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에서 글쓰기 버튼이 무거운 걸 잘 알고 있고 평소 글을 써본 적이 거의 없어
자유게시판에 글을 쓰는 게 부담스러워 글을 써볼 시도조차 하지 못한 제가 오늘 이렇게 글을 쓰려고 하는 이유는
나라는 사람의 별 볼 일 없는 인생 이야기를 스스로 정리해본 적이 없고 내가 앞으로 나감에 있어
내 인생을 한 번쯤은 제대로 정리해야 뭔가를 할 수 있을 거 같아 익명성에 기댈 수 있고 내가 글을 써도 가장 진지하게
읽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pgr21이라고 생각되어 글을 써봅니다
내 인생에 대해 남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게 부끄러워 아무에게 말 못한 못난 인생에 대해 자기 고백을 하고 싶었고
생각나는 데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글을 써본 적이 거의 없어 흐름이 어색하고 읽기가 많이 불편하더라도
너그러이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어린 시절 나는 풍족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고향 전남에서 서울로 갓 상경해 강남에서 큰아버지의 중국집에서 일을 하다 큰아버지가 중국집을 물려주고
그곳에서 장사했었는데 장사가 너무 잘돼서 현재 10억쯤 하는 반포의 어느 한 아파트를 다들 대출을 끼고
들어올 때 그냥 현찰박치기로 입주를 했을 정도였고 가게는 항상 붐볐으니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돈 좀 꾀 버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풍족한 집안, 화목한 가정, 원만한 교우관계 등… 어느 하나 모자랄게 없는 너무나 행복한 유년기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누나와 나에게 이제는 같이 못살게 된다며
울고불고 말을 하고 그다음 날 어머니가 머리끄덩이를 붙잡히고 친척들에게 쫓겨나는걸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이혼이란 걸
실감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나는 라볶이를 아주 좋아한다 이유는 내가 학원이 끝나면 어머니는 가게 일이 바쁘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집에 잘 돌아오는 게 평소 생활이었는데 이혼하기 한 달여 전쯤부턴 어머니가 굳이 학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나를 데리고
평소엔 잘 사 먹이지 않았던 분식들을 원하는 만큼 자주 사주었다 그때 난 라볶이를 자주 시켰고 중국집사장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짜장, 짬뽕은 물리고 라볶이는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 항상 허겁지겁 라볶이 먹었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표정은 아마 애틋함 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라볶이를 거의 매일 먹으며 어머니와 데이트를 하던 한 달이 지나고 어머니는 쫓겨났고
나는 아버지와 같이 살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아버지를 아주 싫어했다 이혼을 한 이유에 대해 아버지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고 친가 쪽 친척들은 어머니가 잘못해서
이혼했다고만 두루뭉술하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나는 이혼의 정확한 이유를 모르고 이혼을 한 것이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내 양육권자로서 나를 키워줄 의무가 있는 사람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대화 또한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었다.
부모님이 이혼한 이후부터 거짓말처럼 그렇게 장사가 잘됐던 중국집조차 슬슬 장사가 안 풀려서 아버지는 강남에서 하던
중국집을 접고 서초구에서 두 곳을 연달아 2년 간격으로 중국집을 열었지만 영 시원치 않게 둘 다 잘 안 풀렸었고
내가 중학생이 될 때쯤에 아버지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새로 만난 여자와 재결합을 할 생각이었는지 그쪽에 딸린 식구와 우리를 데리고 식사를 하기도 했고 우리 집에
그 여자가 자주 찾아오기도 했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으로 그 새 여자와 아버지에게 성질과 꼬장을 부렸는데
꼬장을 부린이유는 그때의 나는 항상 행복하게만 살던 우리의 가정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난 뒤부터 가게도 안 풀리고
가족 간의 불화가 생겨 불행해졌다고 생각을 했었고
그런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새로운 여자를 만난다는 걸 알게 되자 나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을 한 번 더 느끼게 되어
그 둘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항상 험악하게 만들었고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비틀어졌었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돼서 아버지는 몸속이 안좋은 것 같다며 입원을 했고 몇일 만 있으면 퇴원 할줄 알았던
아버지는 서울성모병원에서 간암말기 라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다.
의사선생님은 누나와 내가 있는 곳 에서 암세포가 이미 다른곳까지 너무많이 전이되어 수술을 할수없고 최대한 몸을 회복 시킨 후에
수술여부를 다시 판단 하겠다고 말했지만 수술을 할수있는 가능성조차 매우 낮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처음 간암소식을 알려주신 작은아버지께서 나와 아버지의 사이가 안좋은걸 딱보기에도 아셨는지 도데체
부자지간에 사이가 안좋냐고 물었고 그때서야 나는 아버지가 친어머니를 버린것에대한 배신감을 말했었다.
작은아버지는 이혼의 사유를 그때서야 처음 말해 주셨는데
그 이유는 알고보니 아주 간단한것이였다. 한마디로 어머니가 바람을 폈었다는것이다.
