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휴게실 꺼진 TV와 주인 없는 쇼파들, 무의미한 테이블 자판기의 부질없는 조명을 외면하고 나와 주치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에이즈. 어지러워 눈을 감았지만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A4 용지의 빈 공간이 무색하게 HIV라는 세 글자가 내 인생을 결정지었다.
가족에게는 부디 비밀로. 혼미한 와중에 다급히 내가 꺼낸 말은 이 엄청난 바이러스의 무게감 앞에 한없이 초라했다.
신경과 병동 6인실. 양 옆에는 중풍 할아버지와 하반신 마비 아저씨. 맞은 편에는 자폐증과 불면증. 그 날 밤 병실에서는 밤새도록 불면증 환자와 에이즈 환자의 눈싸움이 이어졌다.
위양성. 가짜 양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False positive 라는 건데 에이즈 검사는 양성이 나와도 위양성의 가능성이 있다고. 즉 양성이 나오면 위양성의 가능성이 있어서 재검사를 해야 한다고. 대신 음성은 위음성 없이 한 번 음성이 나오면 온전하게 음성이라고 했다.
한 번 더 검사를 할 텐데 그 때도 양성이 나오면 국립보건원으로 이전되어 국가에 에이즈 환자로 등록된다는 쓸데없이 친절한 설명도 들었다. 내 진료부서에 감염 내과가 추가되었다.
밤인지 낮인지 구별하기도 힘든 시간들이 지나간다. 왜 하필 나였을까? 세상에 환자가 이렇게 많은데 왜 하필 나일까? 왜 하필 에이즈일까? 각종 암과 심근경색, 백혈병과 뇌졸중 등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질병이 있는데 왜 하필 에이즈일까?
재검사를 해서 음성 판정될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나는 간절하지 않은 척, 단순한 호기심인 척 물었지만 실은 이 질문에 모든 것을 걸었다. 주치의는 대답 대신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허망히 고개를 떨구었다.
왜 하필 나일까? 왜 하필 에이즈일까?
병원비 영수증에 왜 감염 내과가 추가되었냐고 묻는 아빠 앞에서 왜 자기가 왔는데 반겨주지 않느냐고 묻는 여자친구 앞에서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궁색한 말 돌리기 뿐.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더 이상 불편함을 피해 로비나 공원으로 도망가지 않았다. 여전히 옆에서는 비명이 들려오고 자폐증 환자는 놀라운 행동을 계속했지만 별로 아프지도 않은 것들이 엄살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병실에서 가장 심각한 병을 가지고 있다는 철없는 자부심이 생겼을까.
너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는 에이즈 환자다. 이것이 너희들과 나의 눈높이, 어디 나의 권위에 도전해 보겠느냐? 후후.. 그저 흔한 편두통 환자라고 생각했겠지... 편두통 주제에 병원에 입원한 엄살쟁이라고 생각했겠지? 보아라! 에이즈의 위용을! 내가 곧 에이즈다. 이제야 나의 진면목을 알아 보겠느냐? 염치가 있다면 머리를 조아리고 패배를 선언해라! 나는 병 중의 병, 비극 중의 비극. 면역결핍의 극에 달한 자! 홀로 쓸쓸히 질병과 비밀을 간직한 채 고통을 호소하지도 못하고 죽을 날만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운명.
담배를 열심히 피웠다. 하도 피워서 목이 찢어질 것 같아도 포기하지 않았다. 제발, 빨리 폐암에 걸리길. 에이즈가 발현하기 전에 폐암에 걸려서 죽는 것이 내 유일한 소원이었다.
두 번째 검사가 시작됐다. 검사라고 해봐야 피를 뽑아가는 것뿐이지만 마치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처럼 느껴졌다.
피를 뽑는 그 짧은 시간에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던 날 아침이 생각 났다. 광대가 시큰거리더니 병신처럼 눈물이 펑펑 났다. 깜짝 놀라서 나를 보는 채혈 간호사와 눈이 마주쳐 당황했다가 이렇게 아프게 뽑으면 어떡하냐고 성질을 부린 뒤에 도망치듯 공원에 처박혀 담배를 물었다. 라이터는 또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불도 안 붙은 담배를 물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숨죽여 어깨를 들썩거렸다.
왜 하필 나일까? 왜 하필 에이즈일까?
이 멍청아. 너 에이즈가 뭔지도 모르냐? 죽는다고. 죽는 것도 아주 비참하게 죽는다고. 죽고 나서 장례식장에서도 사람들이 수근 댈 거야. 에이즈는 그런 병이야. 그리고 내가 문제가 아냐. 너도 검사를 해봐야 해. 왜 화를 내지 않니. 왜 울지도 않고 왜 또 그런 표정을 지어. 상관 없긴 뭐가 상관이 없어! 죽는다니까! 내 멱살을 잡고 따귀라도 때리던가 무섭다고 울면서 땡깡이라도 부려야지. 왜 안아주는 거야. 눈물 나잖아. 분위기 파악 좀 해라. 이 멍청아.
