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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6/08/19 15:43:06 |
Name |
깐딩 |
Subject |
[일반] 동물의 고백(1) |
불과 며칠 전 나는 다이어트 성공기랍시고 자랑스럽게 휘갈긴 글을 모 커뮤니티에 게시하였다.
별로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 글에는 커뮤니티에서 얻은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써 놨었다.
사실이긴 하다. 나는 그 커뮤니티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 덕분에 다이어트도 성공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그 글을 올린다고 내 인생이 더 밝게 빛날 것도 아니며
응원과 격려, 부러움의 댓글을 받아봐야 어차피 일시적인 자아도취뿐이니까.
그런데도 내가 그 글을 썼던 이유는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유지하게 된 계기에 대해 결실을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 지내왔던 인고의 시간을 되새기며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고뇌하던 그 말을 하기 위함이었다.
글을 쓰면서 결심과 용기를 굳건히 하고 싶었다.
아직도 나는 다이어트 글을 쓰면서 작고 빠르게 떨리던 손가락과 심장의 느낌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2014년 1월 2일, 첫 직장이자 현 직장인 이 회사에 입사한 날짜다.
당시 나의 직장 생활의 신조는 말조심이었다. 말 한마디 잘못하여 크고 작은 손해를 입은 사람들을 그동안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2015년 12월까지, 약 2년 동안 내 신조는 지켜져 왔었다. 그동안 회사에서 나는 딱 두 마디만 했었다.
"안녕하세요."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어디 말뿐이랴, 점심도 도시락 싸와서 혼자 먹고 회식자리도 대부분 마다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레 입이 떨어질 테니 사람을 멀리했다.
지금 생각하면 효과적이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내 할 일은 정확하게 끝내는 사원이었기에 별다른 트러블은 없었다.
하지만 나도 망각하는 동물인지라 스스로의 약속을 깨버리는 일이 생겨났다.
2015년 8월경 나보다 경력은 2년 많으나, 나이는 두 살 어린 여자 선배가 회사에 들어왔다.
그 당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선배가 들어왔구나' 싶었다.
나보다 나이가 적던 여자던 나에겐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먹고 놀고 자는 것을 좋아하며 와우에 미쳐있는 전형적인 게으른 동물이었으니까.
하지만 2016년 1월부터 이 선배가 혼자 감당하기엔 벅찬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 선배에게 후배는 나밖에 없었으니 당연히 도와달라고 해왔다.
짜증이 밀려왔다. 얼른 집에 가서 맥주 한 캔에 와우를 해야 하는데...오늘은 블랙핸드를 잡아야 하는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선배가 살려달라는데 후배가 쌩깔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입사 이래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밤샘작업을 시작하였다.
하루 만에 끝날 줄 알았던 작업은 일주일, 한 달이 돼가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아무 말 없이 어색함이 흘렀던 사무실에 적막함을 깨부쉈던 건 선배의 기이한 몸짓이었다.
의자에 앉아 열풍기 쪽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연신 짜증 난다는 말을 내뱉으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던지 마치 넘어진 펭귄이 다시 일어서지 못해 아등바등 거리는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원체 웃음이 많은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크게 터지고 말았다.
5분을 미친놈처럼 끅끅거리며 웃고 정신을 차려보니 선배도 신기한 광경을 봤다는 듯 나를 향해 말을 던졌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OO씨도 웃을 줄 아네요?"
그렇게 같이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지고 입도 트이게 되었다.
처음 이 선배가 입사할 때는 몰랐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외모도 성격도 좋은 사람이었다.
22살에 했던 대학 연애를 마지막으로 7년간 무덤덤하게 지냈던 내 연애 세포가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가 내 후배가 입사할 때였으니까 2016년 2월이다.
'좋아합니다.'
말할까? 말해볼까? 말할 수 있을까? 지금껏 듣기만 들었지 직접 말한 적도 없는 내가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나는 문득 신경 쓰지 않던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서 엄청나게 게을러 보이는 동물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싫었다.
'그래 살을 빼자, 사람이 되어서 내가 당신을 이렇게 좋아한다는 걸 어필하자'
그렇게 즉흥적으로 시작한 다이어트는 채 한 달을 못 채우고 3월 중순쯤 돼서 그만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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