김수행 교수를 직접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서울대 교수라는 무게와 어울리지 않는 소박하고 넉넉한 인품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고 들었다. 사실 그런 인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마르크스 <자본론>을 완역하고 대중저술 활동을 할 수 있었을 테다. 학계에서는 번역활동, 그리고 학술적 목적이 아닌 대중저술은 제대로 업적으로 인정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들었다. 김수행 교수는 자신의 교수 경력에 그다지 보탬이 되지 않는 번역 작업과 노동자와 청년학생을 위한 대중저술 및 강의활동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의 삶의 목적이 단지 교수로서의 경력을 쌓는 데만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대생이었던 나는 어느덧 김수행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경희대학교에서 ‘자본주의 똑바로 알기’라는 수업을 가르치며 마르크스 <자본론>의 내용을 학생들에게 전하고 있다. 심지어는 한 학생이 나를 국정원에 신고해 인생에서 처음으로 신문 1면과 포털 메인화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덕분에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판매가 갑자기 급상승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부족하나마 책을 쓰고 강의를 하며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개안’을 하는데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갑작스런 김수행 교수의 황망한 부음에 종일 혼란스러운 마음이었다. 평상시 워낙 정정한 모습이라 더욱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는 김수행 교수의 가르침 덕분에 ‘개안’을 하게 된 사연과 함께 갑작스런 부음에 안타까움과 슬픔을 표하는 글이 끊이지 않는다. 그 글들을 보니 오히려 혼란스러운 마음이 차분해 진다. 김수행 교수가 씨앗을 뿌린 밭의 폭과 깊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씨앗을 키워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 세대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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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04 08:37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너무 일찍 가신듯 ㅜㅜ
그리고 책 재밌게 잘봤었습니다! 피지알러셨다니
귀가작은아이
15/08/04 08:45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피지알에 계셨군요! 모교에서 강의를 하시니 더 반갑네요. 잘 읽었습니다.
Je ne sais quoi
15/08/04 08:54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그 책의 저자였다니 반갑네요. 잘 읽었습니다.
김제피
15/08/04 09:04
수정 아이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2008년인가 2009년인가 인문학 동아리에서 강의를 듣고 주저 없이 구입했습니다. 정말 재밌게 잘 읽었었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5/08/04 09:10
수정 아이콘
참으로 멋진 이야기입니다.
판매부수 1 올려드려야겠어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애패는 엄마
15/08/04 09:15
수정 아이콘
책저자가 여기 계셨군요. 잘봤습니다.
15/08/04 09:19
수정 아이콘
핫 PGR에도 계셨군요..
15/08/04 09:19
수정 아이콘
오늘 책샀습니다. 부음이라는 비보와 인생이 바뀐 저자의 글을 보니 말하고자 하는 자본론에 호기심이 느껴지네요. 책 읽는 내내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15/08/04 09:22
수정 아이콘
원숭이도 이해하는..에서 얼마전 대란 났던 사건이 떠오르네요. 그분들은 이 책과 글 보면서도 부들부들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도 구입해서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듀라모6
15/08/04 09:43
수정 아이콘
팟케스트에서 재밌게 방송하는거 잘 들었는데 여기 계셨군요.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도들도들
15/08/04 09:50
수정 아이콘
본문과는 큰 관련이 없는 얘기지만..
저는 사회 각 분야에서 이름을 알리고 계신 분들이
결국 알고보면 게임을 좋아하거나 좋아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연대의식이 솟구칩니다.
마스터충달
15/08/04 11:42
수정 아이콘
마음 속의 은사님이셨군요. 저도 그런 분이 계신데, 아니 많은데 ㅠ,ㅠ
opxdwwnoaqewu
15/08/04 12:03
수정 아이콘
책 읽어도 이해 못하면 저는 원숭이만도 못한 사람인건가요?(엄격, 진지, 책을 안삼)
한량남푠
15/08/04 12:38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원문 링크 : http://omn.kr/esfu
15/08/04 13:15
수정 아이콘
임승수씨세요?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정말 잘읽었고 세미나도 많이 했었고 강연도 몇번 들었었는데 피지알러셨다니 반갑네요 오오....
리스트컷
15/08/04 13:36
수정 아이콘
질문있어요. 맑스의 경제학적 예측은 현대경제학에선 대부분 헛다리짚기였다 밝혀졌다하고, 경제학은 특정인물의 사상을 연구하는 철학과는 거리가 먼 숫자놀음학문에 가깝다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자본론을 읽는건 고전을 읽는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까?
사실 이번기회에 관심갈때 자본론을 읽을까말까 고민중입니다만 관련전공자도 아닌데 과한관심아닐까 두렵습니다.
15/08/04 14:46
수정 아이콘
자본론을 바로 읽으시는 건 쓸모 여부를 떠나서 일단 노잼의 덫이라는 함정이... ㅜㅜ 공부를 업으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굳이 원전 전체를 읽을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쉬운 개설서 위주로 알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할머니
15/08/04 18:12
수정 아이콘
없다고 봅니다. 맑스에 사상적 기반에 공감한다면 아마르티아 센을 읽는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요.
소독용 에탄올
15/08/04 18:30
수정 아이콘
그나마 사회학쪽이면 마르크스 양반 이론을 써먹긴 합니다. 그래서 학부나 대학원에서 다루기도 하고요.
(실제 마르크스 이론 써먹는 양반은 한국엔 거의 없지만요 ㅠㅠ)

말 그대로 다른 전공자라면, 고전 교양서로 읽어볼만은 한데 고전으로 읽으시는 거라면 사실 1권만 읽거나 해설서부터 보시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됩니다.
리스트컷
15/08/05 16:50
수정 아이콘
답변들 감사합니다.
그남자
15/08/06 11:12
수정 아이콘
저자님 책을 구매하려고 검색하다가 발견한 기사입니다.
원문 :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2094031

거의 위글 본문을 그대로 복사해서 기사로 사용한듯한데 혹시 협의하신 건지 궁금해서 댓글 남깁니다.
조만간 책도 구입하여 볼 예정입니다. 안녕히계세요.

수정
아 본문저자님과 기사 저자님이 동일인이시군요..이런 창피한 일이~
본의아니게 신경쓰게했다면 죄송합니다.
15/08/09 16:39
수정 아이콘
아 크크크 이불킥 하셨겠네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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