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아래의 두 글
-[펌글] 우리는 왜 비윤리적이 되는가 (60166번)
-나의 감수성과 행동의 관계 (60173번)
을 읽고, 저도 왠지 마음에 짚이는 점이 생겨, 독립적인 글을 써 보고 싶어졌습니다. (열대야의 영향인 듯)
상세하고 정교하게 논변을 펼칠 재주는 없고 약술에 그치며, 설득이 아니라 가벼운 썰을 지향합니다.
추상적으로 윤리를 논할 때, 그 내용은 '사람은 사람에게 ~해야 한다/~하지 말아야 한다.'가 됩니다. (생명윤리는 일단 예외)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는 나는 일개 사람이고, 나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 대상은 나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나와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죠. 굳이 따진다면 상대도 지금 나처럼 윤리적인 고민을 하는 '인간다운' 인간인가? 하는 정도.
그런데 막상 윤리를 실천할 때가 되면, 그림자로 보이던 추상적인 주체와 대상이 사회적 얼굴을 갖기 시작합니다. 나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아들/선생님/학생 뭐 그런 게 되고, 상대도 역시 그냥 사람(들)이 아니게 됩니다. 누가 "너 왜 그렇게 하지?" 물을 때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해야 하니까/~하지 말아야 하니까."는 너무 거창하게 들리고, "나는 000로서 저 ***에게"라고 말하는 게 더 자연스러워집니다.
문제는 그게 단순한 구체화가 아니라 사회의 인간관계 속에서 분업화에 이른다는 점입니다. 분업이란, 여러 가지 일들이 모두 필요하지만 내가 그 중 일부는 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그리고 고도로 복잡한 분업체계에서는, 그냥 남에게 맡겨두는 수준을 넘어, 그걸 신경쓰면 이상한 놈이 되죠. 이게 재화/용역의 생산에서는 최선 혹은 필수악인데, 윤리에 들어오면 묘해집니다. 분명히 '사람으로서'는 윤리의 일부를 어긴다 해도, '000로서'는 그게 윤리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아주 대표적인 예는, 적은 쓰고 우린 못 쓰는 ***(들)을 파괴하도록 명받은 전시의 군인이죠.
군인은 그렇다쳐도, 어느 사회가 수직 서열에 집착할수록 윤리의 분업은 상당한 윤리 왜곡을 보여줍니다. 위와 아래는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고, 그건 윤리도 예외일 수 없으니까요. 극단적으로는, 윗분은 직접 윤리를 실천하는 사람이기보다, 아랫것들을 윤리적으로 계몽하는, 좋게는 원로고 나쁘게는 꼰대가 되죠. 그리고 아랫것들은 뭔가를 실천하긴 하는데, 윤리를 판단하거나 할 필요는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하여 조직의 활동은 윤리적이거나 비윤리적인데, 그에 속한 개인들은 온전한 윤리 주체가 아닌 상황이 되죠.
사회를 이렇게 만든 범인으로 '유교'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사실 유교의 '군군신신 부부자자'에는 그런 속성이 있죠. 하지만 공자는 가급적 모든 사람들이 다 군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예로 말하자면, 유교에서는 윗사람이 지킬 예와 아랫사람이 지킬 예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사람 안 다치기를 기본으로 하고, 지금 이걸 왜 하는지 이유를 따지며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예'입니다. 위로 갈수록 뭔가 핵심의무는 면제되고 장식만 늘어나며, 아래로 갈수록 '알아서 다 맞춰 모셔야' 하는 예법이라면 유교의 오리지날리티는 아닙니다.
한편 서열도 서열이지만, 천변만화하는 상황 맥락 속에서 윤리의 분업은 단지 그 위윤리성을 탓하기엔 성격이 더 복잡해집니다. 어떤 윤리를 모종의 조건에 따라 어떤 때에는 지키고 어떤 때에는 안 지키는 '시프트'가 나타나는 것이죠. 좀 극적인 예로는, 피가 나도록 아랫사람을 때렸지만 그 후 손수 치료를 해주는 윗사람(부모라든지 교사라든지)을 들 수 있죠. 사람을 그리 때리면 안 좋다는 것은, 설령 폭력 문화에서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나 패지 않죠.) 하지만 훈육을 해야 할 때에는, 예컨대 '빨간줄에 비하면 매질도 여전히 자애'라는 특수조건이 발동하는 겁니다. 정신이 좀 나가서 때렸다가, 제정신을 차려보니 후회가 되었다, 이런 경우도 있지만, '000로서'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훌륭하게 시프트를 수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으로서'를 벗어나 어딘가 어긋나 보이는 윤리의 분업도, 잘 되면 왠지 우리에게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임무에 충실한 (아군) 군인이 그렇고, 약에 눈물을 섞어 발라주신 어머니가 그렇고, 취향을 좀 타지만, 험하게 굴다가도 뭔가 꼴이 됐다 싶으면 인정하기에 인색하지 않은 어느 선배, '0장님'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친하기엔 거친 스타일이죠.) 밥상머리에서 학교 교육을 거쳐 대중 매체까지에 이르는 사회적 훈련의 결과일 겁니다. 아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의 대사였을 겁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군주는 할 수 있다'던가.
어쩌면 윤리의 분업은 '사람으로서' 답을 내기가 쉽지 않은 '윤리의 복수정답 문제'를 현실적으로 돌파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문제에서 대개 의견은 갈리고 다수결은 오히려 폭압적인바, 그렇다고 쪼개질 수 없다면, 판단권을 윗분께로 일원화하는 것은 불가피하죠. 개인 차원에서는, 조건에 따라 시간차를 두고 시프트를 행하는 것 또한, 변동폭과 주기가 적절하다면 내적 갈등을 봉합할 수 있구요. 이게 아니라면 개인의 선택, 또는 사회의 총합적 지향이 어중간한 그 무엇이 되기 쉬운데, 왕왕 어중간한 것은 아니 함만 못하죠.
그래도, 결국 이상은 '사람으로서'로의 복귀겠지요. 남의 윤리 문제를 비평할 때는 '사람으로서'가 쉽게 나오지 않습니까? 적어도, 일단 답부터 정해 두고 그걸 정당화해 주는 역할을 찾아다가 자임하는 박쥐스러운 짓은 하지 않고자 합니다. 접때 내 고향의 부모처자가 걱정되어 몰래 적전도주했지만, 오늘 남의 고향의 부모처자를 약탈하는 것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나서는 그런 병사는 되지 말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