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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05 07:52
글을 잘 읽지 않으셨군요... 저는 중용이 단순한 산술적 평균인 중간이 아니라 진정한 중용이 있고, 그것을 가늠하기가 어려움을 얘기하는것이 아니라 그렇게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중용이 다른 한 극단에 비해 열등하며 이상적 관점에서 보면 중용은 그냥 현실적 선택에 불과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6/12/05 13:16
네. 그러니까 그런 중용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존재하는 중용이 과연 다른 극단보다 우월한지 의문이라는 생각입니다.
16/12/05 08:12
적절히 균형잡힌 식사는 폭식 단식에 비해 항상 우월하죠. 중용의 도는 절제에 있으며 현실적 선택의 정당화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고 싶은 걸 참아내고 하기 싫은 걸 해야하는 것이 중용이죠.
16/12/05 15:07
식사에서의 중용은 확실히 양 극단보다 우월해 보이네요. 이 경우 폭식이 균형잡힌 식사보다 좋기가 대단히 어려운데... 굳이 역할이라면 폭식 단식을 해 봐야 균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역할정도. 결국 중용인가요. 음... 다시 생각할 여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글을 쓰고 나서도 여자한테 차이고 나서 쓴거라 엄밀하지 못하고 헛소리가 될거같은 생각이 들긴 했어요. 아이디어는 좋지만 생각을 다듬어봐야겠습니다.
16/12/05 08:59
孟子曰(맹자왈)
맹자께서 말씀 하셨다. 孔子(공자) 不得中道而與之(부득중도이여지) "공자께서 ‘중도(中道)를 걷는 사람을 사귀지 못하게 되면, 必也狂獧乎(필야광견호) 나는 반드시 광자(狂者)나 견자(獧者)를 구할 것이다. 狂者進取(광자진취) 광자(狂者-지나치게 뜻이 높고 진취적인 사람)는 진취(進取)의 기상이 있고, 獧者有所不爲也(견자유소불위야) 견자(獧者-무식하지만 고집쟁이)는 굳게 지키는 기상이 있어 하지 않는 일이 있다’하셨으니, 孔子豈不欲中道哉(공자기불욕중도재) 공자께서 어찌 중도(中道)를 걷는 사람을 원하지 않으셨겠는가? 不可必得故(불가필득고) 꼭 얻게 될 수 없었기 때문에(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思其次也(사기차야) 그 다음 가는 광자(狂者)나 견자(獧者)를 생각하셨던 것이다" 이 문구가 생각이 나는 글이네요. 공맹(孔孟)은 스스로 중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결국 대부분 향원(鄕原-사이비, 위선자)이라고도 했죠. 저 개인적으로는 양 극단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중간 지점을 알 수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 누구도 양 극단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조차 모르는데 말이죠.
16/12/05 10:36
광자는 누구지는 모르겠지만, 견자는 아마도 '자로'를 뜻하지 않을까 싶네요.
무식하지만 굳게 지키는 기상이 있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딱 '자로'이거든요.
16/12/05 10:56
여기서 말하는 광견, 향원, 중도는 딱히 누군가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대명사라고 생각하시면 되구요.
굳이 자로를 이 카테고리로 구분을 짓는다면 견자에 가깝긴 하네요. 공자 제자 중에서 가장 멋진 남자였죠, 자로는.
16/12/05 15:12
국어 지문풀다 이 글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이때 심정적으로 난 군자는 되지 못하고 광한자에 가깝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공맹(孔孟)은 스스로 중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결국 대부분 향원(鄕原-사이비, 위선자)이라고도 했죠. - 공맹의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중도를 파악하는게 쉬운일이 아닐진데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알기 어렵겠죠. 저 개인적으로는 양 극단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중간 지점을 알 수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 누구도 양 극단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조차 모르는데 말이죠. - 뛰어난 생각 같습니다. 중용을 알려면 양 극단을 알아야 한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양 극단의 존재의미는 있겠죠. 극단 없이 단칼에 중용을 파악하는것이 천재일까요. 아니 가능은 할런지요. 흠. 제 개인적으로 누군가가 양 극단에 대해 좋은 평을 하는것을 듣는게 처음이라 반갑습니다. 중용은 간지가 안나요. 마모씨 3해처리가 중용이라면 극단은 최연성 노컨트롤 물량.
16/12/05 14:07
극단적 사랑이 허용되면 극단적 미움도 허용되죠 순수하게 신을 사랑해서 한 어떤 행동은 누군가에겐 테러이고 살인입니다
이 서로 다른 사랑, 즉 욕망을 어떻게 통제하느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철학, 종교의 숫자만큼이나, 인간 생존에 절실한 화두가 아닐까 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중용이란 철학도 바로 이 화두 아래에서 고안된 개념이 아닐지요 인간의 모든 욕망이 풀어 헤쳐진 세상은 끔찍합니다 소 키울 사람도 없고.. 무튼 당신의 사랑이 그녀에게 폭력으로 비춰지지 않기 위해서 중용은 괜찮은 전략아닐까요
16/12/05 15:19
그 중용의 추구가 일반론 같은데 삶에서 불만이 생겨 징징식이긴 하지만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어찌보면, 중용이라는 윤리가 그렇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열등한 상황속에서 차악에 가까운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요. 먼 미래에는 아무도 실천하지 않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것 같아요.
큰 거대담론을 던져주셔서 제가 생각하기 벅찬 것 같습니다. 소는 누가키울지 당장은 모르겠어요 ㅠㅠ 사족 인류가 정착하고 농사를 하는데 몇십만년이 걸렸는데, 그 농사짓기 전의 윤리는 지금과는 아주 달랐을 것입니다. 1년의 농사를 인내해 낼 수 있는 무리가 처음 기적적으로 생기기 전의 윤리는 현세 입장에서 보면 최악일 것인데,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뭔가 생기면 저장하는게 아니라 바로 소비만 해버린다든가. 먼 미래에는 중용도 구석기시대의 윤리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요.
16/12/05 15:32
극단적 사랑이 허용되면 극단적 미움이 허용되죠
- 맞습니다. 제가 주장했던건 극단적 사랑, 중용, 극단적 미움 셋 중에 극단적 사랑이 가장 큰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지 않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보니 예수의 극단적 사랑은 중용과 양립하기 어렵네요. 묵자의 겸애도 그렇고. 공자가 별애를 주장했는데 이 차별적 사랑인 별애는 위 셋 중 중용에 가깝고 이상보다는 대단히 현실을 택하는 느낌입니다. 현실적으로 모두를 사랑하기 보다는 주변부터 사랑하고자 하는 입장이죠. 위 글에도 대략 적혀있지만 예수의 무차별적 사랑은 현실 운운하는거 싫어하는 제가 봐도 실천하기 어려워 보이네요. 근데 이 사상이 만연할 때가 인류가 가장 행복할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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