나중에 따로 알게된거지만 처음에 아버지는 어머니가 바람을핀걸 알게되었지만 집안 싸움후 에 더이상 바람을
피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것으로 끝내셨는데 어머니는 기어코 다시 바람을 피웠고 그 후 아버지가 이혼을 결심 하게 된것이라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양육권자였고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집에서 나왔다면 당연히 어머니쪽에서 문제가 있었다는걸
알수 있겠지만 그때의 나는 어렸고 편협한 시각을 가졌고 아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지않았기때문에
내 생각대로만 아버지를 증오했었다.
작은아버지에게 이혼의 사유를 처음 알게된 후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는 그 느낌을 처음 느꼈다.
내가 그때동안 아버지를 향한 그 증오와 상처를주는 말과 행동들이 잘못되도 너무 잘못된 행동이란걸
아버지가 가장 안좋을 때가 되서야 알게된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을때 평범하고 올바른 사람 이였다면 아버지에게 울고불며 매달리며 내가 한 행동들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사죄를하고 지금이라도 잘 지내자고 했을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봐도 편협하고 찌질하고 못났기 때문에 내가 잘못한걸 알고 있음에도 아버지와의 감정의골이
너무 깊다는 이유로 말을 먼저꺼네기가 자존심 상한다는 혹은 민망하다는 이유로 바로 관계의 회복을 시도하지않았다.
아버지는 많이 괴로우셨을것이다 우선 가장큰 이유로 이제 자기가 살날이 얼마 남지않았다는걸 자신이 가장 잘 아셨을테고
말기암의 육체적 고통에 괴로워 하셨을 것이고 말기암 진단후 아버지는 새로만난여자와 4개월정도 더 만나다가 헤어지게되었고
그나마 있는 자식중에 아들이란놈은 자신이 이런데도 여전히 드문드문하니... 얼마나 괴롭고 또 괴로우셨을까
그래서 인지 아버지는 그 괴로움을 이겨내려 기독교를 믿으시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입원 퇴원을 반복하며 1여년을 집과 병원을 왕래하며 지냈고 나중에는 일상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하게되되어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내게되었다.
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아버지가 들어가고 그때서야 나는 아버지가 정말 갈날이 얼마 남지않았다는 위기감을 느꼇고
아버지와 말을 트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나의 잘못에 대해 사과 하지도 않았고 말을 해봤자
내가 다정하게 아버지에게 말을한것도 아니였고 누나보다 자주 병문안을 가지도 않았다
누나가 일주일에 세네번 병문안을 갈때 나는 기껏해야 한두번가는 수준이였었다.
나는 여전히 찌질하고 못난놈이였다
의사 선생님은 아버지에게 남은시간이 길어봐야 1년이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호스피스 병동까지오기까지 1년 그리고
내가 대학에 들어갈때까지 2년동안에도 초인적인 의지로 삶을 연명을 하셨다
그리고 2010년에 나는 공부를 지독히 안했기때문에 소위 말하는 지잡대에 들어가게되었다.
지방에 있는 대학이였기때문에 아버지를 자주 만나러 가지못했다 한달에 한번쯤 병원에 면회를가는게 전부였고
한달이라는 큰 간격동안 가끔씩 보게되는 아버지의 안색은 점점 살아있는 사람의 생기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 1학기 새벽에 누나에게 전화가왔고 다짜고짜 우는목소리로 빨리 서울로 올라 오라고 말을 했다
그 말이 무슨뜻 인지는 알았지만 인정하기싫어 무슨 일 인지 굳이 물어보고 아버지가 이제곧 돌아가신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야간 기차를타고 서울에있는 병원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기차안에서 신을 믿지는않지만 모든 것에 대해 빌고 빌었다 아버지가 죽게하지 말아달라고
만약 돌아 가신다면 내가 올때까지는 제발 버티게 해달라고 못한 말 이있다고 그리고 병원에 갔을때
아버지는 두눈을 깜박 이는것, 얼굴근육을 약간 움직이는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정말 가느다란 마지막 생명을
붙잡고 버티고 있었고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그 공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정말 잘못했다고 울고불며 나의 죄를 빌고 그외의 여러가지말을 아버지에게 소리쳤고 아버지는 목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셨지만
얼굴로 그리고 눈빛으로 내 말을 들어 주셨는데 그 얼굴의 모습이 이젠 선명하게 기억나지않아도 그 느낌만은
아직까지 가슴깊이 남아있다.
그 후에 아버지는 아버지의 어머니,형,누나,동생들이 하는 마지막인사를 끝으로 두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갈 곳이 없어진 나와 누나는 어머니와 같이 살기로 했지만 나는 대학 1학기를 마치고 거의
바로 입대날짜를 제일 빠른 날로잡아 1달후에 바로 군대에 입대를 했다.
