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요즘도 아주 유명하시던데요."
"뭔 소리예요. 이젠 늙고 병들어서 밤새 게임은 고사하고 키배할 힘도 없구만. 올해 내 나이가 40이예요, 40."
"그런 분이 퍼드 500랭을 찍었다고 블로그에 올려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하세요. '600랭크를 목표로 천천히 걸어가겠습니다'라고 써놓은 거 보고 얼마나 어처구니없었는지 알아요? 다른 사람은 걷기는 커녕 뛰다가 산소부족으로 돌아가실 랭크를 찍어 놓고 이 아저씨가..."
"하하. 이것 참..."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과거에, 모뎀 소리와 함께 들어가던 인터넷 초창기의 커뮤니티 이야기로 샜다. 01410으로 하이텔 접속하고, 익스플로러가 아니라 넷스케이프가 대세였던 시절. 그리고 내가 공대생 새내기가 되어 인터넷이란 세상을 처음 알게 된 그 때, 그렇게 얼굴을 보지 않고 만났다가 얼굴을 보게 된 몇몇 사람들. 그 때도 그들과 만나고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그들과 만나고 있다. 그리고 만나게 되면 오프라인으로 누군가를 만나도 본명보다 닉이 익숙하고, 시삽이었던 그 사람이 사실은 어디 관계자였네 하는 이야기가 정말 놀라웠던 시절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런데 지난 번 클베했던 그 게임은 어쩌다가 그리 되었대요?? 참내. 20여년의 추억이 그렇게 박살나다니... "
"에휴. 모르겠어요. 나도 열받아서 뭐라뭐라 했는데. 다음에 그 분들이 보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모르겠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런데 내 말이 맞았지요?"
"무슨 말이요?"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거요. 님은 그 때도 예전같지 않다고 했지만, 여전하잖아요."
"그거야 내 추억이..."
"어쨌든 됐고, 내 말이 맞았으니 오늘 밥은 님이 사요."
"......"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다가 현실을 돌아 보면, 아직 그 세계와 발을 들이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더 이상 게임이 전부가 아니게 되고 더 이상 커뮤니티가 취미가 아니게 되고. 싸우고, 연애하고, 헤어지고, 그렇게 되어 떠나간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들에게는 공대생으로 연구만 하다가 이 바닥으로 들어온 내가 이질적인 인간일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글 좀 알아먹게, 간단하게 쓰세요. 아직도 난 님 글 한 번에 알아먹지 못하겠더만."
"......생겨먹은 게 이러니까 뭐..."
"그런 글로 장사해먹고 이 바닥에서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거 보면 그래도 참 재주는 좋아."
이제는 이렇게 디스하는 것조차 반갑다. 글을 길게 늘여쓰는 버릇이 들다 보니 이런 소리를 듣고, 고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설명하고 싶은 말이 그만큼 많기 때문에 이런 저런 단어를 붙이다 보니 글이 길어지는 나를 보고 재주도 없는 것이 욕심만 많다고 이른바 폭풍 디스를 했던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이 친구다. 그래도 요즘은 같은 말을 해도 '그래도 참 재주는 좋아'라고 다소 비트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게 '재주도 없는 것이 욕심만 많다'고 말을 듣는 것보단 낫다. 나도 칭찬받고 싶어하고 좋은 말 듣고 싶어하는 사람인데 재주도 없다는 소리 들으면, 의기소침해지기 마련이니까.
"님 지난 번보다 상태는 어때요?"
"그저 그래요."
"그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조심 많이 해야 할 듯 한데요. 최소한 몇 년간은 심하게 굴리지 말아야 해요."
"지금도 나이가 이런데 몇 년 뒤에 날 써줄 사람이 누가 있다고요. 어차피 오늘만 사는 처지인데."
"오늘만 살든 내일만 살든 그럼 일단 조금이라도 제대로 살아요. 오늘만 보고 살다가 내일 못 보고 가시지 않으려면."
"......"
"난 님 장례식 갈 생각 없어요. 아직은."
건강 이야기로 잠시 이야기가 넘어갔다가. 다시 예전의 커뮤니티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리고 끝맺음은 항상 이런 식이다.
"그런데 말이죠. 그 때나 지금이나 왜 내 글에는 댓글들이 많이 없을까요?"
"그건 말이죠."
"......??"
"그건 님이 모니터 반대편 사람들에게 무관심해서 그런 거예요. 한두 해도 아니고 죽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맞아요. 나 인망 없어요."
"쯧쯧. 또 심각해지시는구만. 그러니까 연락 하면 좀 받아요."
"다 받고 있잖아요. 내가 연락 올 데가 또 어디 있다고.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붙잡는데."
"그러니까 가는 사람은 좀 붙잡기도 하라는 말입니다요. 님도 참."
생각은 한다. 적어도 지금 알고 있는 사람들마저 놓치지는 말아야 하는데 한다. 그렇지만, 글쎄다. 모르겠다. 돌아보면 이미 많은 것들을 놓쳤다. 과연 내가 이것을 바로잡을 날들이 있을까 하고 번민하고 있다가, 뭐라도 해야 겠다 싶어 일단 이 기억이라도 남겨 본다. 이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안 될 것 같아서 말이다.
하루 휴가여서 여기저기 다녀온 다음 PC를 켰는데. 바탕 화면에 못 보던 '새 텍스트 문서' 파일이 떡하니 떠있어 읽어봤더니 남겨져 있는 글입니다. 아마도 얼마 전의 약속에서 좀 많이 뭔가를 먹은 다음에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는 메모장을 열고 이런 짧은 글을 쓰고 널브러져 잤다는 이야기인데...... 그 날을 떠올려 보니 뭔가 좀 무섭군요.;;
- The x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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쨌든 별다른 필터없이 직언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는 꽤나 소중하죠. 그런 관계는 굳이 많을 필요도 없고..
아직은 무심함과 무모함으로 무던히도 놓쳐버린 수많은 인연에 침식당하느니, 다가올 인연을 기다리는게 더 좋다고 보지만..
모르겠네요. 지날수록 온전히 무장해제하고 만날 수 있는 인연은 찾기 힘드니..
마음은 아직 켠김에 왕까지인데 패드잡고 졸거나 CS 먹다가 눈이 침침해질때마다 저도 '아 나 올해 마흔이지..'하는 생각에 울적해지곤 합니다 크크
의도적으로 많은 것을 놓아버리고 그 놓아버린 손을 매몰차게 털어가며 '이게 다 선택과 집중이지...' 하며 합리화를 해오며 살아왔는데
버리고 손 안에 남겨온 것들이 생각해 보면 별 것 아니고 언제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의미 없는 것들이라는 두려운 확신이 들기도 하고
또 다음엔 뭘 또 놓친 다음에 쏘 쿨하게 스스로를 합리화 할 지도 두려워지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게임 실력은 이제 죽을 때까지 늘지 않겠지 하는 확신도 들고.
마흔은 참 무서운 나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