이 멍청아. 미안해. 내가 병신같아서 병도 아주 지랄 맞은 거에 걸렸어. 미안해. 나 너무 무서워. 진짜 아무 것도 못하겠어. 미안해.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니. 어떡하면 좋니. 미안해. 그냥 내가 미안해. 미안해.
나는 할 일이 많았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해야 할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노트와 펜을 샀다. 그러다 문득 올드 보이 생각이 났다. 올드 보이에서 오대수는 누가 자신에게 앙심을 품었는가를 회고하기 위해 독방에 갇힌 채 악행의 자서전을 썼다.
나도 섹스의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첫 섹스부터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써 내려갔다. 이 몹쓸 병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누구에게서 옮아 온 건지. 내가 누구에게 옮긴 건지. 모두 밝혀내 그녀들을 찾아가 무릎 꿇고 사과하며 검사를 권해야 한다.
그러다 깨달은 사실에 피식 웃음이 났다. 난 에이즈에 걸릴 만 했다. 아니, 더 무서운 병에 걸렸어야 했다. 이 끔찍한 형벌에 처해지기에 충분한,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
섹스가 좋았다. 그래서 했다. 많이 했다. 여자친구와 했고 아직 여자친구가 아닌 여자와도 했다. 심지어 아무 관계도 아닌 여자와도 했다. 처음 만난 여자, 두 번째 만난 여자, 오랜만에 다시 만난 여자, 그냥 여자.
매일 했고 하고 나서도 만족을 모르고 계속해서 했다. 끼니처럼 해댔고 잠까지 줄여가며 했다. 강의실에서 했고 화장실에서 친구 집에서 과방에서 동아리방에서 섹스를 했다.
심지어 입원해 있는 와중에도 섹스를 했다. 우리는 자정이 넘어 불이 꺼진 방사능 어쩌구 연구 건물로 숨어들어가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섹스를 했다. 관계자외 출입금지 구역에서도 섹스를 했고 할 수 있는 모든 곳을 찾아 다니며 섹스를 했다.
내 인생의 모든 의미가 섹스로 귀결되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감정을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관심 없었다. 오직 섹스. 그저 섹스. 그것은 나의 전재산. 그것만이 내 세상.
거친 숨결의 입술을 포개고 따뜻하고 말랑한 가슴을 맞댄 뒤 부드러운 등과 엉덩이를 쓰다듬어 책임지지 못할, 비열하게 달콤한 말들을 귓가에 속삭이며 지구 최후의 날, 마지막 로맨티스트를 연기하며 나는 섹스를 했다.
지난 여자친구의 이름들을 한번에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녀들이 누구였는지 나는 쉽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들과 했던 섹스의 느낌만이 아슬하게 남아 간신히 그녀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나는 왜 굳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였을까? 섹스하자는 말을 하지 못해 그저 사랑한다고 말했을 뿐.
그 수많은 편지와 수 많은 암시와 수 많은 눈빛들이 오직 하나, 오직 섹스의 신호였다는 것을.
나를 사랑했을까? 왜 나를 사랑했을까? 생긴 거라고는 매운탕에서 갓 건져 올린 쏘가리마냥 형편없었고 뭐 하나 잘난 구석도 없고 친절하지도 않으며 개판 같은 미래가 거의 확정된, 암담한 인생이었던 나를.
왜 나를 안아주고 돌봐주고 사랑한다 해 줬을까 내가 원하는 것이 오직 섹스라는 것을 알면서도 섹스가 끝나면 남처럼 돌아서 담배를 물었던 다음 섹스 전까지 관심 한 푼 주지 않았던 인간 말종에게
왜 사랑한다 말하고 그런 눈으로 나를 봐 줬을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서전을 써 내려갔다. 내 스스로가 어떤 인간인지 조금씩 알아갈수록 역겨움이 일었다. 신이 있다면 나 같은 놈이 에이즈에 걸리는 것이 맞다.
나는 받아들였다. 에이즈 맞다.
나란 인간, 이런 비극에 몰려서야 비로소 여자친구의 사랑에 기대어 비겁하게 마음의 위안을 구걸하는 형편없는 존재.
내 인생의 재판에서 변호인은 나의 변호를 포기했다. 나의 죄는 사랑을 기만한 죄. 나의 벌은 그것을 깨닫는 벌.
마지막 검사 결과 양성
나는 울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대신 차분하게 짐을 싸서 퇴원을 했고 여자친구와 강릉행 버스에 올랐다.
엄마가 보고 싶다.
-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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