군에 입대한 이유는 단순했다 이대로 내가 계속살기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것 같은 깊은 절망과 좌절감을 느꼇고
마주친 암울한 현실에서 도망칠 곳이 필요했기 때문에 언젠가 가야할 군대가 나에게있어 가장 합리적이고 최선의 도피책 이라고
생각하여 망설임 없이 입대를 했다.
군에 입대하고 정신없이 적응을 하고난뒤에 여유가생기니 슬슬 현실적인 생각을하게 되었고 그 당시의 집안사정은
4년전부터 수입은없고 지출만있는 상황 이였는데도 아버지가 그동안 일궈놓으신게 많아 빚이 없었고 가진재산은
아파트를팔고 전세로 들어와 살고있는 전세자금이 전부인 상황에서 내가 평범하게 전역을하고 대학에 복학 해봤자
나에게 미래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당장 돈을 벌수도있고 나에게 안정적인 수익이 들어올수있는길을 찾아보니 가까운곳에 학력과 무관하게
바로 돈을 벌수도있고 장기복무만된다면 안정적인 수익과 연금이 보장돼는 부사관이라는게 있어서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현역 부사관을 신청 하게되었고 그리고 나는 지금도 부사관으로 장기복무가 되어 겉으로나마 안정적으로
그냥 살아 가고있다.
아버지는 나에게 너무 과분한 아버지였다. 큰아버지밑에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거의 무급으로 요리사로 버텨가며 결국엔
가게를 이어받아 혼자 자수성가 하셨고 가게를 운영 하셨을때에도 그 바쁜 가게에서 조리를 끝까지 도맡아 하셨으며
사소한 것조차 허투로 낭비 하지않고 술담배는 일절하지않으며 누구보다 양심을지키고 개미처럼 묵묵히 일만하시던 아버지였고
어머니와 이혼하고 내가 그 이유를 물을때에도 그 이유가 나와 누나에게 상처가될까봐 나의 비난에도 끝가지 그 이유를
말하지않으셨고 내가 비뚤어질때도 그 흔한 회초리조차 들지않고 말로서 나를 가르치셨고
내가 아버지와 만나는 새여자와의 관계를 강력히 부정할때도 나의 의견을 존중해서 재결합을 할수있음에도 하지않으셨고
끝끝내 애쓰시다 병이들었을때에도 나와 누나앞에선 말기 암환자의 극심한 고통을 겉으로 내색 한적없고 1년을 버티기도 힘들다는
의사의 말이 무색하게 3년을 넘게 버티신 철인같은 아버지가
나에게는 있었다.
인터넷에서 모두가 보는 공간에서 글을 쓴다는것은 다른사람이 내 글을 읽고 나와 다른 혹은 같은 의견을 주고 받는것을 보기 위함이
대부분 이지만 제가 이렇게 써보지도 않았던 그리고 아무에게 말하지않았던 개인사정을 굳이 쓰는 이유는 피드백을 받기 위함
이라기보단 천주교에서 하는 고해성사에 가까울것 같습니다.
쓰고나니 별로 긴글도아닌데 이글을 쓰기위해 3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쓰면서 눈물이 나기도 하고 도저히 손이안가서 생각을
정리하느라 시간을 쓰다보니 많이 걸리게된것같습니다.
스무살까지의 제인생은 잠시 행복했던 유년기, 스스로의 오해에서 비롯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갈등의 중학생시절,
쓸떼없는 자존심만있어 잘못을 했음에도 끝까지 아버지와 감정의 골을 해결하지못한 고등학교시절, 너무 늦어버린 마지막 사죄
정도로 제가 의미있게 기억하는것은 모두 아버지에 대한 후회와 한이라고 볼수있을것 같네요
아버지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제게 과분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못난 아들이였고...
제가 이런 제 이야기를 남들에게 한번도 안했는데 그 이유가 그냥 저는 제 성격이 그런거라고 생각했는데
글을쓰면서 느낀게 제 성격이 이유가 아니라 제가 말해야할 이야기가 나에게 너무 부끄럽고 못난이야기라 말을 못했던것 같습니다
더 이상 쓸말은 없고 사실 pgr21의 연령층 중에 저는 정말 어린측에 속하는데 이런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아버지가 아직 계시다면 잘해주세요 혹시 사랑 한다고 말하신적이 없다면 꼭 사랑한다고 평소에 자주 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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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변에는 아버님과 사이좋은친구가 거의없습니다.
매일같이 아버지를 욕하는 친구들을보면서
나는 저러지말아야지생각하고.. 저희집은 나름 화목한가정이 유지된거같네요
다크고 서른중반넘어서보니 아버지를 욕하던 친구들은
희안하게도 그때 욕하던 아버지와 너무나도닮아있더군요... 그점이 참 마음이 아프더군요
아이들이 커가면서 점점 부모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는 횟수도 늘어갑니다. 앞으로 사춘기도 오고 그러면 훨씬 더 늘어가겠죠.
아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가급적 서운한게 있어도 말을 아끼는 경우가 많아진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혼내기보다는 내가 어렸을때 부모님께 했던 말이 생각이 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